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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안마애불의 도상 문제

기자명 주수완

삼존불 양쪽 부처님은 아미타·약사일까? 석가·다보일까?

▲ 태안마애삼존불, 백제, 6세기말~7세기초. 국보 제307호. 불입상 높이 약3m.

충남 서산군 태안면 동문리 백화산 기슭에 자리잡은 태안마애삼존불은 백제의 화려했던 불교문화를 대변하는 조각임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도상을 하고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흔히 문화적으로는 삼국 중에 백제가 가장 우수했었다고 이야기되지만, 망한 나라인 백제의 흔적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 가운데 예산 화전리의 사면불상, 서산군 운산면의 마애삼존불상, 그리고 이 태안마애삼존불상은 돌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망국의 재난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귀중한 작품들이다.

가운데에 작은 보살상을 두고
양옆으로 거대한 불입상 표현
어디서도 발견 안된 특이 도상

불상은 아미타·약사불 주장과
석가·다보 부처란 시각 양립

바이샬리 순성행화상 연관설
제기되는 등 미스테리로 남아

태안마애불은 1990년대 전반만 하더라도 절반 가까이가 땅에 묻혀있었고, 보호각 명목으로 설치한 가건물의 그늘 속에서 매우 초라하게 공개되고 있었다. 일부분을 발굴하여 땅 밑으로 아직 조각이 남아있음을 확인한 적은 있었지만, 불상이 새겨진 바위면 뒤쪽으로 균열이 있어서 마애불을 덮고 있는 흙을 제거하면 바위면이 앞으로 쓰러질 우려가 있어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 산동성 임치 용천사 출토 이불병립상. 북위시대.

이 마애불의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는 본존인 부처를 중앙에 두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을 배치하여 삼존불을 구성하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 가운데에 작은 보살상을 두고, 그 양 옆으로 각각 거대한 불입상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상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매우 특이한 도상이다. 과거 우리나라와 중국의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중국 감숙성 경양의 북석굴사에 이와 유사한 도상이 있다고 알려져 왔었다. 당시 연구자들이 거의 유일하게 참고하였던 중국·일본 공동 출간의 중국 석굴 도록에 실린 사진에 보면 마치 태안마애불처럼 두 구의 거대한 불상 사이에 보살상이 한 구 서있는 모습이 태안마애불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런데 중국과의 수교 이후 경양 북석굴사를 답사한 사람들에 의해 실제의 모습이 밝혀졌는데, 두 구의 불상 사이에 보살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상, 보살상, 불상, 보살상이 계속 연이어 석굴의 벽면에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다만 사진에서는 마치 태안마애불처럼 두 구의 불상을 중심으로 찍혀서 비슷해 보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태안마애불의 도상이 경양 북석굴사와 유사하다는 견해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다 보존처리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균열 부분을 보강하여 드디어 마애불의 다리와 연화대좌까지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었다. 막상 원래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나니 이 마애불의 예술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땅에 파묻혀 있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던 마애불이 이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상황으로 바뀌자 이들 불상의 당당한 위용과 압도적인 분위기가 백제 불교미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리매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과연 이 도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새로운 연구들이 출현했다.

▲ 중국 감숙성 경양 북석굴사 마애불, 북위시대. 불상과 보살상이 번갈아 봉안되었다.

과거에는 향우측 불입상이 손에 작은 단지 같은 것을 들고 있어서 이를 약사불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약사불은 동방유리광세계, 즉 동쪽을 상징하므로 향좌측의 불상은 자연스럽게 서방극락정토, 즉 서쪽을 상징하는 아미타불로 해석했다. 남향하고 있는 마애불의 향우측은 동쪽에 해당되고, 향좌측은 서쪽에 해당하므로 이 학설은 널리 인정되어 왔다. 더불어 가운데 있는 보살은 양손을 배 앞에서 모아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이러한 보살은 관음보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왔었기에, 아미타불과 그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이라는 점에서 이 해석은 큰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이 공개되고 그간 축적된 불교미술사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태안마애불이 양식적으로 중국의 북제시대 양식과 닮아있어 6세기말~7세기초 작품으로 편년되고 있는데, 이 시기는 아직 중국에서도 약사불이 유행하기 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단지를 들고 있다고 무조건 약사불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었다. 대신 이렇게 두 불상이 함께 표현되는 경우는 주로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등장하는 석가·다보의 두 부처님을 표현한 예가 많기 때문에 이 역시 석가·다보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였다. 그리고 석가불은 현재, 다보불은 과거를 상징하기 때문에 가운데 있는 보살상은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실제 중국의 운강석굴(雲岡石窟) 등에서 보면 석가·다보불이 나란히 앉아있고, 그 위로 도솔천에 머무는 미륵보살이 하나의 세트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태안마애불은 좌상이 아니라 입상이지만, 기본적으로 2불1보살의 구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많다.

