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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슈미르-⑤ ‘순정리론’의 작론처 아반티포라와 불적의 멸실

카슈미르 불교, 이슬람 술탄 지배·시크교도 통치때 괴멸

▲ 5세기 당시 카슈미르의 불교논사 중현이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하고 유부의 바른 뜻을 밝힌 ‘순정리론’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는 아반티포라의 힌두교(비쉬누) 사원 아반티슈와미 유적 정면. 기단의 형식이 파리하스포라의 스투파와 거의 동일하다.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하고 유부의 정의(正義)를 밝힌 중현(Saṃghabhadra)에 대한 평가는 전승마다 다르다. 티베트의 불교사에서는 세친에게 유부 비바사를 비롯한 18부파의 삼장과 6파의 외도서와 인명 등을 가르친 스승이라 하였고, 진제(眞諦)는 세친에게 논파당한 바라문 문법학자의 청에 따라 아요디아에서 ‘순정리론’을 저술하였다고 전한 반면, 현장(玄奘) 계통에서는 아마도 세친 문도들에 의해 생산되었을 매우 악의적인 전설을 전하고 있다.

‘순정리론’ 지은 곳 아반티포라
불적 없이 비쉬누·시바 사원만
박물관조차도 불상 10여 구 뿐

숭가 왕조 세운 푸샤미트라가
경전 태우고 스투파·가람 파괴
비구 살해 등 대대적 불교 박해

“중현논사는 카슈미르 사람으로, 총민(聰敏) 박달(博達)하여 어려서부터 뛰어난 명성이 널리 퍼졌는데, 특히 설일체유부의 비바사론(毘婆沙論)을 깊이 연구하였다. 당시 세친보살이 언외의 도리를 알아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주장하는 바를 설파한 ‘아비달마구사론’을 저술하자 이를 두루 열람한 중현은 마음에 집히는 데가 있어 12년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2만 5000송(頌), 80만 언(言)으로 이루어진 ‘구사포론(俱舍雹論)’을 지었다. 그리고 탁카국(磔迦國, Ṭakka)의 샤카라성(奢羯羅城, Śākala)에 머물고 있던 세친을 직접 만나 대론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거부(중현을 피해 중인도로 유행함)로 성사되지 못하자 기력이 쇠진한 중현은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선학을 비판 능멸하였다’는 참회의 말과 함께 자신의 저술을 문인을 통해 세친에게 부촉하고서 목숨을 다하였다.

이에 세친보살은 ‘중현은 총민한 후진으로 비록 이치에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말에는 부족함이 없다. 내가 지금 중현의 논을 비판하려고 들기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만 임종할 때의 부탁도 있고, 또한 어려운 문제를 잘 관찰 이해하여 비바사의 대의가 전달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뜻을 들어주도록 하리라. 하물며 이 논에서는 우리의 종의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데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논의 제목을 고쳐 ‘순정리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그와의 대론을 피하였으면서 이제 그의 논을 받아들이니, 당신의 학도들은 무슨 낯으로 이 치욕을 감당하겠습니까?’라는 문인의 간언에 세친은 이같이 말하였다.

‘이는 사자 왕이 돼지를 피하여 멀리 떠난 것과 같으니, 둘 중 누가 힘이 센 지는 지자(智者)라면 마땅히 알 것이다.’(‘대당서역기’ 권4: 필자 요약)”

▲ 사진은 각기 아반티포라의 힌두사원과 파리하스포라의 불교스투파의 돌계단 기둥의 부조.

그럼에도 현장은 중현의 ‘순정리론’을 카슈미르의 승칭법사로부터 2년간 청강하였고, 이 말고도 나란다의 계현법사로부터도 ‘유가사지론’과 함께 이것의 강의를 5년간 들었으며, 나란다 인근 이리나팔바타(현재 Mungīr)라는 곳에서도 유부의 두 대덕으로부터 ‘대비바사론’과 함께 다시 1년간 학습하였다. 17년에 걸친 인도 순방 중 이토록 지속적 관심을 갖은 논서는 그의 유학목적이었던 ‘유가사지론’을 제외한다면 이 밖에 달리 없을 것이다. 왜일까? 현장은 중현이 명종한 이곳(마티푸라: 오늘날 하르드와르)에 오기 직전 스루구나의 자야굽타라는 대덕에게서 5개월간 상좌 슈리라타의 ‘경량부비바사’를 청강하였는데, 짐작컨대 ‘순정리론’에는 당시 세친 사상의 배후였던 경량부 학설이 자세하게 비판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경 현장은 이로써 유부-경량부-유가행파의 교학적 상관관계를 명백히 하였을 것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는 동아시아 법상종의 토대가 되었다. 신라 태현(太賢)의 저술에서조차 상좌의 경량부가 언급되는 것도 이 덕택이었을 것이다.

