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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화내지 않기(인욕)

악업에서 보호하는 갑옷이자 대자비의 출발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3월17일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잠재적 범죄의 위험성’이 지적됐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묻지마 폭행, 층간 소음 등 개인의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며 “개인의 범죄를 넘어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타인에 대한 이해서 출발
나·너 분별심 사라지면
분노할 대상조차 없어져
폭력은 용기의 가면으로
악업을 조장하는 속임수

언제, 어디서 범죄를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분노는 보이지 않는 잠재적 가해자가 되고 있다. 동시에 폭력에 맞서기 위한 분노와 이에 따른 폭력이 용기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동급생들에 의해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학생이 강아지나 병아리 등 더 약한 동물을 괴롭히거나 또 다른 이들에게 ‘묻지마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스스로 해치기도 한다. 분노를 참아내는 인욕(忍辱)이 사라지고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악순환의 종착점에는 피해자만이 있을 뿐이다.

인욕은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와 지계 다음으로 제시되고 있다.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 불도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행해야 할 수행인 것이다. 인욕의 사전적 의미는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한문의 의미를 풀이하면 모욕이나 박해를 참고 견디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에 처해있는 뭇 생명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바세계 자체가 참고 견뎌야 하는 곳이라지만 상대에 대한 이해 없는 무조건적인 인욕은 수행이 아닌 고행이 될 수밖에 없다. ‘인욕’이라는 단어의 출발에 ‘이해’의 의미가 포함돼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욕의 산스크리트 표기 ‘크샨티(ksanti)’에는 ‘이해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참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인 듯 보이지만 부처님의 혜안은 이 두 행위의 교차점을 간파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전생에 행한 육바라밀에 대해 설하고 있는 ‘육도집경’에는 매에게 쫓기던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살바달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비둘기 무게만큼의 살을 떼어주는 것으로는 비둘기의 목숨을 살릴 수 없음을 깨달은 살바달 왕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아 매와 비둘기 모두를 살린다. 살바달 왕의 행위는 비둘기를 살리기 위함에서 비롯됐지만 그 속에는 고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매의 처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살바달 왕이 자신의 목숨을 매에게 주는 고통과 모욕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욕은 보시와 지계를 실천하기 위한 출발이자 모든 수행의 밑거름이다.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속에서 보시행도 가능하다. 또한 고통과 모욕을 참고 인내하는 인욕 없이는 계를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특히 인욕은 나와 타인을 나누는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자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묵지하다.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노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찢길 적에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옛날에 몸을 찢길 적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성을 내어 원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된 인욕은 나와 남에 대한 분별을 없앤다. 이는 곧 분노와 원망의 대상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길이며 번뇌를 불러오는 탐진치 삼독의 하나인 ‘분노’를 해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이처럼 인욕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도 이득이지만 타인의 악업을 멈추고 예방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이타행이기도 하다.

인욕은 때때로 나약하거나 비겁하게 보이기도 한다. 참는 대신 분노를 드러내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 자신과 이웃을 보호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부추기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숨어있는 있는 감정의 궁극적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와 남을 위해서’라는 거짓으로 나를 속인 분노인가, 아니면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된 커다란 슬픔의 덩어리인가. 불자라면 마땅히 살펴볼 일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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