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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슈미르-② 하르완 : 불전의 결집과 ‘대비바사론’ 편찬

하르완 승원서 협 존자 발의와 세우 주재로 4차 결집 개최

▲ 제4차 결집은 카니시카(132~152 재위) 왕 때 하르완 승원에서 개최됐다. 상단부에서 본 하르완 중심 승원터.

하르완을 찾아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카슈미르에 도착한 당일 바로 투어리스트 센터로 가 스리나가르 관광지도를 얻고 오토릭샤를 타고 하르완 불교유적지에 가자고 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하르완 불교 승원터는 1923년
판디트 람 찬드라 카크가 발굴
용수도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

카니시카왕이 편찬된 성전을
적동판에 새기고 석함에 넣어
스투파 안치, 약차신 지키게 해

이 결집은 비바사사에 의해서
확립된 불교학의 새로운 출발

그런데 지도 뒷면의 카슈미르 관광명소 안내 중 하르완의 설명에서는 10여년 전에 보았던 것과 달리 제4 결집지라는 말이 없었다. 대신 “스타인(M. A. Stein)은 그의 ‘칼하나의 라자타란기니(Kalhana’s Rajatarangini)’(1892년 판)에서 하르완의 유적지를 사다르하드바나(Sadar hadvana, The wood of six saints)로 간주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자타란기니’는 12세기의 역사가인 칼하나가 쓴 카슈미르의 왕통 연대기인데, 하르완의 승원이 바로 거기에 나오는 사다르하드바나라는 것이다. 왜 ‘제4 결집지’라는 말을 빠트린 것일까? 불확실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지명도가 떨어지기 때문인가? 그렇지만 다음 날 얻은 인도 고고학 조사국 스리나가르 지부에서 발행한 ‘카슈미르지역의 중점보호유물(Centrally Protected Monuments of Kashmir Valley, 2012)’이라는 팜플릿에서 “하르완의 사다르하드바나는 카니시카 왕 시대 네 번째 불교성전 결집 회의가 개최된 곳이라 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르완이라는 지명이 사다르하드바나(S.ad.arhat-vana), 여섯 아라한(성자)들의 원림(園林, vana) 즉 육성원(六聖園)에서 유래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물론 이 절(원림)은 현장을 비롯한 구법승들의 여행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현장은 마드얀티카(末田地) 아라한이 용왕으로부터 땅을 얻어 500 아라한을 위한 500의 가람을 세웠고, 대천의 5사송에 반대한 500의 나한승이 이곳으로 날아왔으며, 후술하듯 세우(世友)를 비롯한 500의 아라한이 이곳에 모여 성전을 편찬하였다고 하였지만, 6명의 아라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티베트 불교사에서는 제3결집의 개최지를 카슈미르의 카르니카바나(Karn.ika-vana 혹은 Kun.d.alavana-viha-ra: 環林寺)로 전하고 있다.

▲ 밑에서 본 하르완 중심 승원터.(왼쪽) 스리나가르의 최고 명소로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자한기르가 아내 누르자한을 위해 만들었다는 샬리마르 정원.(오른쪽)

하르완의 불교승원 터는 1923년 판디트 람 찬드라 카크(Pandit Ram Chandra Kak)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카크는 여기서 구현된 건축기법, 자갈과 진흙, 자갈과 잡석의 비례를 달리하여 연속적인 기하학적 패턴(diapher)을 만들어 내면서 벽을 쌓는 세 양식(pebble style, diaper pebble style, diaper rubble style)에 따라 이 절을 최초기 시기, A.D. 300년, 500년 이후의 것으로 추정하였다. 물론 칼하나의 연대기에서도 A.D. 3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따르면 나가르주나(龍樹)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절은 현장이 카슈미르를 방문하였을 때는 물론 쿠샨 시대에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하르완의 불교승원터는 스리나가르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상카라차르야 언덕을 돌아 달 호수를 끼고 무굴 시대에 조성된 정원인 차스마 샤흘 가든, 니샤트 가든을 지나 자한기르가 아내 누르자한을 위해 만들었다는 샬리마르 가든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릭샤에서 내려 수원지 쪽 골목언덕을 50여 미터 올라가자 경사진 산비탈에 유적지가 나타났다. 십 수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관리인도 같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유적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새로 다시 발굴되었는지 말끔히 단장하였다. 스투파, 비하라(승방), 강당, 부엌 등의 유지도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특히 이 승원은 중정 바닥에 깔렸던 동식물이나 인물을 얕게 부조한 테라코타 타일이 유명하여 스리나가르 관광안내 팜플릿에도 승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게재되어 있고, 박물관에서도 그것이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관리인도 우리를 따로 불러 타일의 파편을 구경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 전에는 불상 파편을 보여주었는데.

