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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왕유의 망천별업(輞川別業)

기자명 명법 스님

은둔과 사회적 책임 함께했던 고졸한 사대부 원림 전형

▲ 문인화의 시조로 불리는 왕유는 자신이 직접 지은 원림 ‘망천별업’을 ‘망천도’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위 그림은 왕유 ‘망천도’의 모사본이다.

왕유(王維, 699~759)는 이백(李白, 701~762), 두보(杜補, 712~770)와 어깨를 견줄 만한 당시(唐詩)의 대가로,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시불(詩佛)”이라고 불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호, “마힐(摩詰)”은 ‘유마경’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불교, 특히 선종이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깊다.

불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
어려서 시불(詩佛)로 통해

쇠락한 명문귀족의 후예로
뛰어난 재능에도 주변배회

말년까지 관료생활 했지만
고향에 원림 짓고 구도행

귀족원림, 오락유희 공간
사대부원림, 사색 안식처

귀족의 화려한 원림 대신
세속 격리된 이상향 추구

왕유가 살았던 성당(盛唐)시기는 현종(玄宗, 712~756)의 통치 아래 당제국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진(西晉) 이래 확고하게 자리 잡은 ‘문벌’과 ‘가문’을 중시하던 풍조, 그것에 기초를 둔 귀족중심 정치체제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측천무후에 의해 시행된 과거제도는 관리의 선발기준을 경학에서 문학 위주로 바꾸면서 유학의 독보적인 지위를 허물어뜨리고 선발기준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을 위주로 선발하는 방식을 채택해 지배층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그러나 아직 사회를 주도할 기반을 얻지는 못했다. 더구나 문인통치와 전통적인 문벌에 기반을 둔 관료통치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정치적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은 당시 유행했던 불교적, 도가적 사유와 맞물려 은일(隱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풍조는  ‘반은반관(反隱反官)’의 ‘중은(中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은일을 유행시켰다.

안록산의 난을 제외하면 왕유의 삶은 표면적으로 볼 때 순조로웠다. 수려한 용모와 아름다운 음성, 쇠락했지만 명문귀족의 후예였던 왕유는 초년부터 장안의 황족, 명문세가와 교유하며 시와 음악적 재주로 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평생 관직을 유지했으며 말년에는 상서우승이라는 고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단순하지 않았다. 왕유가 생존했던 당대는 육조 이래 귀족중심의 사회가 계속되었고 귀족들이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부를 독점하던 시대였다. 비록 몰락했으나 귀족의 일원이었던 왕유는 화려한 궁정과 귀족들의 우아하고 풍요로운 삶에 매력을 느꼈으며 사회적 성공과 신분상승,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왕유의 의도와 달리, 권력과 정치의 중심인 궁정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정치중심에 다가가려고 하면 할수록 배척받고 소외당했으며 자신의 신분이나 재능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권력의 주변에서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송별’이라는 시에는 관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왕유의 당시 답답한 심정이 토로되어 있다.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술 한 잔 권하며(下馬飮君酒)/ 그대에게 묻노니 어디로 가시려나(問君何所之)?
그대 말하길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했기에(君言不得意)/ 벼슬을 내려놓고 남산 근처로 돌아간다 하네(歸臥南山陲).
그대 떠나면 다시 세상사에 관심두지 마시게(但去莫復問)/ 흰 구름 사라질 때 없으리니(白雲無盡時).

이와 같은 내면적 모순은 은거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난다. 왕유에게 유마힐은 출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도를 추구하는 중은의 길을 제시한 존재였다. 여린 성격의 왕유는 생애 후반 종남산 근처에 원림을 짓고 관료생활을 하는 틈틈이 자연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중국 원림은 원래 황제가 사냥하고 음주를 즐기는 유희의 장소였다. 황족과 귀족, 고관대작이 황가원림을 모방하여 귀족원림을 조영했으며, 당대 후반과 북송대에 이르러 사대부 계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당나라에 와서 원림의 조성이 성행한 데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토지제도인 장원은 장, 원, 서, 별업, 별서, 장원 등으로 불리는데, 그 기원은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왕공이나 귀족의 별장이었지만, 당대 이후 그에 딸린 전원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당송대 신흥지주층은 토지소유를 발판으로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됨으로써 집권적 관료기구를 구성했으며, 대토지 소유를 확산시켜 갔다. 그들은 불법과 편법으로 대규모 토지를 매입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소작농으로 전락되고 계층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원림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도시에서 가질 수 없는 대규모 원림이 조성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나라 때 귀족원림은 수도인 장안과 동경인 낙양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황실과의 교류와 경제적 특권 덕분에 귀족들은 황실원림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원림에 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이고 누·대와 같은 건물들을 수목이나 화훼류와 함께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진귀한 동물들을 방목했지만, 그것은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고 오락과 유희를 행하는 공간이었을 뿐이다.

