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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완주 송광사-종남산- 봉서사

목탁·창 마주한 종남산서 호법·호국을 보다

▲ 송광사 삼성각 옆 미륵부처님이 3월의 매화향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듯 매화를 어루만지고 있다. 꽃이 피었으니 봄이다.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 편액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최명희 소설 ‘혼불’을 접한 독자라면 천왕문이 설레게 다가올 것이다. 작품 속 도환이 이 절의 천왕문을 우리나라 최고의 천왕문으로 묘사했지 않은가.

팔도도총섭 맡아서 승군 지휘
임란·병란 후 후학양성 매진한
벽암각성 문도 중창한 송광사

절 연못 길 따라서 가면 종남산
그 산을 넘으면 서방정토로 가는
이정표 ‘서방산’ 있고, 산 아래가
진묵대사 출가한 사찰 봉서사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으로서, 높이 삼십 척의 위용도 웅장하고, 그 신체 각 부위 균형이며, 전체 조화가 놀랍도록 알맞게 어우러져 큰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송광사 연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산으로 오르면 저 봉우리에 닿는다. 종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봉우리고, 봉서사는 그 너머에 있다.

그러나 그 설레임 잠시 미뤄야 한다. 천왕문에 앞서 금강문을 먼저 만나기 때문이다. 금강문의 금강역사와 천왕문의 사천왕은 도량 내 모든 악귀를 제거하며 가람을 청정케 하는 역할을 맡는다. 가람호지 측면서 보면 중복이기에 천왕문 기둥에 금강역사를 그려 넣어 금강문을 생략하고 천왕문만 세우는 경우가 많다. 혹 두 문을 다 세운다면 보통 일주문과 천왕문 다음에 금강문을 배치하는데 이 절은 금강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구례 화엄사와 하동 쌍계사 그리고 보은 법주사도 이 절과 똑같은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는데 네 절 모두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4∼1659)이 주석하며 중창보수 한 사찰들이다.

벽암 각성 스님은 영규, 서산, 그리고 사명대사와 함께 당시 승병을 일으킨 대표 인물이다. 충북 보은 출신인 벽암 스님은 임란이 발발하자 해상전투에 참여한다. 인조 2년(1624)엔 팔도도총섭을 맡아 승군을 지휘하며 남한산성을 쌓고, 병자호란 때는 의승 3천명 규모의 항마군(降魔軍)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기도 했다. 임란과 병란 직후 완주 송광사를 비롯해 화엄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 주석하며 후학양성에 매진했고, 말년에 이르러 속리산 법주사로 돌아 와 ‘공연히 이 세상에 와서/ 지옥의 찌꺼기만 만들고 가네/ 내 뼈와 살을 저 숲속에 버려두어/ 산짐승들 먹이가 되게 하라’는 열반송을 남겼던 고한 희언(孤閑 熙彦. 1561∼1647)과 법담을 나누며 지내다 화엄사로 가 열반에 들었다.

▲ 원래 저 일주문은 현 위치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 당시 절 땅이 축소되면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밀려났다가 1944년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벽암 스님은 생전에 쓰러져 가는 법당을 다시 일으키는데 진력했는데 화엄사, 쌍계사, 법주사 불사를 진두지휘할 때 천왕문 앞에 금강문을 세웠다. 임란과 정유재란 때 불탄 이 절 역시 훗날 벽암 스님의 문도가 재건했으니 스승의 가람배치를 따랐던 듯싶다. 굳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세웠다면 금강역사의 위신력을 더 증대해 보려는 의중이 있었던 듯싶은데, 불법과 가람 외에 무엇을 더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혹, 금강역사로 하여금 일본과 중국 등의 외세 침입을 막아 보려한 염원이 저 금강문에 담긴 건 아닐까?

금강·천왕문을 지나 종루를 거쳐 대웅전에 이르니 매화향이 꼬끝을 간지럽힌다. 그 향기 따라가니 야단법석에 서 있던 미륵부처가 중후한 미소로 나그네들을 맞이하고 있다. 송나라 때의 한 비구니 스님이 지은 ‘봄을 찾아 나서는 시’도 백매(白梅) 속서 피어오른다.

‘온 종일 봄을 찾아 다녔으나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다 헤지도록 언덕 위 구름만 따라 다녔네/ 돌아오니 활짝 매화가 피고 향내가 가득하니/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구나. (진일심춘불견춘 盡日尋春不見春/ 망혜편답롱두운 芒鞋遍踏隴頭雲/ 귀래소연매화취歸來笑然梅花臭/ 춘재지두이시분 春在枝頭已十分)’

절 담장 옆 연못길 따라 종남산 정상으로 향했다. 저 산 넘으면 서방정토로 가는 이정표 ‘서방산’이 있고, 그 아래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 1633) 출가사찰 봉서사가 있다.

▲ 봉서사로 출가한 진묵대사는 봉서사서 입적했다.

임진왜란 당시 벽암 스님이 목탁 대신 창을 들었던데 반해 진묵 스님은 목탁을 더 움켜잡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서 신음하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함께 했다. 저술한 책 한 권 없고, 스승이 누군지도 모른다. 진묵 스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건 초의선사가 기록한 ‘진묵대사유적고’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묵대사와 관련된 기이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고, 부처님 화신으로까지 칭송 받고 있다. 단언컨대 실존했던 인물 중 가장 전설적이다.

