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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울산 영취-문수산 망해사 -문수사-영축사지

황룡 타고 ‘삼국유사 속 7개 산사’ 품은 산을 유람하다

▲ 문수사가 자리한 문수산은 이웃에 있는 산 영축산과 더불어 청량산이라 불렸다. 산은 낮지만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7개 산사를 품은 산이다. 태화강과 동해까지 안고 있어 정취를 더하고 있다.

 
신라 헌강왕(신라 49대. 875년 즉위) 재위 당시 신라는 번영의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얹어진 태평가가 밤낮으로 흐르는 경주 땅을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이렇게 적었다. ‘경주서 인근 바다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맞닿아 있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 소리도 도로서 끊이지 않았다.’

신라 헌강왕이 용 위해 지은 망해사
어부 무사귀환 기원 아낙 마음 대변
영취산과 문수산 가는 이정표 역할

청량산 자락 영취산에는 1400년 전
초암 짓고 살던 낭지스님 기록 전해
자장 창건한 문수사는 문수산서 기인

신라 흥망성쇠 목도한 영축산 속
옛 명찰 영축사지는 발굴조사 중

화창한 어느 날, 울산으로 나들이 나온 헌강왕은 울주의 세죽 해변을 걸으며 청량함을 만끽하고는 다시 궁으로 돌아가려 잠시 낮은 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 때 시커먼 먹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덮더니 이내 안개마저 자욱했다. 시계거리가 워낙 짧아 헌강왕과 그 일행은 길마저 잃고 말았다. 갑작스런 이상기후 현상에 동행한 신하가 고했다.

“동해용의 조화입니다. 용을 위한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을 위한 절을 지어라!”

▲ 영축사지 전경. 울산박물관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사 했다. 현재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연구 중인데 영축사지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사진 출처:‘울산 영축사-출토유물 자료집’)

이 한마디에 하늘은 원래의 맑고 푸른 제 모습을 드러냈다. 훗날, 사람들은 ‘구름과 안개가 걷힌 포구’라 해서 개운포(開雲浦)라 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한 절이 세워진다는 말에 환희심에 젖은 용왕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헌강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는 춤을 추었다. 일곱 아들 중 한 명을 왕에게 보내 왕의 섭정도 돕게 했으니 그가 바로 ‘서역 상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처용’이다. 개운포구 한 가운데 처용암이 있다.

헌강왕이 용을 위해 지으라 했던 절 망해사(望海寺)는 영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1천 여 년 동안 바다만 바라보며 용의 안락을 기원해 주던 절이요, 바다 나간 어부들 무사히 돌아와 달라는 어촌 아낙의 마음을 올곧이 대변해 온 산사다. 대웅전 옆 종각 뒤편 고즈넉한 곳에 두 개의 탑이 서 있다. ‘울주 망해사지 승탑’. 통일신라 말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두 탑은 망해사 창건 시기를 방증하고 있다. 또한 영취산과 문수산으로 가는 이정표 역할도 하고 있다.

▲ 망해사지 승탑. 보물 제173호다. 높이는 약 4m. 우아함과 단아함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한 산을 일러 영축산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서 유래된 것이다.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 ‘축(鷲)’을 옥편서는 ‘독소리 취’라 한다. 불교권 사람들은 대부분 ‘축’으로 읽고, 일반인들 대부분은 ‘취’라고 발음한다. 불교와 관련된 영축산이 영취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축과, 취 무엇이 먼저일까? 세조 6년인 1463년에 발행된 ‘법화경언해본’을 연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원래 표기는 ‘축’이었고 일반인들이 주로 ‘취’로 읽기에, 접하기 쉬운 한자사전의 표기로 ‘취’로 표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 지도 상의 현재 울산 청량면 율리의 영축산은 ‘영취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문수산과 영축산을 함께 일러 청량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거 한 이야기다. ‘화엄경’에 입각 해 문수성지를 청량산이라고 한다. 따라서 청량산이 문수산으로 불리는 것 또한 예사다. 산 아래 마을의 소재지가 ‘청량면’이니 청량산 명명설은 설득력 있다. 현재의 이곳 청량산 자락은 영취산과 문수산으로 나뉘어 불린다.