▲ 바이샬리 석가순성행화상(釋迦巡城行化像), 돈황 막고굴 제237굴 서벽불감천정. 중당시기.

여하간 비록 석가불·다보불·미륵보살로 해석된다고 해도 태안마애불처럼 묘사된 경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백제의 창의적인 도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언뜻 종교미술은 매우 어렵고 엄격하게 사상적인 측면에 의거한다고 생각되지만, 불교는 사상이기 전에 종교다. 종교는 특정 엘리트나 상류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는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백제인들이 다른 나라에는 없는 전혀 새로운 태안마애불 같은 도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면 그것은 그만큼 백제 문화 전반적으로 불교문화를 매우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하겠다.

시대적으로 약사불은 등장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아미타·약사불의 도상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는 뿌리 깊게 남아있다. 그러나 아미타·약사불이건, 석가·다보불이건, 이런 독창적인 도상이 갑작스레 나타난 것은 아니었으리라. 어디엔가 기원을 두고 나타났을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중국에서 몇몇 참고가 될 만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우선 돈황 막고굴 237굴 천정에는 당시 유행했던 불교 도상들이 마치 백과사전처럼 열거되어 묘사되었는데, 그 중에 석가모니께서 바이샬리 도시를 돌며 중생들을 포교했던 장면, 즉 ‘바이샬리 순성행화상(巡城行化像)’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 당나라의 현장법사(玄奘法師, 602?~664)가 인도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불상들 중에 이 장면을 묘사한 불상도 있었는데, 아마 그것을 기초로 묘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장면 속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등장하고 있다. 왜 이렇게 두 분이 등장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만약 이러한 도상에서 착안한 것이라면, 태안마애불 도상이 바이샬리 순성행화상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도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 산동성 제남시 신통사 천불애 이불병좌상. 초당시기. 아미타불의 명문을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예는 연대를 더 올려 중국 남북조시대인 북위시대에 만들어진 불병립상(佛竝立像)이다. 산동성 임치 용천사(龍泉寺)에서 출토된 이 거대한 두 구의 석불상은 모두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마치 나란히 걷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바이샬리 순성행화상이나 이 용천사 이불병립상이나 모두 가운데에 협시보살은 없지만, 태안마애불의 이불병립 모티프와 상당히 닮아있다. 용천사 이불병립상도 혹시 바이샬리 순성행화상을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이 역시 석가·다보불일까? 그 뜻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 서로 연관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 가운데 산동성 제남시의 신통사 천불애(神通寺 千佛崖)에는 수나라로부터 당나라 전반에 이르는 많은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도상적으로 특이한 점은 이불병좌상을 조성하고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석가·다보불의 존명을 새긴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존명을 새긴 것이다. 분명히 두 구를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존명은 아미타불 밖에 없다. 왜 아미타불을 나란히 두 구나 새겼을까?

이와 같은 문제들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난제들이다. 물론 태안마애불과 유사한 듯 보이는 도상이 중국에 보인다고 하여 그 독창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이불병립상은 단지를 들고 있는 것도 보이지 않고, 가운데 협시보살도 없다. 석가·다보불을 중국에서의 예와 같이 좌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입상으로 표현했다면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태안마애불은 마치 앞에서 과거와 현재의 두 부처님이 나란히 걸어 나오고 계시고, 그 한 발짝 뒤로 미래의 미륵보살이 뒤따라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바위라는 벽면을 뚫고 우리 앞에 현현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이렇듯 박진감 넘치게 표현한 태안마애불은 풍부한 수수께끼를 안고 있어 더더욱 흥미롭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28호 / 2016년 1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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