중현이 ‘순정리론’을 지었다는 카슈미르 새 도성(新城) 남동쪽 50여리 떨어진 오래된 가람, 구법승의 여행기를 연구한 대개의 학자들은 이곳을 스리나가르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진 아반티포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곳은 힌두 왕 아반티바르만(Awantivarman, 855∼883)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현재 잠무로 향하는 국도 변에 500m의 거리를 두고 아반티포라 템플로 명명된 비쉬누 사원과 시바 사원이 남아있다. 두 사원은 1914년 발굴되었는데, 아반티 왕이 힌두사원을 건축하기 전에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일단 거기라도 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스리나가르에서 아반티포라 행 세어 택시는 시내 중심지 라일 촉 2번(No2) 택시 스탠드에서 출발하였다. 아반티포라는 잠무로 가는 국도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큰 도시이다. 거기까지 고속도로가 완공된 구간도 있었고 공사 중인 구간도 있었다. 이래저래 한 시간 남짓 걸렸다. 힌두사원은 시내에서 1㎞ 정도 못 미쳐 있었음에도 중심지에 내린 탓에 땡볕의 먼지 길을 이십여 분 다시 걸어 올라가야만 하였다. 먼저 닿은 곳은 아반티바르만 왕이 비쉬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지었다는 아반티슈와미 사원이다. 유적지는 도로에서 3∼4m 정도 푹 꺼져 있어 한 장의 그림으로 내려다 보였다. 이슬람 술탄에 의해 파괴된 채 젤룸 강의 범람과 지진으로 땅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였기 때문이란다.

웅장한 석문을 들어서니 이름 모를 온갖 신상과 문양이 조각된 석물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통상 보아왔던 단독의 힌두 신상은 보이지 않았다. 사원 중앙, 신상을 봉안하였을 신전(caitya: 廟堂)은 파리하스포라의 스투파 기단과 전체적 규모나 계단 양편 기둥의 부조만 다를 뿐 동일한 형식이었다. 거기서는 단순한 형식의 야차(혹은 보살) 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반해 여기 것은 세 명의 신상이 새겨져 있었다. 육중한 정문만을 제외한다면 이 비쉬누 사원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교 승원(비하라)의 명상 기도 등을 위한 개인 방 크기의 작은 방들이 중앙의 신전을 향해 있었고, 이를 가르고 있는 기둥은 간다라 풍이 아니라 차라리 그리스풍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인도미술사학자들은 이 사원의 스타일이 그리스의 헬레니즘적인 예술 건축에 크게 영향 받은 간다라 불교미술의 영향으로 매우 독특하다고 논평한다. 여기서 500m 더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 시바 사원인 아반티슈와라 또한 규모만 적을 뿐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이 산야 어디선가 오입(悟入, 스칸디라) 존자와 중현, 세친 등 수 많은 아비담미카(對法師)들이 다르마(法)에 대해 논쟁하였을 것이지만, 아반티포라에서 그들의 흔적은 고사하고 불교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아니 스리나가르 주변 카슈미르에서 불교 유적은 하르완과 파리하스포라, 그리고 후스카라 정도만 거론될 뿐 ‘불교’라는 말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 같은 이슬람권이지만 파키스탄 간다라의 경우 적어도 박물관에서만은 불상을 비롯한 불교유물은 차고 넘친다. 어딜 가나 스투파가 남아있다. 그런데 카슈미르의 경우 박물관조차 불상(석조)은 모두 합해 열 손가락도 꼽기 어려웠다.

▲ 힌두교 신상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는 작은 방들. 줄지어 서있는 기둥이 완연한 그리스 식이다. 인도미술사학자들은 이 사원의 스타일이 그리스 헬레니즘적인 건축에 영향 받은 간다라 풍이면서도 매우 독특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아난다의 마지막 제자 마드얀티카에 의해 개교한 이래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불교학의 중심이었던 카슈미르의 불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비달마대비바사론’, 현장 번역의 한역본으로 200권, 목차만 뽑아도 한 권의 책 분량이 될 정도이니 수많은 아비담미카의 논쟁이 없었다면 결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정리론’ 또한 12년이라는 각고의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다만 중현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 어렵다. 그만큼의 불교학 전통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현장이 카슈미르를 방문하였을 때 100여곳의 승가람이 있었고 승도는 5000여 명, 네 곳에 아쇼카 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었다고 하였다. 어쩐 일인지 오공이 체재할 무렵 카슈미르에는 가람이 300여곳이나 되었고 신령스러운 탑과 빼어난 불상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이 중 어떤 것은 아쇼카 왕과 500아라한이 건립한 것이라고 하였다. 랄리타디트야 왕의 불교(종교)보호 정책 때문이었던가?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힌두교도였다.