1400년 전 이 산에 초암 하나 짓고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는 기이한 스님이 있었다. ‘삼국유사’ 속 ‘낭지’다. 스님도 이 산에 주석하며 구름 타고 중국 청량산(현 오대산)에 날아 가 그곳 대중과 함께 강의(‘법화경’이었을 것이다)를 듣곤 했다. 자주 보이는 낭지이니 그곳 대중은 낭지가 이웃에 사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낭지가 일렀다.

▲ 태화루 앞 태화강 전경. 태화사와 연관된 용이 살았던 용연이 있었다면 저 태화루 부근일 것으로 일부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 절에 상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승려는 원래 살던 곳의 이름난 꽃과 진기한 식물을 가져와 도량에 보시하라!”

낭지 스스로도 나뭇가지 하나를 전했다. 오대산 대중 한 스님이 낭지의 나뭇가지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怛提伽)라 하는데 여기서는 혁(赫)이라 한다. 오직 인도 서축과 해동의 영축 두 곳에만 있다. 두 산은 모두 법운지 보살이 사는 곳이니 낭지는 성자임에 틀림없다.”

영축산이란 이름이 나온 배경이다. 낭지가 있던 초암을 후세 사람들은 ‘혁목암’이라 했다. 그 암자 이 산 어딘가에 있었을 터! 허나 1400여년이 지난 지금 그 흔적마저 찾을 길이 없다.

영취산 오르는 산길을 지나 문수산으로 향하려는 데 된비알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깔딱고개다. 작은 벤치에 배낭 내려놓고 앉아 다리 뻗고 물 한 잔 하니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방금 지나 온 영취산에 묻는다. “낭지는 전설 속 인물이었습니까?” 그를 만난 사람이 있단다.

신라 귀족 가문의 한 노비가 무명초를 깎았는데 출가한 때는 7세. 까마귀 한 마리가 와서 그 사미에게 일렀다. “영축산 낭지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거라!” 길 떠난 사미 저 아랫동네 나무 아래서 쉬는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보현대사다. 너에게 계품을 주려고 왔다.” 계를 전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계를 받은 자리의 나무를 일러 ‘보현나무’라 했다.

그 사미 이 산 어디쯤으로 오르다 한 스님을 만났다. “낭지 스님이 어디 사는지 아시는지요?” “낭지는 왜 만나려 하는가?” 사미는 까마귀가 전한 말을 그대로 고했다. “내가 낭지다! 좀 전에 까마귀가 와서 말하기를 ‘성스러운 사미가 찾아 올 터이니 마중 나가라’했다.”

그 사미가 바로 의상대사 10대제자 중 한 사람인 지통(智通)이다. 원효대사도 반고사(磻高寺)에 머물 때 낭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낭지가 원효에게 ‘초장관문(草場觀門)’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어보라 권한 바 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반고사는 지금의 문수산 일대 어디 쯤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문수산도 청량산 일원이었음을 시사하듯 종각에는 ‘청량산 문수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발고도 600m의 문수산은 높지 않으나 울산 땅과 바다를 품고 있기에 고고함이 느껴진다.  자장율사도 이 산을 찾아 문수사를 창건(646년)했다. 영축산과 별개의 문수산으로 이름한 것도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문수산 북쪽 벽 아래로 흐르는 저 강이 울산 시내를 관통하는 태화강이다. 저 물길 동해 쪽으로 좀 더 흐르면 태화사 용연(龍淵)에 닿는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부처님 사리와 가사를 받고 하산할 즈음 태화지 용이 나타나 귀국 후 할 일을 일러주었다.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다. 신라로 돌아가 9층탑을 세우면 아홉 개의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다.” 아울러 “정사를 지어 내 복을 빌어 주면 그 은덕은 꼭 갚겠다”고 했다.

신라로 돌아 온 자장은 9층 목탑과 통도사 금강계단을 조성해 각각 사리를 봉안했고, 오대산서 만난 용의 청을 들어주려 태화사를 짓고 사리를 안치했다. 오대산 황룡이 전한 대로 태화사 인근 물가에 호법룡이 살았다면 지금의 태화루 앞 태화강 어디쯤 아닐까?

