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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슈미르-③ 파리하스포라의 몽제사

파리하스포라는 카슈미르 중세왕국 카르코타 제국의 수도

▲ 파리하스포라 승가람의 스투파 전경. 8세기 카슈미르 중세왕국인 카르코타의 랄리타디트야 왕에 의해 세워졌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10여년 전 택시를 대절하여 타고 갔음에도 파리하스포라의 불교승원 유적지까지 3시간 넘게 걸렸었다. 가는 길에 점심도 먹어야 했다. 이제 생각하면 점심을 먹은 곳이 파탄이었으니, 스리나가르에서 굴마르그를 거쳐 파탄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왜 돌아서 왔는지, 당시 수없이 검문을 받았는데, 이곳으로 바로 오는 도로가 폐쇄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안내인에게 속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나 시간에 관계없이 하루치 요금을 지불하기로 하였으니 길을 속일 이유는 없었다.)

스리나가르서 25㎞ 떨어진
그곳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승원·법당·스투파 건축물 3점
랄리타디트야 왕 때 조성돼

당시 이곳 찾은 당나라 오공
간다라에서 ‘법계’ 법명 받고
카슈미르 몽제사에서 구족계
불교학술저서 ‘오공입축기’서
설일체유부 학습 현황 소개도

파리하스포라는 스리나가르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곳이다. 스리나가르에서는 근교 단거리 이동을 대부분 ‘세어 택시’라고 이름 하는 승합차를 이용하였다. 차종은 대개 SUV형으로, 앞뒤 6명에 뒤편 보조의자에 4명 도합 10명이 차면 언제고 출발한다. 물론 어린애는 승객 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파리하스포라 행 세어 택시는 제너럴 버스터미널 앞 4번(No4) 택시 스탠드에서 출발하였다. 차비는 80루피(1500원), 한 시간 정도 걸렸다.

▲ 이 스투파 기단 위에 석재가 흩어져 있다.

파리하스포라 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SSM(Srinagar School of Management) 공과대학 입구에서 내렸다. ‘고대 불탑(스투파), 승원, 법당(차이트야), 2.75㎞’라는 낡은 간판이 서 있었다. 들판을 지나 산등선을 돌아 학교 앞을 지나자 옛날 기억해 두었던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대학에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고, 승원 입구에 아몬드 밭은 없어졌고, 주차장과 승원에 큰 철문이 생겼다. 그러나 승원의 유적지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마구 쌓인 돌무더기도 그대로였다. 저만치에서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때도 소가 풀을 뜯고 있었던가?

철문은 안으로 잠겨있었다. 유적지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관리인인 듯한 이가 나타나 문을 열어주었다.

“앗 살람 알라이 쿰”

▲ 스투파에서 내려다 본 승가람 입구.

승원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였다. 이는 나만의 느낌이 아닌 듯하다. SSM 공과대학 홈페이지 방문자 정보란에서 ‘고대 카슈미르의 수도, 파리하스포라’를 소개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곳 승원은 매우 조용하고도 고요하다(very calm & quiet)”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의 승원유적은 동네초입의 입간판에 쓰인 대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동쪽 정문에서 들어가면 좌측으로 승원(vihara)이 있고, 다음에 2층 기단의 법당(caitya)이 있으며, 그리고 제일 안쪽으로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인 스투파(stu-pa)가 있다. 스투파의 기단은 장엄하고도 단단하게 보였다. 너무 크고 높아 안내서를 읽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스투파 기단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방형의 2층 기단은 높이가 각 층 모두 내 키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위에 세워졌을 원형의 돔이나 칫트라라고 하는 층층이 쌓아올린 일산(日傘) 모양의 산개의 높이는? 이 역시 가늠하기 어려웠다. 파리하스포라는 산이 보이지 않는 평원지대에 존재한다. 아마도 스투파는 경주의 황룡사 9층탑처럼 이곳 파리하스포라를 압도하였을 것이다.

▲ 파리하스포라 승가람 입구에 위치한 승원 터.