카슈미르에서의 대대적인 불교박해는 이미 마우리야 왕조 이후 숭가 왕조를 일으킨 푸샤미트라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 이야기는 ‘대비바사론’에도 언급되고 있다. “옛날 푸샤미트라(補沙友)라는 이름의 바라문 왕이 불법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경전을 불태우고 스투파와 승가람을 파괴하였으며, 비구들을 살해하였다. 카슈미르의 한 변방 중에서만 500의 승가람을 파괴하였거늘 하물며 다른 곳에서는 어떠하였을 것인가?”

‘대비바사론’에서는 계속하여 “옛날 달랄타(達剌陀, Dravida) 왕도 카슈미르에 들어가 불법을 훼멸하고 비구들을 살해하였으며, 스투파와 승가람을 파괴하고 경전을 불태웠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카니시카 왕 때 성전의 결집이 이루어질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그렇지만 현장에 의하면 카니시카 왕이 죽은 후 흘리타종(訖利多種)이 왕을 자칭하여 승도를 추방하고 불법을 파괴하였다.

쇠퇴와 번영은 역사의 과정이던가? 현장이 인도를 방문할 당시 이미 승가람은 황폐해지고 있었다. 현장은 중현이 ‘순정리론’을 지었다는 카슈미르 남쪽의 오래된 승가람에 대해 이같이 묘사하였다. “이곳의 오래된 가람은 형태나 구조는 광대하고 장대하였지만 너무 황폐하여 이제는 다만 한 모퉁이에 작은 이층집만 서있을 뿐이다. 승도는 30여명으로 대승법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카슈미르의 그 많던 승가람이며 스투파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스리나가르(카슈미르 新城) 근교 판드레탄(舊城)의 힌두사원 유적지에서 발굴된 불상(7세기, 왼쪽)과 시바신상(8세기, 오른쪽). 아마도 불교사원이 힌두교사원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스리나가르 박물관에서 몇 점 되지 않는 불교유물 중 판드레탄에서 출토한 불상이 역시 그곳에서 발굴된 힌두교 신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판드레탄(Pandrethan)은 스리나가르에서 6㎞ 떨어진 교외로 원래 아쇼카 왕이 세운 카슈미르의 수도였다. 판드레탄은 ‘옛날’을 의미하는 푸라나(Purana)와 ‘도시’를 의미하는 아디스탄(adhishthan)이 합성 와전된 말로, 현장이 카슈미르 ‘구성(舊城, old city)’이라 말한 것은 이를 가리킨다. (新城은 스리나가르) 판드레탄 사원은 지금은 군부대 안에 위치하고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스리나가르의 대표적인 힌두사원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곳은 19세기 말 발굴되었는데, 불상과 힌두신상이 함께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불교 사원이었던 것이 힌두 사원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불탑 기단 위에 ‘안다’라 불리는 원형 돔만 제거하면 그 위에 바로 힌두 신을 모신 묘당을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아반티스와미 힌두사원에서 파리하스포라의 스투파가 연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카슈미르의 불교승원과 스투파 등은 대부분 아반티바르만(855∼883)이나 샹카라바르만(883∼902), 크세마굽타(950∼958)와 같은 힌두 왕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들은 불교사원을 힌두교 사원으로 바꾸거나 그것을 짓는데 자재로 사용하였다. 12세기 카슈미르의 역사가 칼하나에 의하면 크세마굽타는 현장이 승칭법사로부터 ‘구사론’과 ‘순정리론’을 청강하였던 자옌드라 비하라를 불태우고, 석재는 자신의 시바 사원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랄리타디트야 왕이 지은 파리하스포라의 라자비하라(王寺 즉 몽제사: 4회 참조) 또한 샹카라바르만 왕이 파탄의 시바 사원을 건축하는데 자재로 사용하였으며, 불교사원뿐만 아니라 힌두사원도 파괴 약탈한 하르샤(1089∼1105)에 의해 불태워졌다.

추측컨대 현장 체재 무렵 카슈미르의 불교와 수많은 승가람은 이후 교리적 역동성을 상실한 채 쇠락의 길을 걸었고 힌두 왕의 출현에 따라 힌두사원으로 바뀌었으며, 뒤이어 유일신교인 이슬람 술탄의 지배와 19세기 이후 펀잡의 시크교도의 침공과 통치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M. A. 스타인은 1892∼1896년 사이 당시 카슈미르의 왕(Tratap Singh)이 스리나가르에서 바라물라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파리하스포라 승원의 석재를 자재로 사용하였던 사실을 보고하기도 하였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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