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왜 사냐고 묻거든
11. 왜 사냐고 묻거든
  • 이미령
  • 승인 2016.03.14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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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삶 부끄러워 오늘 더 열심히 산다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안녕하세요.

제게는 매년 행복한 소식 두 가지가 들려온답니다. 단풍소식과 꽃소식이지요. 단풍소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꽃소식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옵니다. 자연의 화려한 빛깔이 쉬지 않고 오르내리는 가운데, 올봄도 예외 없이 꽃소식이 남녘에서 올라오고 있네요. 그런데 어쩐지 갈지자로 느리게 오는 것 같아서 “요 얄미운 것, 진작 좀 올라오지!”라며 짐짓 꿀밤을 먹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찬바람을 견디느라 꽃가지들은 또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나름 찬 겨울 이겨내느라 애썼을 테니 그저 고맙고 대견한 마음으로 새 봄 새 꽃에 감탄하려고 합니다.

강의·방송프로그램 맡아
대중에게 쏟아내는 말 속
자신의 인격 드러나는 듯

말·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
오늘 하루 열심히 사는 것 뿐


날씨 소식에 이어 슬그머니 곁들여지는 스님의 탄식에 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파옵니다. 글을 쓰는 삶에 대해 스님은 말씀하셨네요. 써놓은 글이 맘에 들지 않고 부끄러워서 절필을 선언하지만 또다시 쓰고야 말게 되는 삶!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바로 운명이라고 해야겠지요. 후회할게 빤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 아릿한 모순에 현기증을 느끼는 듯한 스님의 글을 읽자니 딱 떠오르는 책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거리의 인문학자로 널리 알려진 최준영 교수의 책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입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이 하도 짜릿하게 와 닿아서 꼭 한 번 읽으려 기억해두고 있는 책이지요.

거울을 보면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눈곱이 꼈다거나 이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다면 서둘러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화장을 고치지요.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런 거울 노릇을 하는 게 있을까요? 있다면 그건 자신이 조금 전에 쓴 바로 그 글일 것입니다. 열심히 사무치게 써내려간 직후, 잠시 시간을 둔 뒤에 다시 차분히 읽어갈 때 마치 거울에 때가 묻은 제 얼굴을 비쳐보듯이, 글이라는 거울에 고스란히 비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지요.  아, 그때의 부끄러움, 초라함, 어리석음이라니….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부끄러운 줄 알면 다시 써야하겠지요. 다시 쓰고서 읽어보고 부끄러워하며 자책하다가 또다시 써내려가는 인생. 굳이 글 쓰는 삶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중들을 상대로 불교 강의를 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제게는 ‘말’도 역시 그렇습니다. 마이크를 들고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데 어떤 때는 ‘내가 이렇게 겁 없이 말을 해도 괜찮은가’라는 생각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더구나 대중들의 반응을 좀 더 뜨겁게 일으키려는 생각에 농담과 과장 섞인 말까지도 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순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에 글쓰기는 없었을 테니,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쓸 일’은 없었겠지만, ‘말’에 관해서는 사정이 다를 테지요. 부처님은 평생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찌 부처님 마음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만큼 부처님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참으로 정성을 들이셨을 테지요.

초기경전을 읽다보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의미와 표현을 잘 갖추었고 완벽하게 가르침을 설하다”라는 표현을 참 많이도 만나게 됩니다. 그뿐인가요? 음성이 청아하고 좋아서 사람들은 계속 듣고 싶어 하며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그러한 것처럼, 올곧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도 이렇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얼마나 말을 잘 해야 이런 구절에 딱 들어맞을까 하고요. 아마 부처님 사전에 ‘어제 한 말이 부끄러워 오늘 다시 말한다’는 법은 없을 테지요. 그 정도로 공부가 완벽했고 몸으로의 실천 또한 궁극에 도달했고, 말을 듣는 상대를 정확히 관찰하고서 그들에게 간곡하고 쉽게 들려주려고 온갖 방편을 다 도모했을 부처님입니다.

언감생심 그 경지까지 가지 못한 저는 그저 마이크를 쥐고 말을 쏟아낸 뒤에는 조금이라도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게 고작입니다. 내가 한 말을 돌이켜보고 모자라거나 지나쳤던 점이 있다면 얼른 후회합니다. 나의 말에 덩달아 드러난 내 인격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번 강의에서는 다시 처음으로 강단에 오른 것처럼 하겠다며 각오를 다지곤 합니다.

말이 그렇듯이 글쓰기도 그러하겠지요.

아, 이렇습니다. 이토록 말하고 글 쓰며 사는 삶은 참 힘듭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인도의 성자 비노바 바베(1895~1982)가 떠오릅니다. 간디가 자신의 비폭력저항운동을 이끌 최고의 지도자로,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되면 맨 먼저 인도 국기를 게양할 인물로 비노바 바베를 지목했을 정도로 그는 참 훌륭한 인물입니다.

몇 해 전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특히 그가 1970년 즈음에 자신의 각오를 쓴 내용에서는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가만히 그저 가만히 멈췄었지요. 그 책에는 노년에 자신이 얻은 네 가지 자유를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자유는 외부활동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더 이상 외부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 자유는 책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더 이상 책을 쓰지 않겠다는 각오도 내비칩니다. 세 번째 자유는 공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더 이상 공부하겠다며 뭔가를 읽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 자유는 가르치는 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60년 세월을 사람들을 가르쳐왔는데 이제 그 일도 끝이 났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세 가지를 줄이지요. 음식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글을 줄였습니다. 그렇게 평생 인도인의 진정한 평화와 해방을 위해 온몸과 마음으로 대중과 함께 살았던 성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님, 쉬지 않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걸 글로 쓰고 사람들 앞에서 말로 풀어내야 하는 제게 비노바 바베의 노년의 삶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스스로가 그런 일들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할 수 있으려면 나는 지금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했어도 한 것이 없다고 알아차릴 수 있는 ‘금강경’의 지혜에 기대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을 향해 궁금한 것은 뭐든지 물어보라며 정진할 것을 당부하신 부처님, 그리고 세상을 위해 혁명가로 살다간 성자 비노바 바베. 이 두 존재가 이 지구에 살다갔다는 것이 제게는 크나큰 위안입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제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어제의 삶이 부끄러워 나는 오늘도 산다고 답하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려는지요. 평안하시길….

꽃소식 올라오는 길목에서 이미령 드립니다.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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