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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은거의 이상

기자명 명법 스님

출사·은일의 대립, 현실 속 깨달음 추구했던 선종에 의해 해소

▲ 중국 오대 남당 위현(衛賢)의 고사도(高士圖).

천안문 광장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짐도. 상고시대부터 관계와 치수를 위해 대규모 인력을 동원했던 중국에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동시에 지천으로 넘쳐나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다른 고대문명이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나 초월적 신을 위한 전당을 만드는데 전력을 쏟았을 때, 중국인들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문제에 천착했다. 유가의 “경세치용”은 물론이고 “무위자연”을 꿈꾸는 노장사상마저도 중국문화의 현세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 벗어나 고고함 지키는
은사는 중국의 독특한 현상

선진시대의 자발적 은일이
정치혼란기 생존방법 전락

당의 안정과 송의 과거제로
생존위한 은거 점차 사라져

은일 문화 폭넓은 확산으로
자연이 미적 대상으로 전환

중국문화의 출세주의는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지만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권력자가 발탁하지 않으면 허사였다. 또한 황제의 눈에 들어 공을 세우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영웅이 되지만 어쩌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는 날에는 제 목숨은커녕 일가친척의 목숨마저 부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몸을 숨겨 자신을 보존하는 일은 난세에는 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이처럼 “은일(隱逸)”은 중국문화의 출세주의를 배경으로 출현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다.

세상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을 은사(隱士)라고 부른다. 일민(逸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逸)”에 포함된 세상을 버린다는 의미와 함께 세속을 초월하여 고상하다는 의미처럼 이들은 사회에서 이탈한 예외자이며 기성 질서를 무시한 인물이지만, 중국인들은 이들을 불온시하거나 금지하는 대신 그들에 대한 남다른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

장주(莊周)처럼 벼슬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사(處士)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처”에는 결혼하지 않은 결혼적령기 여성을 처녀라고 하듯이 벼슬을 할 만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가만히 천명을 알고 즐거워하며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깨끗하고 차분하게 지내며 갖가지 변화에도 쉽게 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집에 칩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거사(居士)” 또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사찰에서 남성 신도를 “처사” 또는 “거사”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데, 최근에는 일괄적으로 모든 남성 신도를 부르는 호칭이 되어버렸다.

백이숙제처럼 은사들은 도에 뜻을 두고 생명의 온전함을 간직한 지식인이며 지사(志士)이기 때문에 그 인격과 정신의 고매함을 높이 사서 “고사(高士)”라고도 부른다. 불교가 전해진 뒤에는 “고사”는 덕 높은 승려들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들이 가졌던 고매한 정신을 찬탄하였고 그들을 본받아 자발적으로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따라서 은사는 상고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출현하는데, 다른 문화에서 찾을 수 없는 중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논어’에서도 그들이 지조를 지키고 변치 않는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장자’에서도 무위의 정신이 높이 평가되었다. ‘맹자’에서는 “백세 뒤에 듣는 자마다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여 중국인들에게 은사들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은사들 중 일부는 역사서에 이름을 남겼는데, 최초의 은사인 요임금 때 피의(被衣)로부터 노자와 장자, 은나라 백이숙제, 그리고 유비를 도왔던 제갈량 등등 수많은 은사들이 존재했다. 은사가 되는 것은 세상을 초월하여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는 일이었으며,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군주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을 재상으로 모셨듯이 황제들은 지혜를 구하거나 그들의 재주를 탐하여 은사들을 정치세계로 초대했다. 그것은 황제의 덕을 과시하는 일이었으며 은사가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태평성대의 징표였기 때문에 은사를 초청하는 일(招隱)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은사에 대한 평가와 대접이 이처럼 높아지자 벼슬을 하기 위해 거짓으로 은사가 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당나라 때 이르면 깊은 산에 몸을 숨기는 것이 벼슬길에 오르는 지름길이라 하여 “종남첩경(終南捷徑)”이란 말이 유행하기까지 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그 혼란은 이 시대 지식인들로 하여금 존재의 무상함과 인생의 허무를 더 예민하게 느끼도록 했으며, 유가가 건립하고자 했던 명교질서를 회의하게 했다. 불안하고 모순에 가득 찬 현실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그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도 강렬하게 일어났다. 막 도입된 불교의 영향 아래서 현상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적 본체를 탐구했던 현학(玄學)이나 고상한 정신세계를 담론의 주제로 삼았던 청담이 나타났다. 장자와 노자, 그리고 불교는 이 시대 담론의 요강을 이루었다.

