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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수사리보살의 지혜

기자명 이미령

편견 걷어내면 ‘구제불능 중생’도 없겠죠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안녕하세요. 어젯밤, 늦도록 책읽기 모임이 있었지요. 자정이 다 되어 버스정류장에 내렸는데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도로 가 화단에 쌓인 눈을 보자니 슬그머니 걱정도 됐습니다.

규칙으로 사람들 강제하는 것
타인에 대한 믿음 부족 때문
기득권자가 자기중심 속에
사람 우겨넣으니 혼란 커져

‘이제 머지않아 싹이 틀 텐데 이렇게 눈이 쌓였으니 이걸 어째…. 다시 꽁꽁 얼게 생겼네….’

그러나 이내 걱정을 거뒀답니다. 지난겨울에 읽었던 북유럽신화가 생각났기 때문이에요. 북유럽신화에서는 봄의 여신 이든이 깊은 구덩이에 빠져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 춥지 말라고 하얀 늑대가죽을 내려서 덮어준다는 거예요. 여신이 구덩이에서 보내는 세월이 바로 길고 긴 겨울이요, 그때 얼어 죽지 말라고 덮어주는 하얀 늑대가죽이 바로 새하얀 눈이라는 말이지요. 놀랍지 않으세요? 눈에 덮이면 얼어 죽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뒤집고 있잖아요. 눈은 봄을 기다리는 대지를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걸 북유럽신화에서 배웠답니다.
보내주신 답장, 정말 가슴 따뜻하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수많은 신도들로 아수라장이 돼버렸던 공양간 이야기가 놀라웠습니다.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일을 마쳐야 하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어요? 그럴수록 지켜보는 사람들은 혀를 차게 마련이지요. 그런 일이 최근에 벌어졌다면 분명 “헬조선이니 어쩔 수 없지…. 몽주니어 또 1승”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과 비웃음이 쏟아졌을 테지요. 그러면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며 더 강력한 체벌이나 규제를 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예 공양간을 24시간 개방하고, 아무 때나 편한 시간에 공양하도록 해서 무난히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스님의 조치는 경탄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을 자꾸 규칙으로 강제하려는 건 사람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혼란도 일겠지만 자로 잰 듯, 칼로 벤 듯한 직각의 질서는 아닐지라도 구불구불 들쭉날쭉하지만 더 재미있고 여유로운 나름의 규율을 저절로 생각해내서 함께 지켜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주최 측이, 혹은 기득권자가 자기중심의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우겨넣으려니 오히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게 아닐까요? 이런 줄도 모르고 자기 틀에 착착 끼워 맞춰지지 않는 사람들을 ‘무지한 대중’이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범부’라며 딱하다는 듯 혀를 차는 일부 권력자와 지식인들을 보면 오히려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스님의 편지를 읽다보니 ‘구잡비유경’ 속 이야기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오래 전에 칼럼으로도 썼고, 그리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들려줘서 이제는 그만해야겠지만 그래도 스님께 드리는 답장에서 또 하고 싶네요.

인도 어느 나라 외진 마을에 인심이 아주 고약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지요. 마을 전체가 흉악하기 그지없어서 그 어떤 어질고 눈 밝은 이들도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들어가서 그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려고 하면 “빤한 소리 집어치워라”는 대답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지요. 지혜제일 사리자를 비롯해서, 신통제일 목련존자, 가섭존자 등등 훌륭한 스님들도 그 마을로 들어가셨다가 비아냥만 얻고 돌아서 나오셨지요. 큰스님들이 전법교화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난존자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지요.

“세존이시여, 저 마을 사람들의 죄업이 어찌 저리도 깊고도 무거울까요.”

그런데 이때 대승에서 지혜가 으뜸가는 문수사리보살이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마을로 들어가서 법문을 쏟아내지 않고 가만히 길 한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을 지켜봤습니다. 사나운 성정의 마을 사람들은 문수사리보살을 경계했지요. 그런데 문수사리보살은 잠자코 종일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아주 크게 감탄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는 사나운 시선과 잔인한 말을 뱉기는 했지만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아주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문수사리보살은 그 사람들 각자에게 그들이 보여준 진지한 모습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아, 당신은 가게 주인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건만 어쩌면 그리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가게 청소를 하고 있나요?”
“당신처럼 연로하신 아버님을 그리도 정성스레 부축하며 걸어가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생전 칭찬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이, 수행자와 성직자들로부터 ‘구제할 길 없는 중생’이라는 지탄만 들어온 그 마을 사람들은 놀랐지요. 처음에는 문수사리보살이 자기들을 놀리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 다른 기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천천히 문수사리보살에게 몰려들었지요.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좋은 말씀을 들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문수사리보살은 답했습니다.

“저 마을 밖에 제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시면 더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종교인들이 들어와서 설득해도 소용없었건만, 이제 그 사람들은 자기발로 부처님을 찾아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토록 사악하고 죄업장이 두터운 중생들이 말이지요. 손에 손에 향과 꽃을 들고 부처님을 향해 오고 있는 사람들. 마을 밖 언덕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부처님이 아난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난아, 저 사람들을 보아라. 저들에게 그 깊고 무거운 죄가 대체 어디 있느냐?”

스님, 분명 누군가는 제게 “어휴, 이 선생. 이제 그 이야기는 제발 그만 좀 하시오!”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님, 저는 이 이야기가 그리도 좋습니다. 그리고 ‘죄가 어디 있느냐!’라던 부처님의 마지막 한 마디가 불교의 전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수사리보살 앞에는 ‘대지(大智)’라는 말이 붙습니다. 그분의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어찌 제가 알겠습니까? 짐작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편견 없이 남을 대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그걸 진심으로 찬탄하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지혜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오래 전 약천사에 모여들었던 대중들은 분별없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구제불능의 중생이 아니라 제각각 고운 향과 빛깔을 띤 생명들이었을 겁니다. 그걸 찾아내서 곱게 반짝이게 해주셨으니, 스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2016년 2월을 보내며, 이미령 두 손 모으고…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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