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 보살에 주목한 대승불교

기자명 김정빈

대승불교 출발은 보살의 이타 정신

대승불교 경전들은 기존의 불교를 소승(小乘)이라 비판하고, 자신들이 제시하는 불교를 대승(大乘)이라 선언하고 있다. 대승은 큰 탈것을 의미하고, 큰 탈것은 남과 함께 나아감을 의미하며, 남과 고통과 이익을 함께하며 나아가는 것을 불교는 보살행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승은 곧 보살승이다.

부처님과 제자 아라한은
전생 공덕서 큰 차이 있어
대승인들 수메다 보살의
이타 정신에 큰 감동받아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삿트와를 음역한 말로서,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삿트와(sattva)는 중생을 의미한다. 즉, 보살이라는 말의 본뜻은 ‘장차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되기로 결정되어 있는 중생’이다.

보살의 지위는 왕조 시절의 세자와 비슷하다. 이 비유에서 왕은 부처님이고, 세자는 보살이며, 정승은 아라한, 즉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깨달음을 성취한 제자들(대승불교 경전에서 이들을 대표하는 이는 사리불이다)이다.

왕이 보살이나 정승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자와 정승은 누가 더 높을까? 얼핏 보면 세자가 높을 것 같지만 실권을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정승 쪽이다. 정승은 정사에 참여하지만 세자는 현재로서는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차이점이 보살과 아라한 사이에도 있다. 보살은 성자가 아니라 윤회하는 중생이고, 아라한은 윤회를 초월한 성자인 것이다(나중에 대승불교는 이랬던 보살의 지위를 성자로 격상시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할 때 그렇다는 것이고, 미래세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자가 미래의 왕인 것처럼 보살은 미래의 부처님이다. 보살은 평민이 아닐뿐더러 정승으로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미래를 확보하고 있는, 성자 중에서도 대성자인 부처님이 되실 분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4아승지겁을 더한 십만 겁 전에 수메다라는 이름의 수행자로서 디빵까라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언명을 받음으로써 보살이 되셨다(受記). 주목할 것은 그때 디빵까라 부처님은 보살에게 설법을 해주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디빵까라 부처님은 단지 기(記: 어떤 주제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함)를 주셨을 뿐(授記), 디빵까라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기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는 보살 스스로 알아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설법을 해주시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럴 경우 워낙 근기가 뛰어났던 수메다 수행자가 곧바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히야라는 부처님의 제자는 설법을 듣자마자 깨달음을 성취했다. 또한 우리는 언하에 대자유를 얻은 많은 선사들의 사례를 알고 있다. 그러니 바히야나 선사들보다 훨씬 높은 근기를 가졌을 것이 분명한 수메다 수행자는 디빵까라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순간 깨달음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아라한이 되면 윤회가 끝나 다음 생을 받지 않게 된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는 공덕을 지을 수 없고, 공덕을 짓지 않으면 부처님의 경지를 이룰 수 없다. 이 점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디빵까라 부처님은 장차 부처님이 되기를 서원하고 있는 수메다 행자에게 설법을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불교는 자리(自利: 나를 위함)와 이타(利他: 남을 위함)를 겸하는 체계로 짜여져 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되는 것은 자리이고, 그 경지를 성취하는 기초를 이루는 공덕행은 이타이다. 이타행이 많을수록 자리의 크기도 커진다. 이 이치에 근거하여 수메다 수행자는 지금 당장 아라한이 되는 쪽을 포기하고 남을 위한 수많은 삶을 살기를, 그로인해 성취한 크나큰 공덕을 바탕삼아 부처님이 되어 아라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이익을 중생들에게 베풀기를 발원하였다(이는 또다른 의미의 이타이다. 즉, 불교 체계는 ①이타, ②자리, ③이타의 세 단계로 짜여져 있다).

대승불교인들은 보살의 이 발원에 감동받았고, 주목했다. 보살의 발원에는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보듬는 면, 위로하는 면, 함께하는 면이 있었고, 그들이 보기에 부처님이 제자 아라한 및 대승불교 발흥기의 승려들과 다른 점은 보살 시절의 적극적인 이타행에 있었다. 즉, 그들은 불교를 불교의 원점인 부처님, 부처님의 원점인 보살 정신으로 되돌리자 했던 것이다.

김정빈 밝은불교신행원장 jeongbin22@hanmail.net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