세 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의 승원에서 어떻게 결집이 이루어졌을까? 오늘에도 성전의 편찬은 절대 쉽지 않을 터, 성전에 어떤 말씀과 주장을 담을 것인가? 격론이 벌어졌을 것인데, 당시 500명의 아라한이 승원 어디서, 어떻게 격론을 벌여 편찬한 것일까? 더욱이 그 때는 이미 다수의 부파가 분열한지라 자설(自說)의 순수성을 확보해야만 하였을 것인데, 수많은 철학적 문제(法相)에 대한 그들 사이의 통일된 견해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 창고와 전방후원(前方後圓) 형식의 스투파.

인도불교사에 의하면 네 번의 성전편찬(이를 ‘結集’이라 한다)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불타가 입멸한 바로 그해 정법의 멸실을 우려한 가섭의 발의로 500명의 아라한이 라자그라하(왕사성) 칠엽굴에서 우팔리가 율(律)을, 아난다가 법(法)을, [마하승기율의 경우 가전연이 아비달마를] 암송하고 전원이 함께 암송(合誦)함으로써 불설로 승인하였다.

두 번째는 불멸 100년, 금은 수납 등 밧지 비구들의 10가지 비법(非法)으로 인해 레바타 장로의 발의로 700명의 아라한이 바이샬리에 모여 시행하였다.

처음 두 번의 결집 전설은 약간의 차이가 없지 않을지라도 ‘사분율’ 등 여섯 부파에서 전승한 광율(廣律) ‘건도부’에서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전승, 예컨대 ‘대당서역기’에서는 제1차 결집에 소외된 수백천(만)명이 별도의 결집(經·律·論과 雜集藏·禁呪藏)을 시행하였고, 남전 ‘마하밤사’나 ‘디파밤사’에서는 밧지 비구 역시 별도의 대규모 결집을 시행하여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존 대중부 율장인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 수납 등을 비롯한 10가지 사항을 역시 비법으로 규정한다. ‘마하밤사’ 등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많은 경론에서 정법의 멸진(滅盡)을 설하고 근본결집이 산실되었다고 전하며, ‘아비달마=불설’론이나 ‘대승=불설’론에서는 이를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불교성전은 다른 종교의 성전과는 달리 그 유래가 매우 불분명할뿐더러 그 수량에 있어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그것은 불교의 진리성이 다만 교조의 말씀, 절대적 믿음 등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타는 열반에 들기 전 “사람(말하자면 교조나 그 후계자)에 의지하지 말고 법(혹은 經)에 의지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불설(佛說)이란 다만 불타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법성(진리성)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고, 법성 또한 믿음이 아니라 논리(正理)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었다. 해서 불교에는 이설이 많을 수밖에 없고, 성전 또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수없이 생산되었다. 동아시아에 이르러서조차 성전은 찬술되었다. 이를 위경(僞經) 혹은 의경(疑經)이라 하지만 가짜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인도 찬술의 진경(眞經)에 상응하는 말일 뿐이다.

▲ 중정에 깔렸던 테라코타 타일.

인도불교사가 전하는 나머지 두 번의 결집은 상좌부와 설일체유부가 자신들의 교설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다. 즉 세 번째는 불멸 236년 아쇼카 왕 때 파탈리푸트라의 아쇼카원(園)에서 포살을 행하지 않는 6만의 외도 적주(賊住)를 물리치고 상좌부의 분별설을 선양하기 위해 목갈리풋타가 결집을 단행하고 ‘카타밧투(Katha-vatthu)’를 지어 이설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다만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디파밤사’(4∼5세기)에서 전할 뿐이다.

