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어둔 숲 길, 달빛을 받으며
13. 어둔 숲 길, 달빛을 받으며
  • 이미령
  • 승인 2016.03.29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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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갇힌 이에게 달빛은 따뜻한 위로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편지 잘 받았습니다.

초하루 법회를 마치고 모두가 돌아간 뒤 텅 빈 사원, 스님들의 법문 주머니도 털리고, 공양간의 밥솥도 깨끗이 씻기었고, 해우소에도 더 이상 사람들의 근심이 쏟아지지 않네요. 부처님도 이제는 휴식을 취할 시간입니다. 달뜬 소망과 지친 푸념을 한보따리 짊어지고 찾아온 대중들이 돌아가고 소망과 푸념의 뒷설거지까지 마친 절집 풍경이 그려집니다.

해발 4000m 안나푸르나서
손전등도 없이 밤산행 강행
달빛 기대 무사히 캠프 도착
관음보살 자비 달빛 닮은 듯


적막이 감도는 사원 뜨락에 바싹 야윈 달님이 손톱 끝에 위안의 감로수를 적셔 도량에 후두둑 뿌려주시네요. 뜨겁게 달아오른 소망의 열기에 달님의 서늘한 축복이 밤이슬로 뿌려지는 시간.

어쩌면 낮 동안 사람들의 소망을 접수하느라 분주했던 관세음보살님이 이제 한숨 돌리신 뒤 본격적으로 바빠지실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달빛이 은은하게 강에 드리워 부드러운 은빛 속삭임을 불러내듯이, 종일 사느라 바쁘고 절망하느라 지친 사람들의 꿈속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가피를 드리우고 감응을 모으실 차례입니다. 달이 세상으로 내려와 대지를 부드럽게 비치는 모습은 관세음보살님의 자비가 사람들의 마을에 드리우는 것을 닮아 있지요. 그래서 수월보살님이라는 별명도 얻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스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은근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저 역시도 달을 참 좋아하거든요. 여고시절 한 때는 달이 두렷이 떠오른 날이면 창을 열고 그 달을 바라보느라 거의 밤을 샜고 학교에 가서는 비몽사몽 힘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가 바로 매력덩어리 쉐어와 풋풋한 모습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인공으로 나온 ‘문스트럭(Moonstruck)’이랍니다. 커다란 보름달이 떠 그 달빛이 이마를 때릴 때 사람들은 꿈에 그리던 사랑을 만나고 이룬다는 내용이지요. 모두가 속마음을 꽁꽁 감추고 위선의 삶을 살아가는데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세상을 환히 비치면 어쩔 수 없이 본마음을 따르게 된다는 걸 어쩜 그리도 달콤하게 풀어냈는지, 몇 번을 보고 또 본 영화입니다. 무엇에 홀렸는지 약혼자의 동생과 격정적인 사랑의 시간을 보내고,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다 도로 위 깡통을 발로 툭 차버리는 쉐어, 그리고 그녀의 모습 위로 흐르는 오페라 라보엠의 음악들은 지금 스님께 편지를 쓰는 제 귀에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달님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위선의 갑옷을 벗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달님의 사랑을 느낀 적은 또 있답니다.

몇 해 전, 겁도 없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에 올랐지요. 이런저런 일들로 몸도 마음도 지쳐서 해발 4000m가 넘는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난 것입니다.

방콕에서 카투만두로, 그곳에서 포카라로, 포카라에서 다시 트레킹이 시작되는 해발 1100m가 넘는 페디라는 곳까지 가야했습니다. 첫날 일정은 숨이 막혔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그곳까지 갔는지 정말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합니다. 페디에 도착한 것도 기가 막힌데 슬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려는 찰나, 세파가 외쳤습니다.

“서두릅시다. 담푸스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요.”

해발 약 1600m 높이에 있는 첫 번째 롯지로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겁이 났습니다. 비록 내 짐은 포터들이 짊어져줬지만, 어둑해진 산길을 걷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행들은 한겨울에도 눈 덮인 산에서 비박을 즐길 정도로 등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에 비해서 저는 동네 언덕도 오르지 않고, 책가방을 들고 강의하러 뛰어다니는 것이 운동의 전부였지요. 하지만 첫날부터 쳐질 수는 없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들을 따라갔습니다. 어둔 산길을 걷는데 손전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런 앱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 뭐가 있는지, 발밑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저 앞 사람 꽁무니를 좇기에 바빴습니다.

‘아, 어쩌면 좋아. 난 밤길에는 특히 약하단 말야. 이러다 넘어지면 어떻게 하라고….’

트레킹 첫 순간부터 제 마음은 쪼그라들었습니다. 어둠 속에 나 홀로 내팽개쳐진 것 같았고, 투정을 부려도 소용없다는 사실에 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변이 아주 환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럼 그렇지. 설마 세파들이 손전등을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지.’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건 손전등 불빛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그냥 환한 겁니다. 눈부신 빛도 아닌데, 달콤한 조명도 아닌데, 어둠 속에서 숲으로 난 길이 환히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문득 ‘가로등이 켜져 있나….’라는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내 머리 위 저 먼 곳에서 달님이 두둥실 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달빛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부드럽게 뿌려지던 달빛이었습니다. 달님이 그렇게 빛을 뿌리며 말없이 내 뒤를 따라와 주셨던 것입니다. 긴장하고 겁에 질려 잔뜩 움츠러든 내 등을 달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어루만져주었던 것입니다.

달빛이 그리 환한 줄 처음 알았습니다.

달빛을 받으며 밤의 산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로스 뜨레스 디아만떼스의 ‘루나 예나(Luna Llena)’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며 리듬에 맞춰서 천천히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고, 무사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의 첫 번째 숙소에 도착했었답니다.

달의 힘이지요. 그렇지요?

달은 무지의 어둠 속에 막연히 겁을 집어먹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빛을 뿌려 앞을 보여주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천천히 나아가게 합니다.

세상은 이런 달빛을 무시하려는 듯 엄청난 빛을 발명해 내어 사방팔방을 향해 쏘아댑니다. 그리고는 밤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고 재촉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지쳐가고 잠을 자서는 안 되는 사람들은 카페인과 알코올에 기대어 죽어갑니다. 달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수월관음보살님이 다시 찾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모처럼 달빛에 흠뻑 빠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과연 20세기 마지막 낭만주의자의 힘은 큽니다. 스님, 평안하시길.

이미령 올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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