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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를 위한 우바새계경 강설] 3. 발보리심품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6.01.26 14:11
  • 수정 2016.01.26 14:14
  • 댓글 1

부처님이 재가불자에 설한 발보리심 최우선 목적은 재물·수명

▲ 안심정사 회주 법안 스님이 재수불공을 집전하는 모습. 법안 스님은 모든 재수불공을 직접 이끌며 불자들의 실천행을 이끌고 있다.

오늘은 ‘우바새계경’ 제2품 ‘발보리심품’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강설에서 ‘보리’가 곧 깨달음임을 확인했지요? 부처님께서는 이 깨달음의 마음을 어떻게 내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하셨습니다.

보리심은 굳은 믿음에서 출발
부처님 가르침 믿고 실천해야
발보리심 목적도 구체적 제시

소원·발원이 세속적이더라도
그것은 범부중생의 현재 속성
유치한 소원 부끄러워 말아야
성취 위한 노력 가피로 이어져
무량한 이익 얻는 실천의 과정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은 보리심을 어떻게 냅니까?” “선남자여, 두 가지를 위하여 보리심을 내니 첫째는 수명을 늘리기 위함이고, 둘째는 재물을 늘리기 위함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종성(菩薩種姓)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중생의 갖가지 죄와 고통과 번뇌를 끊기 위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발보리심의 목적에 대해서도 가장 먼저 ‘수명과 재물을 늘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가불자들은 불교를 믿는 이유를 고민할 필요 없이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믿고 재물을 늘리기 위해서 믿는다”고 대답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의구심이 들지요? “너무 세속적인 얘기가 아닐까요? 좀 수준 낮은 얘기가 아닐까요?” 이미 많은 불자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공(空)이나 연기, 무아의 진리를 담은, 뭔가 어려운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너무나 세속적인 ‘수명과 재물’을 위함이라고 단정 지어도 괜찮을까 싶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신심 깊은 불자들이 쉽게 놓치는 한 가지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한 불자가 물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시는 불교는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불교가 아닙니까?” 즉 기복불교(祈福佛敎)라는 말이지요. 기복불교는 수준 낮은 불교라는 것이 한국 불교계의 대체적인 인식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까요?

안심정사 온라인 카페(cafe.daum.net/ ansim24)에 어느 불자가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불교가 워낙 고상한 것만 찾다 보니 오히려 현실을 도외시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삶이 아닌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어떠세요? 공감이 되시나요? 우리가 사는 현실, 그리고 삶 속에서 당면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까요? 고상하게 깨달음과 진리만 바라보고 있으면 해결이 될까요?

부처님께서 특별히 재가불자들을 위한 법을 따로 설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즉 수명과 재물을 늘리기 위해 불교를 믿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불자들에게 10가지 목표를 정해 소원표를 작성하라고 권합니다. 간혹 소원을 10개나 적으면 욕심이 아닐까 고민하는 불자들이 있어요. 또 어느 분은 “너무 유치한 소원만 있어서 소원표 작성하기가 부끄럽다”고 합니다.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고 노력을 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500개, 1000개를 적어도 욕심이 아닙니다. 또한 세속적이고 유치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소원이 되지 못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범부중생이 세속적이고 유치한 것은 지극히 정상이니까요. 무엇보다 부처님께서 불교를 믿고 깨달음의 마음을 내는 이유에 대해 이토록 명확하게 말씀하셨잖아요. ‘첫 번째 수명을 늘리고 두 번째 재물을 늘리기 위함’이라고요. 착각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을 믿는데서 출발하세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명료하게 말씀하셨으니 오해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믿으시면 됩니다.

‘우바새계경’ ‘제11 자타장엄품’ 첫 구절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 마하살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법을 갖추어야 합니까?”

보살 마하살은 육바라밀을 실천 수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보살은 나와 남이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겠다는 원력을 세운 사람을 일컫는데, 그 중에서도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육바라밀을 수행한 사람을 마하살(크게 발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대한 답으로 여덟가지 법을 설합니다.

“첫째는 긴 수명이고 둘째는 뛰어난 외모를 갖춘 것이며 셋째는 커다란 힘을 갖는 것이고 넷째는 높은 신분을 갖추는 것이며 다섯째는 재산이 많은 것이고 여섯 번째는 남자의 몸을 갖는 것이며 일곱째는 언변이 분명함이고 여덟째는 대중을 두려워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지요? 어찌보면 세속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부처님은 남과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언급하신 거예요. 어때요? 재가불자들이 나와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보살 마하살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목표가 너무나도 명료하지 않습니까? 이 여덟 가지 법을 갖추는 구체적인 방법도 ‘우바새계경’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차후 11품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고 ‘발보리심품’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중생이 보리심을 내는 이유입니다.

“선남자여, 두 가지를 위해 보리심을 내니 첫째는 한량없는 세상에서 큰 고통과 번뇌를 받으며 이익을 얻지 못함을 관찰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비록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부처님들도 우리의 모든 몸을 제도하여 해탈 시킬 수 없기에 자신이 스스로 제도해야 한다는 것을 관찰하기 위함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선한 업을 짓는 것이고, 둘째는 짓고 나서 잃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우바새계경’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보리심을 내기 위한 목적에는 이토록 큰 의미가 있다는 것 아셨나요? 부처님께서는 ‘우바새계경’을 통해 재가불자로서 나아갈 방향과 실천행을 구체적으로 설하신 동시에 오직 ‘스스로가 믿고 실천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스스로 주인됨을 일깨우는 가르침이지요.