이와 달리 신귀족 계층은 고향에 원림을 조성하고 실의에 빠지거나 삶이 황폐해졌을 때 돌아가 쉴 수 있는 안식처로 이용했는데, 그들에게 원림은 귀은의 공간이며 내면적 공간이었다. 사대부원림으로 백거이의 여산초당, 사마광의 독락당, 심괄의 몽계원, 소순흠의 창랑정 등이 있다. 사대부원림은 사대부의 취향과 정신세계가 반영되었는데, 사회로부터의 은둔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것으로 대체되면서 자연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원림(園林)의 조성이 성행했다. 이 시대에 비로소 자연에 대한 미적인 향수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제작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특히 중은사상의 영향으로 자연에 대한 취향이 노님(遊)에서 머뭄(居)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연을 유람하고, 원림에서 노닐고, 글을 짓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 모두가 인격수양과 상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녕을 생각하는 사회적 책임 또한 잊지 않았다.

왕유는 송지문의 별장을 개조하여 망천별장을 새롭게 조성하였고, 북송의 소순흠은 4만 동을 들여 오월국 광릉왕의 인척인 손승우의 황폐화된 별서를 매입하여 창랑정으로 개축했다. 이들의 원림은 규모에 있어 귀족원림의 성격을 갖지만 특히 왕유의 망천별업은 그 산수의 활용에서 사대부원림의 전형이 되었다.
왕유의 망천별업은 오늘날의 섬서성 남전현(藍田縣)에서 서남쪽으로 약 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나 당시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망천(輞川)은 그곳 주변의 물이 바퀴모양을 하고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자연적으로 생성된 울창한 수림과 첩첩이 둘러싸여 있는 산, 계곡, 못 등 원림에 필요한 주요요소들이 천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유는 이곳에서 천연 경관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십분 활용하여 건축물과 수목 등을 적절히 배치하여 짜임새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망천별업은 주거지를 겸하면서 천연 원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도입부, 생산이 이루어지는 두 번째 경관, 공간적 의취가 풍부한 세 번째 경관, 각종 수목을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건축물이 비교적 많이 조성되고 다양한 수림이 식재되었다. 망천별업은 화려한 평천장에 비해 고즈넉하고 평담한 공간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내면의 성찰을 위한 관조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자연 요소가 가지는 일상의 아름다움은 당시 찾아볼 수 없던 미적 감수성으로서, 후대 사대부원림의 원형이 되었다.

망천별업은 외부세계로부터 내방자를 전혀 맞이하지 않는, 외부로부터 독립된 완결된 하나의 세계, 유토피아 내지 도원경이다. 왕유가 망천별업을 짓고 자연으로 들어간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깃든 모험과 의욕으로 자연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름다운 자연을 완상하고 즐기려는 유미주의적 취미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자연으로 들어간 동기는 오직 호도(好道)에 있었다.

“도는 인간과 자연을 꿰뚫는 통일적 법칙이고 따라서 자연 중에서 구할 수 있다. 즉 왕유에 있어서 자연은 단순한 유락 장소가 아니라 진리 탐구의 장이므로 사람을 치료하고 구제하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왕유의 ‘망천별업’은 외부세계의 내방자를 맞이하지 않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였다. 이 세계는 세속과 격리된 이상세계이며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구도의 장이었다. 자연은, 또는 원림으로 대체된 자연은, 내가 그 속으로 돌아가야 할 공간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간이 된다. 자연은 여전히 사회와 대립되지만 사회에서 자아가 느낀 긴장을 해소하는 자아의 내면적 공간으로 변화했다. 왕유는 친구 배적(裴迪)과 함께 별업에 머물면서 화창(和唱)한 시를 모은 시문집 ‘망천집(輞川集)’과 그곳을 묘사한 ‘망천도(輞川圖)’를 이곳에서 창작했다.

육조시대까지 ‘산(山)’과 ‘수(水)’는 ‘역경에 의한 해석’이나 유가의 ‘비덕론’, 또는 ‘노자도덕경에 의한 해석’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북송시대 곽희에 이르면 범관과 거연의 산수화에서 중앙에 주산을 거대하게 묘사하고 행인을 배치하는 ‘대(大)’와 ‘행(行)’의 미적 감수성이 ‘거유(居游)’의 경지로 변화한다. 그동안 그 구체적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왕유의 ‘망천도’는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그런 점에서 왕유의 망천벌업과 시, 그리고 회화는 새로운 감수성의 도래를 이끈 선구적인 성취임을 알 수 있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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