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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얼음새꽃’ 소식

기자명 김용규

추운 겨울 꽃피우는 노란꽃의 숙명서 생명을 보다

추위 속에서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이 있다. 집필 중인 책을 위해 올해는 그 꽃의 개화를 꼭 사진으로 담아두자 작정한 터였다. 우수를 몇 날 앞두고 ○○산에 그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김 선생의 안내를 따라 겨울 숲을 함께 걸었다.

한국에선 ‘복수초’로 알려져 있어
이른 개화는 숙명 극복하는 방안
저장한 온기로 곤충 이끌어 수정

쇠박새와 붉은머리오목눈이 새떼들이 호르르 호르르 키 작은 나무들 위를 휘저으며 날고 있었다. 바람이 쉬는 덕분에 나무도 새도 우리도 소담한 눈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눈 속에서 먹이를 찾는 일조차 그저 아름다운 그림인 이 순간을 가만히 누리며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김 선생이 나를 세웠다. ‘얼음새꽃’이 마치 일가를 이룬 것처럼 피어있는 자리였다. 내가 고대하던 그 꽃, 참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직 다 녹지 않은 지난 번 내린 눈 위로 오늘 새로운 눈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얼음새꽃 샛노랗게 피어난 자리에는 눈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눈이 녹아 있었다.

얼음새꽃은 그렇게 피는 꽃이다. 아직 겨울이 떠나지 않은 시간 누구도 감히 꽃을 피우려들지 않는 때에 눈 속에서, 얼음 새에서 피어나는 아주 특별한 꽃이다. 그 이름이 일반적으로는 복수초(福壽草)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얼음새꽃이라는 이름보다 복수초라는 이름이 보편성을 갖게 된 이유는 일본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이 꽃을 ‘フクジュソウ(후쿠쥬소)’라 부르는데, 일본을 통해 식물분류학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과정에서 일본의 그 말뜻을 우리가 한자말로 옮기면서 복수초(福壽草)로 굳어지게 된 듯하다. 어떤가? 얼음 사이를 뚫고 피어나는 그 모습을 담은 얼음새꽃이라는 이름이 더 자연스럽고 예쁘지 않은가?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 볼 것은 얼음새꽃은 왜 이 시기에 꽃을 피울까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꽃들은 따뜻할 때 피어난다. 그런데 얼음새꽃은 왜 눈 속에서, 얼음 새에서 피어날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얼음새꽃의 숙명과 관계가 있다. 얼음새꽃은 들판이 아닌 숲에서 피어난다. 들판에는 키 큰 나무들이 드물지만 숲에는 흔한 것이 큰 키 나무들이다. 얼음새꽃은 그 우거진 숲에서 한 자도 되지 않는 작은 키로 태어나는 생명이다. 만물은 생(生)과 극(剋)의 양면이 서로를 떠받치며 구성되고 흐르는 법이다. 얼음새꽃은 큰 키 나무들이 만든 낙엽 덕분에 양분과 수분은 넉넉하게 누릴 수 있지만, 그 부유함의 연기(緣起)로 빛의 결핍을 숙명으로 안아야 했다. 키 큰 나무들이 잎을 내기 시작하면 키 작은 얼음새꽃은 빛을 차단당해 삶을 이어갈 광합성에 곤란을 겪는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얼음새꽃에게 드리운 숙명적인 고(苦)는 바로 ‘모자라는 빛’인 셈이다. 얼음새꽃이 그것을 극복한 방법이 바로 눈 속에서, 얼음 새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키 큰 다른 식물들이 잎을 내기 전에, 그늘이 생기기 전에 제 꽃을 피워 일찌감치 결실을 맺으려는 노력이 얼음새꽃의 이른 개화다.

꽃만 피우면 무엇 할까? 그 꽃을 수정해줄 매개자를 불러야지. 그런데 아직 이토록 추운 시절에 무슨 곤충이 있을까? 아니다. 숲에는 겨울을 알의 상태로 건너는 곤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당벌레 같은 일부 곤충들은 겨울을 맨 몸 성충의 상태로 건너낸다. 얼음새꽃은 그런 곤충들을 부르는 방법을 일궈냈다. 그의 노란색 꽃은 낮 동안 쏟아지는 겨울 햇살을 모아 열로 저장해낸다. 저녁에는 그 꽃잎을 오므리는데 그 꽃 안의 온도가 바깥의 온도보다 대략 3~5℃가 높다. 늦겨울의 마지막 추위를 견뎌야 하는 성충 상태의 곤충들은 얼음새꽃이 만든 온기를 찾아 자연스레 모여든다. 얼음새꽃은 그 과정을 통해 수정을 이룬다. 키 작은 제 숙명의 고(苦)를 넘는 과정에서 겨울 곤충들의 고(苦)를 바라본 얼음새꽃, 내게는 마땅히 무릎을 꿇고 만나야 할 꽃이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32호 / 2016년 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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