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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숲이 황홀한 이유

기자명 김용규

눈 속에 핀 부채꽃은 여름날 피는 나리를 부러워 않는다

요즘 나는 자주 길을 나서고 있다. 겨울과 봄 사이, 간간이 눈 내리고 찬바람 가시지 않은 이즈음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꽃들을 만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최근 두어 차례 쏟아진 눈은 그래서 내게 무척 반가웠다. 눈 속에서 제 꽃 피우고 한기 속에서 그 꽃 지켜내는 생명들을 담기에 더 없이 좋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찬바람 견디며 피어난 꽃들은
고를 넘어선 용맹정진의 결과
저마다 오직 지금을 살아갈뿐

몇 번의 출타 끝에 어제 드디어 적갈색 얼룩의 포를 두르고 피어나는 눈 속의 ‘앉은부채’를 카메라에 담았다. 안성 어귀에서는 눈 속에서 샛노란 빛 반짝이며 피워낸 ‘얼음새꽃’을 또다시 만났고, 접혔던 제 꽃잎 도르르 길게 펼치며 피어나는 노란 빛깔 ‘풍년화’ 자태에 홀려 한참을 머물기도 했다. 막 터지거나 터질 듯 부푼 납매의 꽃봉오리 곁에서는 은은한 향기를 훔치듯 맡기도 했다. 남쪽 내소사 근처에서는 흰빛에 연보라를 섞어 피는 ‘큰개불알풀’도 만났다.

왜 하필 지금이냐? 사람들 열광하는 4월 하순과 5월의 봄도 좋지 않으냐? 비 흔하게 내려 목마를 일 없고 피우기만 하면 그 꽃 열매로 바꾸는 일 마다치 않을 곤충들도 넘치는 시절, 기온은 더 없이 따뜻할 여름의 날들도 있거늘 너희들은 왜 하필 이 추위 속에서 피는 것이냐? 하 많은 시간 중에 왜 굳이 아직 추운 지금이더냐? 어느 연구자의 분석에 따르면 약 50% 정도의 꽃들이 여름에 핀다. 나는 그 이유를 안전하기 때문이라 본다. 여름은 해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가장 길고 온도가 따뜻하며 습도도 풍부하고 매개곤충이 풍부한 계절이다. 가을에 대략 35%가 피는데, 그것 역시 안온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일반적 생각과 달리 봄날에 피는 꽃은 15%정도라 한다. 그 봄꽃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따뜻함이 시작되고 곤충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4월 이후에야 핀다. 그러니 지금 피어나는 저 꽃들은 무슨 사연을 품었을까?

나는 이 시절의 꽃을 사진에 담으며 늘 그들이 가진 사연이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들과 나눈 십여년의 질문과 대답을 이 짧은 글에 다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뭉뚱그려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닌 숙명적 고(苦)를 넘어서보려는 선택과 분투, 용맹정진의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지난 글에 썼듯 ‘얼음새꽃’은 보잘것없는 키 때문에 눈을 이기고 개화하는 꼴을 만들었다. ‘앉은부채’ 역시 같은 이유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잎부터 내고 꽃을 뒤늦게 피우지만 이 계절에는 ‘풍년화’처럼 꽃부터 피우는 존재들도 있다. ‘산수유’가 그렇고 ‘생강나무’가 그렇고 ‘히어리’나 목련 같은 존재들이 그렇다.

광합성을 담당할 잎을 만들지 않고 꽃만 먼저 피워내는 현상은 흔하지 않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큰개불알꽃’은 경작지 언저리에서 1월부터 6월까지 신속하게 피고 지는데, 아직 겨울 가시지 않은 지금 같은 때 꽃을 피우는 까닭은 인간의 간섭이 넘치는 경작지에서 빈틈을 파고들어 살아남으려는 분투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계절에 피는 꽃이 더 안온할 것이라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은 우거져가는 숲에서 제 꽃을 드러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을 견뎌내야 한다. 그 숙명적 고(苦)와 씨름해야 하는 운명들이다. 또 지금 피어나는 꽃들이 눈 속의 엄혹함을 이긴다 해서 더 위대한 것이라 오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다른 계절의 꽃들도 모두 제 그림자를 넘어서 빛과 만나는 존재들이다. 피어내는 모든 꽃 역시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의 하나인 일음일양(一陰一陽)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 계절 눈 속에 피는 저 키 작은 앉은 부채가 여름날의 붉은 나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시절 납매는 그 소박한 꽃 향이 가을날 국화의 짙은 향기와 같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모두는 저마다 오직 지금 여기를 살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모여 흐르기에 숲은 한 빛깔, 한 향기, 같은 크기의 지루함이 깃들 수 없다. 사계절 숲이 황홀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34호 / 2016년 3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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