불교미술사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보는 산치 대탑과 같은 원형의 기단은 초기의 불탑 형식이고, 그것은 점차 방형(方形)으로 바뀌며, 다시 파리하스포라의 스투파처럼 네 면에 계단을 돌출시켜 설치하는 형식(십자형의 평면)도 나타난다. 간다라의 카니시카 대탑도 후대에 이런 형식으로 변형되었고,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탁실라 시르캅의 두 머리의 독수리 탑(雙頭鷲塔)도 동일한 형식이다. 대개 7세기 이후 등장하는 형식이라 한다.

파리하스포라는 카슈미르 중세왕국인 카르코타(Karkota) 제국(625∼1003)의 수도였다. 인도 고고학 조사국 스리나가르 지부에서 발행한 ‘카슈미르 지역의 중점보호유물’ 팜플릿에서는 여기의 세 건축물은 모두 다 랄리타디트야(Lalitaditya, Muktāpiḍa, 724∼760) 왕 때 지어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랄리타디트야는 하르샤(戒日王)가 세운 인도 중원(카나우지)의 바르다나 왕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카불까지 미친 아랍세력을 격파하여 카슈미르를 북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만든 왕이다. 그는 왕국의 수도를 스리나가르에서 이곳 파리하스포라로 옮기고, 비슈누 사원 등의 네 사원을 건설하였는데, 불교사원의 동으로 만든 불상은 하늘에 닿을 정도였고, 본전(本殿)은 그가 세운 또 다른 힌두사원인 마르탄다의 태양(surya) 사원보다 컸었다고 한다.

그 시대, 이곳을 방문한 중국인이 있었다. 오공(悟空)이라는 이였다. 연대기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혜초 역시 이 시기에 카슈미르를 방문하였다. 그렇지만 약관의 나이 때문인지 그는 당시의 왕통이나 불교계의 사정을 엿볼만한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나라는 좀 큰 편이고 왕은 500마리의 코끼리를 갖고 있었다. 왕과 수령과 백성이 모두 삼보를 공경하였고, 나라 안에는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足寺足僧) 대승과 소승을 함께 행하고 있었다”는 정도로 이 나라의 불교를 소개하고 있다.

오공은 당나라 때 인물인 차진조(車秦朝)의 만년의 법호이다. 그는 21세(750년) 때 당 현종이 파견한 인도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천축(간다라)에 갔다가 병을 얻어 사절단과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혼자 남게 되었다. 27세가 되던 해(757년) 간다라에서 월마삼장(越磨三藏)에게 출가하여 달마타도(達磨馱都, Dharmada-thu) 즉 법계(法界)라는 법명을 받고, 2년 뒤(759년) 카슈미르에 와 몽제사(蒙鞮寺)라는 절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원조(圓照)가 찬술한 ‘오공입축기(入竺記)’에서 “몽제사는 당시 북천축의 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이 즉위한 후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몽제(Moung-ti)’는 묵타피다 랄리타디트야의 간략한 음(묵-트야)의 역어일 것이다.(중국 사서에서 이 왕은 木多筆로 음역.)

▲ 승가람 터 여기저기에 석재와 돌무더기가 나뒹굴고 있다.

오공은 카슈미르에서 4년을 보냈다. 그는 그 사이 당시 300여 가람과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스투파와 불상을 순례하고 범어도 학습하였다고 하였지만, 불교학술과 관련하여 그의 ‘입축기’에서는 “몽제사에서 성문계(聲聞戒)를 외우고, 외우기를 다하면 근본율의를 학습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계를 받으면 스승은 계본(戒本: 바라제목차)을 지침으로 삼아 [범계의] 죄상(罪相)을 알게 한 후 비로소 계를 외우게 하였으며, 이에 익숙해지면 대 율장을 암송하여 매일 아침마다 외운 것을 테스트 한다”는 의정(義淨, 671∼695 인도체재)의 전언에서 계본의 학습과 암송의 순서가 바뀐 것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공입축기’에 의하면 당시 북천축에서는 어디서나 다 살바다(薩婆多), 즉 설일체유부가 학습되고 있었는데 편찬자 원조는 이를 ‘근본설일체유부’라고 해설하고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는 설일체유부의 율장인 ‘십송율’과는 별도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라는 율장을 전승할뿐만 아니라 다수의 논서에 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필시 부파의 일종이었을 것이지만, 오늘날에서조차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근본유부비나야’의 역자인 의정은 근본유부를 유부의 분파로 전하고 자신의 ‘남해기귀내법전’에서의 논설은 다 유부의 ‘십송율’과 유사한 ‘근본유부비나야’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의 불교학자 부톤(1290∼1364)은 설일체유부와 근본설일체유부는 동일한 부파로 불교 모든 학파의 근본(mūla)이 되기 때문에 그같이 이름한 것이라 하였고, 바브야(Bhavya)가 전한 대중부 전승에서는 유부에서 분파한 경량부가 근본유부로 자칭하였다고 하였다. 다른 한편 ‘대지도론’에서는 율장에는 아바다나(譬喩)와 자타카(本生)를 포함하는 80부로 이루어진 마투라의 율장과 이를 제외하고 다만 10부의 요지만을 취한 카슈미르의 율장(즉 ‘십송율’)이 있다고 하였는데, ‘근본유부비나야’가 ‘십송율’과 다른 현저한 특징이 바로 다수의 아바다나가 삽입되어 다른 율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광대한 분량(현존은 18부 198권)을 지닌다는 점이다. ‘잡사(雜事)’만도 40권에 달한다.