▲ 조선 초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은일이 보편화 됨에 따라 자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변했다. 자연산수가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아닌, 미적대상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관계의 불확실성과 생존의 불안감 때문에 난세에 일신을 보존하는 방책으로서 은일이 시대적 대안이 되었다. 거기에는 난세에 일신을 보존하려는 생존 본능이 숨어 있었다. 그 결과 선진시대에 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던 은일이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에 은일은 죽림칠현의 경우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점차 몸은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면서도 정신은 은일할 수 있다는 “조은(朝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육조시대 귀족들은 일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은거를 소은(小隱)이라고 비판하면서 세상 속에서 몸을 숨기는 것을 “대은(大隱)”이라고 부르면서 출사와 은일은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대은은 상당한 재력과 높은 관직을 가진 귀족들만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권력층은 권력 세습을 위해 관직에 나아가는 한편, 당시에 유행되었던 ‘은일’에 동참해야 했다. 이 두 가지 모순된 요구를 조화시켜준 것이 바로 ‘대은’이었다. 다시 말해 대은이나 조은은 출사와 은일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가치를 통합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신적 가치와 독립을 얻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절충적 해결방식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대은’ 개념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출사와 은거의 대립적인 상황은 점차 해소되었다. 당나라 왕조의 융성은 은일의 구실, 즉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몸을 숨긴다’는 구실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선을 위한 은거는 오히려 지탄을 받았다. 더구나 당나라 왕조가 적극적으로 은사를 등용하는 정책을 펼침에 따라 은거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벼슬에 나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송대에 들어오면 과거제가 정비되어 인재 발굴제도가 정착함에 따라 모든 사대부들은 국가제도 속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제도권 밖의 은거는 점차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은일은 실의에 찬 사대부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안이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은거는 출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 생활의 한 부분으로 포섭되었다.

이때 출현한 개념이 “중은(中隱)”이다. 중은은 대은과 달리 출사와 은일을 양립시키거나 절충시키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불이사상은 출사와 은일의 대립을 해소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특히 ‘유마경’은 출세간과 세간의 통일과 그 사상의 실천자로서 유마힐이라는 거사의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출사와 은일을 고민했던 중국 사대부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또한 상(相)과 성(性)의 상즉성, 다시 말해 현상과 본질의 통일을 주장한 화엄사상과 ‘수처작주(隨處作主)’ 또는 ‘평상심이 바로 도’를 주장하면서 실천적으로 현실 속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했던 선종은 중은의 사상적 토대와 실천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은일의 양상에 나타난 변화는 자연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켰다. 은일이 유행했던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자연산수는 더 이상 원시종교의 천(天)사상에 따른 종교적 숭배의 대상도 아니며 사회적 관계를 이탈하는 반사회적 공간도 아닌, 오직 순수하게 사물에 감응하고 즐기는 미적인 대상으로 변화했다. 이 변화는 예술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사회로부터의 은둔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것으로 대체됨에 따라 자연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원림(園林)의 조성이 성행했다. 또한 자연에 대한 미적인 향수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산수시와 산수화가 나타났다.

이제 자연은, 원림으로 대체된 자연은, 내가 그 속으로 돌아가야 할 공간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간이 된다. 자연은 여전히 사회와 대립되지만 사회에서 자아가 느낀 긴장을 해소하는 자아의 내면적 공간으로 변화했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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