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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구려의 거장 담징(曇徵), 교류의 역사인가 민족주의 설화인가?

기자명 주수완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는 담징의 작품이 맞을까?

▲ 호류지 금당벽화 동벽의 1호 벽화인 석가설법도. 670년 호류지 화재 이후 새롭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거장 담징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특히 1955년 발표된 정한숙의 소설 ‘금당벽화’를 교과서에서 읽은 세대에게는 더더욱 익숙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또한 우리나라가 고대 일본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도리불사나 혹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양지 스님보다도 훨씬 대중적인 아이콘이 바로 담징이다. 그가 호류지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리불사나 양지는 문헌상으로나 유물로나 어느 정도 분명한 족적을 남기고 있지만, 담징은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별반 남아있는 것이 없다.

‘일본서기’ 금당벽화 관련내용
담징이 그렸다는 기록은 없어
심지어 화가였단 언급도 전무

그러나 ‘쇼토쿠태자전력’ 에는
쇼토쿠태자가 담휘라는 인물을
호류지에서 기거하도록 요청해
학계선 담휘가 담징 오타 추정

담징은 승려이며 유학에 능하고
예술적 소질·과학적 제조법 아는
재주가 많았던 지식의 완전체

1949년 다시 화재로 원형 잃어
모사본만 볼 수 있는 게 아쉬워

예를 들어 그가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고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일본서기’에 담징이 등장하는 것은 맞다. 이에 의하면 승려인 그는 610년(고구려 영류왕 21년이자 스이코 천황 18년)에 일본에 건너갔는데, 유교의 5경에 대해 식견이 있었고, 채색을 잘 했으며, 종이와 먹을 만들 줄 알았다. 또한 맷돌(碾磑)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그 시초로 생각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호류지 금당벽화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호류지 금당 서벽의 6호 벽화인 아미타설법도. 우리나라에 담징의 그림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인도·당나라 화풍이 엿보여 담징의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더불어 그가 화가였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채색에 능했다는 기록은 그를 화가로 볼 소지를 충분히 남겨둔다. 그가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는 종이나 먹 역시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되는 도구이기도 하므로, 그가 화가임을 뒷받침하는 것일 수 있으나, 바이올린의 명기를 만든 스트라디바리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고대에는 안료나 재료를 자신의 창작 스타일에 맞게 직접 제작하여 사용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충분히 참고는 될 만하다.

만약 그가 화가였다면 굳이 화가라고 기록하면 될 것을 이리 돌려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금 편을 들자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는 일단 승려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그의 행적 중 불교에 관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불교는 기본이고 그 외에 그가 잘하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그리고 나아가 백제나 신라의 승려들이 일본에서 대우를 받았던 이유는 바로 불교학 외에 이러한 세계문물에 대한 정보를 삼국 승려들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호류지 금당에는 4폭의 불설법도와 팔대보살이 그려졌는데, 보살벽화 중 널리 알려진 관음보살입상(남벽 동쪽). 인도 아잔타 석굴에 와있는 듯 이국적이다.

이렇듯 후하게 화가로서의 담징을 인정한다고 해도 호류지 벽화를 그린 화가로까지 연결되기에는 비약이 큰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담징이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린 화가로 둔갑한 것일까? 사실상 이는 구전(口傳)에 가깝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호류지를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금당벽화를 담징이 그렸다고 하는 구전된 이야기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구전의 발상을 문헌으로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89년 카와다 츠요시(川田剛), 코스기 스기무라(小杉榲邨) 그리고 쿠로가와 마요리(黒川眞賴) 세 사람이 ‘고오텐고큐죠강연(皇典講究所講演)’에 게재한 논문에서인데, 여기서도 담징이 호류지 벽화를 그렸다는 구전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이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어 1895년 간행된 토리히 다케히라(鳥居武平)의 ‘호류지가람제당순배기(法隆寺伽藍諸堂巡拜記)’라는 글에서는 ‘담징의 필력이라 전한다’고 하여 이러한 구전이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담징이 호류지 벽화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었다.