유생 봉곡 김동준이 진묵 스님에게 강목(綱目)을 빌려주고는 하인을 시켜 그 뒤를 따르게 했다. 진묵 스님은 걸어가며 손닿는 대로 책을 읽었는데 살펴 본 책은 땅에 버렸고, 절에 이르렀을 때는 책 한 질을 다 보았다. 봉곡이 물었다.

“대사, 책은 왜 버리십니까?”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필요 없습니다. (득어자망전 得漁者忘筌)”

▲ 봉서사 진묵전(작은 전각)은 진묵대사 부도탑이 자리한 승탑원을 향하고 서 있다.

의심에 찬 봉곡이 강목 내용을 물었는데 진묵스님은 막힘이 없었다. ‘강목’은 어떤 책일까? 황의동 선생은 논문 ‘진묵대사와 유교와의 대화’를 통해 그 ‘강목’은 총 70권으로 구성된 ‘성리대전(性理大全)’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성리학의 요체가 담긴 방대한 철학서를 단숨에 통찰한 진묵대사라면 천재였던 게 분명하다.

진묵대사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물고기 먹고 용변을 보았는데 그 물고기들이 펄떡펄떡 살아 나왔다는 이야기다.

운수길에 천렵하는 소년들을 만났다. 대사가 불 위에 걸려 있는 솥을 들여다보며 탄식했다. “물고기가 가마솥서 삶아지는 고통을 받는구나.” 한 소년이 희롱했다. “이 고깃국 드시겠습니까?” “나야 잘 먹지.” 진묵 스님은 솥을 들어 입에 대고는 순식간에 남김없이 다 마셨다.

 ▲ 봉서사 대웅전 전경.
소년들이 “살생을 경계해야 할 스님께서 고깃국을 드셨으니 스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라 하자 스님은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살리는 건 내게 있다”며 앉아 용변을 보니 무수한 물고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모두 살아 있었다.

이 일화 놓고 “그런 일이 가능하냐?”며 고개 젓는 사람 의외로 많은데 그럴 일 아니다.

진묵 스님의 다음 한 마디에 이 일화의 핵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아, 멀리 강해(江海)로 가서 노닐어라. 또 다시 미끼 탐하다가 가마솥에 삶겨지는 괴로움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종남산과 서방산 사이에 앉은 고즈넉한 봉서사를 지나 승탑원에 이르니, 가장 높은 곳에 진묵대사 부도탑이 한낮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7살 때 봉서사로 출가한 진묵 스님은 세납 72세 때 봉서사서 열반에 들었다.

나라가 풍전등화 지경에 처했을 때 출가자 손에 들려야 할 건 무엇일까? 목탑인가? 창인가? 종남산을 마주한 두 선사가 오늘도 묻는다.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을 향한 출가자의 정도를!
진묵 스님의 가르침 하나가 귓전에 맴돈다! 진묵 스님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시자에게 물었다.

▲ 진묵대사 부도탑.

“무엇이 보이느냐?” “대사님의 모습입니다.” 다시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대사님의 모습입니다.” 진묵 스님이 시자에게 일렀다.

“너는 화상(和尙)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부처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구나!”

진묵대사는 김제 ‘불거촌(佛居村)’서 태어났다. 진묵대사가 살았던 곳이라 추정되는 자리에 ‘조앙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김제 평야가 황금들녘으로 변하는 날 한 번 가보리라. 진묵대사의 전설이 시작된 곳 아닌가! 여기서 딱 100리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완주 송광사 주차장. 연지 옆 산사 담길 따라 300여미터 오르면 한국스카우트 송광훈현장 후문에 이른다. 후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길로 들어서야 한다. 200여미터 오르면 이동통신 기지국이 보이고 그 기지국을 중심으로 좌회전 한 후 산길 따라 1시간 정도 오르면 산불예방 감시 카메라 설치물을 만난다. 20여분 정도 더 오르면 종남산 정상이다. 15m 내려오면 주차장과 봉서사, 서방산으로 갈라지는 이정표를 만나고, 1Km 더 내려오면 봉서사와 서방산으로 갈라지는 이정표를 만난다. 정비된 등산로가 아닌 관계로 하산하며 봉서사가 오른쪽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길을 잘 잡아가야 한다. 길을 제대로 잡았다면 봉서사 대웅전 앞 마당에 이른다. 송광사서 종남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40분. 정상서 봉서사까지 40분이면 충분하다. 총 소요시간은 약 2시간 40분.


이것만은 꼭!

 
송광사 대웅전: ‘송광사사적기’에 의하면 초창 당시인 1622년에는 2층건물이었으나, 1857년에 건물이 기울어져 제봉선사에 의해 중수되면서 단층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 현판 글씨는 선조 아들 의창군(義昌君)이 썼다고 한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 현판도 의창군 글씨다. 보물 제1243호다.

 

 
송광사 종루: 중앙의 1칸에서 사방으로 1칸씩 돌출된 아(亞)자형 평면의 2층 누각 건물로, 십자형 평면 위에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세웠다. 사각형이 아닌 보궁(寶宮)에 주로 채택되는 십자형이어서 주목된다. 1996년 5월29일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나한전: 나한전에는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과 500나한상, 사자상, 제석범천상, 동자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석가여래 삼존상과 권속상이 모두 1999년 4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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