그리고 네 번째가 바로 카니시카(132∼152 재위) 왕 때 협(脇) 존자의 발의와 세우(世友)의 주재로 카슈미르의 하르완 승원에서 개최되었다는 결집이다. 카니시카 왕의 결집은 현장의 ‘대당서역기’나 ‘대비바사론’ 상의 그의 발문, 티베트 전승(이에 따르면 ‘제3결집’)에서만 전한다.

불멸 400년에 카니시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여 여가에 불법을 학습하던 중 강설하는 이마다 논의가 달라 의혹이 생겨났다. 이에 협(脇) 존자가 “여래가 세상을 떠난 후 세월이 많이 흘러 각기 견문(見聞)한 바에 따라 제자들의 부파마다 주장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논의가 달라 서로 모순된다”고 해명하자 왕은 이를 비탄하며 각 부파의 주장에 따라 삼장을 주석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3명(明) 6통(通)을 갖추고 삼장과 5명에 통달한 499명의 아라한과 함께 간다라에서 카슈미르로 옮겨와 마지막으로 참석이 허락된 세우(世友)의 주재 하에 각기 10만송의 ‘우파데샤’와 ‘비나야비바사론’과 ‘아비달마비바사론’을 지어 경·율·론 3장(藏)을 주석하였다.

간다라는 협 존자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당시 제국의 수도였음에도 왜 카슈미르로 옮겨왔던가? 간다라는 더위와 습기가 염려되었고, 제1차 결집처였던 왕사성의 석실(칠엽굴)은 외도의 이견이 분분하여 그들 시비에 대응할 경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지만, 카슈미르는 사방의 산이 견고하고 약차(藥叉)가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산이 풍부하며 현성(賢聖)이 모여들고 선인(仙人)이 노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카슈미르가 이설자들의 왕래가 적어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기가 유리한 곳임을 말한 것으로, 카니시카 왕 역시 편찬된 성전을 적동판에 새겨 석함에 넣어 스투파에 안치하고서 약차신으로 하여금 이학(異學)이 반출하지 못하도록 지키게 하였다. 이 역시 당시 제 부파 사이의 치열한 교리논쟁에서 이설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험준한 산악지형을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이용하였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간다라 출신의 세친은 일찍이 유부에 출가하여 이 부파의 삼장을 수지하였으나 그 뒤 경량부를 배움에 따라 유부학설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카슈미르에 익명으로 잠입하였다가 중현의 스승인 스칸디라(悟入) 아라한이 그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는데(이후 귀국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다), 이 또한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카슈미르 현성들의 생각이 반영된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 하르완의 승가람이 우리네 절처럼 산비탈에 기댄 채 저 멀리 카슈미르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어 정겹게도 느껴졌지만, 500명의 아라한이 참여하였다는 성전의 결집은 잘 연상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을 떠나기가 몹시 허전하였다. 카슈미르 결집은 비바사사(毘婆沙師)에 의해 확립된 불교학의 새로운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큰 길로 나와 스리나가르의 최고 명소인 샬리마르 정원에 들렀다. 하르완과는 달리 축제장처럼 인파로 들끓었다. 좌우대칭의 정원과 왕궁, 그리고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달 호수와 거기에 비친 히말라야의 자락, 그림 같았다.

문득 무굴제국의 정원이 왜 이곳에 조성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굴제국의 무제(武帝) 아크바르는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천도하고서, 거기서 1000㎞도 더 떨어진 이곳을 어찌 알고 여름 별궁으로 삼았을까? 경치 좋은 이곳의 이전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절을 의미하는 바나(vana)가 바로 정원의 원(園), 원림(園林)이 아니던가? 기수급고독원이 그러하였고 죽림정사(vel.uvana-viha-ra)가 그러하였다. 하르완의 승가람과 같은 산을 끼고 조성된 이곳 무굴제국의 정원 역시 카니시카 왕 무렵 승원 일부가 아니었을까? 우거진 숲과 어디서나 저 멀리 히말라야 산록의 모습이 비친 호수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이곳이 바로 불타가 지관(止觀)을 닦는데 최적지라 찬탄하였던 그 카슈미르가 아니었을까?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29호 / 2016년 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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