박종홍(朴鐘鴻, 1903~1976)은 그 선구적인 예인데 1922년 잡지 ‘개벽’에 기고한 ‘조선미술의 사적(史的) 고찰’이란 글에서 호류지 벽화의 음영법·명암법 등이 서역화풍, 즉 실크로드를 통한 헬레니즘 화풍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담징이 호류지에 기거하고 있었다는 사료를 들어 이를 담징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서역화풍이 고구려 고분벽화 중의 강서대묘에도 보인다고 하여 20세기 초반에 이미 실크로드 화풍, 고구려 고분벽화, 그리고 일본의 아스카시대 화풍을 잇는 교류의 역사를 섭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담징과의 관련성을 떠나 그의 폭넓은 시각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오세창(吳世昌, 1864~1953)과 문일평(文一平, 1888~1939), 나아가 최초의 한국미술사를 저술한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4~1974) 역시 한국미술의 범주에서 호류지 벽화를 다루면서 담징의 작품으로 전한다는 구전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박종홍이 언급한 담징의 ‘호류지 기거’ 사실이다. 만약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가 화가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기록으로 인정하고, 거기에 호류지에 기거하고 있었다면 그때가 쇼토쿠 태자 시절인 점을 감안해 그가 벽화를 그렸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바로 그 근거가 일본 헤이안 시대에 후지와라 가네스케(藤原兼輔)라는 사람이 썼다는 ‘쇼토쿠태자전력(聖德太子傳曆)’이다. 여기에는 ‘일본서기’와 유사한 내용과 함께 쇼토쿠태자가 담징을 호류지에 기거하게 했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담징(曇徵)이 아니라 담휘(曇徽)이다. 여기서의 담휘가 곧 담징일까? 아마도 ‘쇼토쿠태자전력’에 등장하는 담휘의 기사 내용과 ‘일본서기’의 담징 기사가 유사하고, 거기에 ‘징(徵)’과 ‘휘(徽)’의 한자가 비슷하니 충분히 혼동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도 담휘를 담징의 오타로 인정하는 추세다.

▲ 호류지 금당 북벽의 향좌측 9호 벽화인 불설법도. 미륵불설법도로 추정되지만 다른 해석도 분분하다.

이 정도면 호류지 금당 벽화를 담징이 그렸다고 전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도 이 때문에 과거부터 담징이 그렸다고 구전되어 왔던 것 같은데, 아마 제국주의 시절 동안 한국과의 관계를 평가절하하게 되면서 담징의 흔적도 점차 ‘근거 없음’으로 결론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은 호류지 벽화의 담징  제작설을 언급하면 때늦은 민족주의적 발로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어떤 동네에서 범죄가 일어났고, 근처에 유사한 범죄 이력이 있는 전과자가 있으면 그 사람부터 의심하는 것이 수사의 기본이 아닐까? 호류지에 채색벽화가 그려졌고, 마침 그 시기에 고구려에서 온 채색을 잘 하는 화가가 그 절의 주인으로부터 머물러 달라고 부탁을 받아 머물고 있었는데, 막상 벽화 제작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물론 ‘일본서기’나 ‘쇼토쿠태자전력’과 같은 사료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한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뭔가 사연이 있어 담징이 그렸다고 구전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난회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을 이야기하며 소개한 바와 같이 호류지는 670년 불에 탔다. 쇼토쿠 태자 시절 담징이 일본에 들어가 벽화를 그렸다면 610년 조금 지난 시점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금당벽화는 담징의 작품이 아닌, 화재 후 재건되면서 새로 그려진 벽화인 셈이다. 물론 그때 불탄 것은 와카쿠사 가람이고, 담징의 벽화가 그려진 현재의 금당은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지금은 설득력을 많이 잃었다고도 소개했다. 다만 금당 해체수리 당시 목재가 670년 화재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다시금 금당과 담징의 작품이 아스카 시대의 원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는 있어 논쟁은 진행형이지만 대체로 현재는 670년 화재 후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담징이 그렸건 아니건 별반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 호류지 금당 북벽의 향우측 10호 벽화인 불설법도. 의좌상인 것이 주목되며, 약사불설법도로 추정되는데, 이 또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쩌면 사방불과 팔대보살이라는 복잡한 도상구조 자체부터가 담징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는 화재 이후 일본이 호류지를 복원하면서 거장 담징의 작품을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 그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금 넓게, 약간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즉, 담징은 마치 중국에 가톨릭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마테오리치 같은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승려인데 유학 경서에 능했고, 예술적 소질도 있었으며, 과학적 제조법도 알고 있었다. 그를 굳이 화가로 지칭하지 않은 것은 그가 화가로 국한하기에는 재주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호류지 금당 건설에 그의 영향은 단지 벽화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금당에 돌아가며 사방불을 그리고, 거기에 음영법을 넣고, 불상을 배치하고, 오래도록 변색되지 않을 안료로 채색하고 그 사이사이에 보살 벽화를 그려 넣는 등의 도상적 마스터플랜 전체가 담징의 아이디어였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호류지의 내부 배치는 매우 독특하고 체계적이어서 그 이후 일본의 사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이 엿보인다. 화재 이후에 비록 새로 그려지더라도 담징이 전파한 원대한 구상은 후배 장인들에 의해 그대로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담징이 난제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역량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세기 아시아 지식의 완전체 담징의 흔적을 우리가 제대로 가늠도 하기 전인 1949년 다시금 화재로 원형을 잃어 지금은 모사본만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38호 / 2016년 4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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