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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 마음

기자명 김용규

당신은 모든 생명을 차별없이 대하고 있는가

축적한 경영학 지식의 양이 꼭 경영자로서의 성패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경영자 중에는 경영학 학위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지식의 다소가 부자와 빈자를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 불교에 관한 지식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제 삶의 진짜 주인자리를 틀어쥘 수는 없을 것이다. 지식을 넘어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오늘 글에서는 숲을 참구하며 터득하게 된 나의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자는 모든 타자에 대한 사랑
비는 고통 동참하려는 마음
실천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적용

숲에서 펼쳐지는 생명들의 양상 속에는 우주와 삶의 운행과 관계된 귀한 지혜들이 가득하다. 그 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가는 길에 마주하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스승이 된다. 마주하는 모든 생명이 스승으로 다가올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숲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숲이 보여주는 귀한 삶의 지혜를 마주할 수 없다. 숲을 이루는 수많은 나무나 풀, 동물 혹은 버섯과 미생물 따위의 이름을 많이 아는 이라고 그 지혜가 저절로 튀어나와 그 앞에 설 리 만무하다.

내 경험으로 그 지혜의 눈은 ‘눈(eye)’이라는 감각기관이나 뇌의 저장메커니즘을 통해 열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슴으로 보아야 생명들의 삶이 보이고 그들이 일러주는 삶의 지혜가 다가온다. 길을 걷다가 혹은 숲을 산책하다가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치자. 그대는 어떤 생각을 갖는 사람인가? 보통사람들은 대략 다섯 가지 관점을 넘어서지 않는다. 첫째, 이름이 뭘까? 둘째, 먹을 수 있는 걸까? 혹은 차 만들 수 있을까? 셋째, 먹으면 어디에 좋대? 넷째, 심으면 돈 좀 되려나? 그리고 마지막 관점, 이 관점은 그나마 내가 다행한 눈이라 여기는 것인데, ‘와 예쁘다!’라는 심미적 눈이 바로 그것이다. 이 외에 다른 관점으로 그 생명을 바라보는 사람은 참으로 희소하다. 나는 이러한 범주의 시선을 모두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슴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관점일까? 그것은 생명을 다른 차원으로 대하는 것이다. ‘아, 저 꽃 안에도 나와 다르지 않은 열망이 있구나. 저 나무의 삶에도 내가 지닌 것과 같은 상처가 깃들어 있구나, 저 존재도 견디고 넘어서야할 삶의 고(苦)와 고(孤)가 있구나.…’ 내가 말하는 가슴으로 본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이 눈을 뜻한다. 한마디로 ‘저 생명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생명이구나’하는, 대상으로서 그것을 대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그 존재가 되어볼 줄 아는 눈’으로 나무 한 그루를 대하고 풀 한 포기를 대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 눈은 풀 한 포기가 피워내는 꽃을 마주할 때 저 자신이 삶에 품고 있는 성취의 열망을 볼 줄 아는 눈이요, 어느 나무의 부러지고 꺾인 가지를 마주할 때 내가 입었던 상처처럼 그 자리를 아프게 볼 줄 아는 눈이다.

여전히 가슴으로 본다는 뜻을 가늠하기 어렵다면 붓다께서 몸으로 이르시고 실천하신 자비(慈悲)의 행을 떠올리면 선명해질 것이다. 먼저 자(慈)라는 것이 무엇인가? ‘본생경’이 전하는 예 하나만 살펴보자. 출가 전 태자 시절 싯다르타가 아버지인 슈도다나왕이 거행한 파종식에 참가했다. 그 행사에서 싯다르타는 발가벗다시피 한 농부의 여윈 몸과 삶의 고통을 본다. 후려치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소의 고달픔을 보고, 뒤집히는 흙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체들의 아우성을 본다.

싯다르타가 인간을 넘어 다른 생명들까지 대등한 관점으로 인식한 이 자세가 바로 자(慈)일 것이다. 나는 자(慈)를 이 대등함의 자세, 우정의 자세로 나 아닌 모든 타자를 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라 이해하고 있다. 비(悲)는 그 고통 받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부터 출발한다. 타자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마음이 곧 비(悲)일 것이다. 이후 삶에서도 부처님은 모든 존재를 대등하게 대하셨다. 우리가 새겨야 할 자비의 정신과 실천은 사람의 세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 아닌 다른 생명에게도 똑같이 스며야 할 것이다.

지금 도처가 사상 초유의 혹한과 폭설 속에 놓였다. 노숙의 공간과 쪽방촌과 독거 공간의 추위가 온기를 요구한다. 숲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생명이 꽁꽁 언 시간을 건너고 있다. 혹한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는 저 아픔들 모두가 곧 우리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30호 / 2016년 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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