이에 따라 근본설일체유부는 ①카슈미르 유부와는 다른, 마투라에 기반을 둔 별도의 학파 ②유부와 동일한 학파 ③카슈미르 유부의 후기학파, 혹은 ④2세기 무렵 간다라 박트리아에서 출현한 유부로부터 분파한 경량부라는 등의 가설이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설은 각각의 전승과 단편적 사실에 따른 것으로, ‘십송율’과 ‘근본유부비나야’의 전면적인 비교분석 내지 아비달마의 교학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중현은 당시 경량부(상좌 슈리라타)도, 찰나론자도, 가유론자도, 나아가 도무론자(都無論者: 반야 중관론자)도 ‘설일체유부’로 자칭하였지만, 그같이 이름 할 수 없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상식을 원천적으로 깨트리는 언사이다.

아마도 유론(有論, sadvādin)은 ‘진실론’의 대명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그러할지라도 불교 제 학파 중 가장 방대한 자료를 전하고 있는 설일체유부에 대해서조차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한 이상한 점은 한역으로 전해진 다섯 부파의 광율(廣律)이 모두 카슈미르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고승전’에 의하면 ‘사분율’을 번역(410년)한 불타야사(Buddhayasa), ‘오분율’을 번역(423년)한 불타집(Buddhajīva)은 카슈미르 출신이며, ‘마하승지율’을 번역한 불타발다라(Buddhabhadra)는 카필라 출신이지만 카슈미르로 유학 왔다가 역시 이곳으로 유학 온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의 간곡한 요청으로 총령을 넘었다. 유부 율인 ‘십송율’을 번역한 불야다라와 비마라차가 카슈미르인 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같은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거나 중국과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협(脇) 존자는 카슈미르는 현성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하였지만, 온갖 성전의 집성지이기도 하였던가? 구마라집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불타야사는 비바사(毘婆沙)에도 능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대비바사(大毘婆沙)’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당시 카슈미르에서는 이처럼 아비달마비바사 뿐만 아니라 비나야비바사 역시 널리 학습되고 있었을 것인데, 이는 필경 이곳에서 성전의 결집이 단행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카슈미르의 새로운 도성(新城) 스리나가르에서 2년간 ‘구사론’과 ‘순정리론’을 강습한 것도(차회 참조), 오공이 파리하스포라의 몽제사에서 4년간 근본율의를 강습하였다고 한 것도 이 같은 학적 전통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 조용하고도 고요한 파리하스포라의 승가람에서 이국(중국)의 젊은 법계 스님이 매일 바라제목차를 암송하고 근본율의를 학습하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우리나라 절에서도 대 율장은 그만두더라도 바라제목차의 독송을 매일의 일과로 삼으면 어떤가? 계(戒)는 불법승 삼보와 함께 4증정(證淨, 구역은 不壞淨) 중의 하나였다. 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삼보가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강력한 이념성의 불교를 지향하기에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법계(오공) 스님은 그 후 간다라로 돌아와 2년을 보낸 뒤 중천축의 성지와 8대 영탑을 순례하고 나란다에서 3년간 체재하였다. 그 후 웃디야나(오장나)를 순례하고서 마침내 귀국길에 올라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790년 장안에 도착하였다. 40년에 걸친 여정이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31호 / 2016년 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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