이 산에 깃들었던 또 하나의 명찰 영축사가 있었다. 삼국을 통일 한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부산 동래서 목욕 한 후 경주로 돌아가려 울산 들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매를 놓아 꿩을 잡으려 했는데 꿩은 멀리 달아났다. 묘연한 방울소리를 따라 가니 꿩이 닿은 곳에 이르렀다. 꿩은 우물 안에 있었는데 물은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로 새끼 두 마리를 품고 있었다. 매 또한 측은하게 여겼는지 어미 꿩과 새끼 꿩을 공격하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왕이 명했다. “절을 세워라!” 영축산 아래 있었으니 영축사라 했을 터. 다행스럽게도 영축사지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절터가 발견돼 발굴연구중인데 그 터는 이 산 바로 아래 영축마을에 있다.

이 산을 간절하게 찾으려 한 신라의 왕이 있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다. 신라의 국운이 다해가던 즈음 경순왕은 문수대성의 계시를 통해 신라의 미래를 결정하려 했다. 태화사를 참배한 후 길을 나서는데 동자승이 나타났다.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영축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나왔습니다.” 길조라 여긴 왕은 기쁜 마음으로 동승의 뒤를 따랐지만 태화강을 건너자 동자승은 자취를 감췄다. 왕의 긴 탄식이 이어졌다.

“하늘이 이미 나를 저버렸구나!”

문수의 힘을 빌어서라도 기울어 진 신라의 국운을 일으켜보려 했던 경순왕의 고뇌가 읽혀진다. 실의에 빠진 왕은 경주로 환궁한 후 신라를 고려 태조에 넘겼다. 경주 땅에 태평가가 밤낮으로 울린 진 60년 만인 935년, 신라 992년 역사의 막은 내려졌다.

영축마을 영축사지는 울산박물관이 주도적으로 발굴연구하고 있다. 2012년부터 지난 해 4차 발굴까지 마친 울산박물관은 이미 1차 발굴조사(2012년)에서 금당지, 탑지 등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일금당식’ 가람배치임을 확인했다. 특히 ‘영축(靈鷲)’명 기와가 출토돼 영축사지임이 확실해지고 있다.

산은 비록 작고 낮지만 유서 깊은 명산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절만도 7곳을 품은 산이다. 그리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목도한 산이다. 신라를 알고 싶은 나그네가 꼭 한 번 올라야 할 산이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울산 영취산 망해사. 대웅전과 승탑 2기 뒤로 등산로가 나 있다. 약 100여m 거리에 영축사지가 있는 영축마을과 문수산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이른다. 문수산 방향으로 30여 분 오르면 다시 영취산과 문수산으로 나눠지는 길에 닿는다. 문수산 쪽으로 길을 잡고 잠시 걸으면 깔딱고개다. 문수사서 영축마을로 가는 등산로는 반드시 확인하고 하산해야 한다. 등산로는 종각 바로 아래의 계단을 따라 나 있다. 자칫하면 이 길을 지나쳐 해우소와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율리사지와 망해사까지는 17.5Km)하게 된다. 문수사서 등산로를 따라 하산하면 문수산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서 영축사지까지는 약 5Km. 무라카데 칼국수 식당을 왼편에 끼고 산으로 들어가 200여미터 걸어 올라가면 영축마을과 영취산, 문수산으로 갈라졌던 분기점에 닿는다. 망해사 원점회귀 코스에 소용되는 시간은 3시간 30분.  


이것만은 꼭!

 
금동여래입상: 영축사지 발굴조사는 울산박물관이 맡고 있다. 1·2차 조사가 완료된 지금까지 총 548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와전류가 485점(88.5%)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석제류 18점(3.2%), 금속류 17점(3.1%), 토기류 15점(2.7%) 순이다. 이외에도 자기류 10점, 토제품류 3점이 있다. 유물연구가 끝나지 않은 관계로 현재 울산박물관에는 금당지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 1점만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통일신라 울산 불교문화의 중심, 울산 영축사-출토유물 자료집’)

 

 

 

 
청송사지 삼층석탑: 남암산 아래에 자리한 청송사 절터에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율리사지서 2.5Km 거리에 있다.

 

 

 

[1332호 / 2016년 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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