또 모든 선업을 지어야 함은 물론, 이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수명이 길어지고 재물이 늘어나면, 우리가 이를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찌보면 선업을 짓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어요. 복을 지어 놓고서 그 복을 관리를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느 분이 자장면을 보시해 대중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올 때마다 “그 자장면 맛있었지요?”하고 자꾸 물어요. 그것도 한두 번 물어야지 올 때마다 물으면 어떨까요? 짜증이 나겠지요? 만날 때마다 자꾸 옆구리 찔러 절 받으려고 하면 선업을 쌓아놓고도 유지가 되겠어요? 내가 공양을 올렸거나 불사를 했거나 또 누구를 대접했거나 그러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잊어버리는 게 잘하는 거예요. 바로 ‘무주상보시’죠. 선업을 통해 복을 잔뜩 심어놓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면 그 마음은 곧 독초와 같아서 선업을 모두 독으로 오염시켜 버리는 셈입니다. 베풀었다면 베푼 그 행위로 끝나야지 여기에 보답을 바라거나 원망하는 마음, 탓하는 마음이 생기면 안 되는 거예요. 이미 허공 법계에서 선업에 대한 인과응보로 오는 것이고 부처님께 공양 올려 부처님께서 받아주신 것이니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선업을 잘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 성공시켜 놓으면 그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범부중생의 습성입니다. 그런데 막상 보답을 바라고 찾아가면 문전박대할지도 모르지요. 그 어떤 부귀영화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월이 변하고 위치가 변하고 순서가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여 아쉬움이 생기고 원망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따라서 선업을 지어놓고 결국은 악연이 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지요. 잘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인간과 하늘의 과보보다 뛰어남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모든 이승의 과보보다 뛰어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살도를 왜 실천할까요?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성문승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연각승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공덕으로 인천의 스승이 되어서, 사람과 하늘 신들을 전부 이롭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스승이 되고자 함입니다. ‘인간과 하늘의 과보보다 뛰어남을 위하고 이승(성문승과 연각승)을 뛰어남을 얻는 것. 보살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이제 ‘수행한다’ ‘닦는다’는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합시다. 한국 불자들에게 그 의미를 물으면 대부분 명확히 대답을 못합니다. 간혹 비유하는 ‘거울에 묻은 때를 닦아 낸다’는 의미는 엄밀히 말하면 수정주의로, 불교가 아닌 브라만교입니다.

불교에서 ‘닦는다’는 곧‘바뀌게 한다’와 상통합니다. 그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삼무루학(三無漏學), 즉 계·정·혜(戒定慧) 삼학입니다. 들어보셨죠?

첫 번째 계학을 살펴봅시다. 계(戒)는 한자로 지악수선(止惡修善), 즉 ‘악함을 멈추고 선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꿔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내가 악한 마음, 악한 말과 행동을 선함으로 계속 바꿔가는 거예요. 생각 하나하나가 선으로 변하나보면 궁극적으로 지극한 선(至善), 또한 선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우리 운명이 완벽하게 달라지겠지요?

두 번째 정학은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과 이별하고 즐거움을 얻는다)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을 조금씩 줄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렇게 바꿔나가다 보면 세상 전체가 즐거움으로 바뀌겠지요? 이것이 곧 극락입니다. 극락이 십만팔천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마음을 바꿔나감으로 인해 지금 앉은 이 자리도 극락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어렵겠지만 꾸준히 닦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혜학은 지혜를 연마한다, 즉 ‘전미개오(轉迷開悟)’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굴릴 전, 어리석을 미. 어리석음을 돌려서 개오(開悟), 깨달음을 여는 지혜가 된다는 말이죠.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별개가 아니라 회전문의 양문과 같습니다. 한 바퀴 돌리면 어리석음, 한 바퀴 돌리면 깨달음이죠. 어리석음을 계속 지혜로 바꿔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계정혜, 삼학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어떻게 바꿔나갈 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몫이며 노력이겠지요. 지난 강설에서 설명한 자리이타의 세 가지 단계 기억하시죠? 첫 번째는 내 앞가림을 잘하고, 두 번째는 남을 돕고 세 번째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안심정사 온라인카페에 기도 경험담을 나누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한 불자가 기도해서 성취한 내용을 올리면 감동과 감사의 댓글이 잇따라 올라옵니다. 그 자체로 법공양인 셈이죠. 내가 기도로 성취한 뒤 그 경험담을 나눠 남도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니, 나와 남이 좋을 뿐 아니라 법공양의 공덕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이제 오직 남들만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겠다’는 원력이 되겠죠? 이때부터는 그야말로 무량대복(無量大福)입니다. 보살도를 실천함은 곧 인간과 하늘의 과보를 넘어 이승(성문·연각)의 과보보다 뛰어남을 얻는 일이니 얼마나 행복하고 멋진 일입니까.

여러분,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디디세요. 내가 힘든 상황임에도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무거운 발원으로 힘들어하지 말고, 내 앞가림부터 잘 하고 주위를 도운 뒤 차근차근 원대한 발원으로 나아가세요. 내 아들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먼저 아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세상의 아들들을 위한 기도는 우선 불보살님들에게 맡겨 두십시오. 나와 내 아들이 행복해진 후 그 방법을 공유하고, 나아가 발보리심으로 세상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일 수 있습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괴로움과 번뇌를 받아 보리의 도를 구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셀 수 없이 크고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무량하고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발보리심하는 것이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니 재가불자들의 유치하고 세속적인 발원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진리를 설하고 그 실천을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의 개똥철학이 아닌 경전에 근거한 부처님 말씀이니 일단 믿고 따라보세요. 저 역시 이번 연재의 형태는 ‘강설’이지만 재가불자를 위한 경전이니만큼, 보다 쉽고 편하게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329호 / 2016년 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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