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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불광산 개산 50주년의 기쁨과 낙관-중

“포교와 전법은 인연공덕으로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 세계 130개국의 불광산 불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열린 ‘2012년 국제불광회세계회원대표회의’. 대만 불광산 제공

“불광산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기증해주는 사람이 있고 저것을 기증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빈승은 사람들에게 한번도 무얼 기증하라고 입을 뗀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내놓지 말고 보시는 가늘고 기다란 물줄기처럼 조금씩 하라고 사람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빈승이 일생에서 먹어봤던 음식은 모두 잊지 못하고 일체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수십년 전 타이베이 김지고(金枝姑) 선생의 집에서 마셨던 시원한 우유 한잔은 마치 감로수와도 같아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70년전 진강의 ‘일지춘(一枝春)’이라는 작은 국수집에서 현화(現華) 스님이 국수 한 그릇을 사준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그 향내가 입안에 남아있는 듯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진강시위원회서기(鎭江市委員會書記) 허진영(許津榮) 선생의 냄비국수 역시 인간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또 30~40년 전에 대만 창화(彰化)에 있는 국수 노점에서 먹었던 1원50전짜리 국수 한 그릇도 지금껏 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그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것들 모두가 저의 일생에서 누린 최고의 음식입니다.

당신이 남들로부터 받은 기쁨을 당신도 남들에게 기쁨으로 전해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대만 남부의 가의(嘉義)에 20~30평 크기의 땅이 있었는데 마침 어떤 집 땅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땅은 수십억원이 넘는 가치가 있는 토지였지만 우리의 이 자투리 땅에 막혀 큰길과 이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그 땅 주인은 시가보다 훨씬 더 비싼, 한 평에 3000만원의 가격을 제시하면서 우리한테 그 땅을 팔 것을 권유했습니다. 저는 제자인 ‘각우(覺禹)’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이르면서 “공정가격이면 된다”면서 “이런 물건으로 한몫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일렀습니다. 만약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면 그 사람한테 바가지를 씌운 것으로 돈은 많이 받았겠지만 두고두고 욕을 먹을텐데 그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공평하면 된 것으로 피차간 서로 기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군자에게는 남의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는 미덕이 있습니다. 이런 일 같은 경우도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저도 기쁘고 또한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한신(韓信, 한나라 초기의 무장, 역자 주)이 어려운 시절 빨래를 생업으로 하는 아낙에게서 밥을 얻어먹었던 은혜의 보답이 미담으로 전해졌듯이 우리가 지금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연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세상의 ‘한신’ 같은 사람에게 수많은 빨래터의 아낙들을 다시 만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즐거움이 어디로부터 오냐고 저에게 물으십니까? 서로 상호간에 신앙의 진리 속에서 노닐면서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내가 없으니 남도 없고 내가 있으니 남도 있는 것으로, 이 가운데에 아주 미묘한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햇살 아래서 일을 하느라 아주 뜨겁더라도 집안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밥을 찻물에 말아 점심을 먹더라도 그 맛이 더할 나위 없는데 제가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가까운 도반인 자운(煮雲) 스님이 자주 저를 찾아 왔었는데 저녁에 잠을 잘 때가 되면 빈승은 제방에 있는 침대를 양보하고 베란다로 나가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밤중에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였으니 빈승이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마치 명나라 주홍무(朱洪武 명태조 주원장, 역자 주)가 늦게 돌아오니 절 문이 이미 굳게 잠겨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절 앞 광장에 드러누워 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당시 저는 “하늘을 장막 삼고 땅은 융단 삼고 일월성신이 나와 함께 잠에 드네, 한 밤 중에 차마 발을 길게 뻗지 못함은 발길질로 바다 건너편 하늘을 뚫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네”라고 하였던 얽매임이 없는 삶을 저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 LA에 갔을 때 제자가 저를 위해서 준비한 침대에서 쉬라고 하였는데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이리저리 돌아누워도 잠을 잘 수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호사를 누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방바닥에서 잠을 자야 편하게 잘 수 있으며 상쾌한 그곳 날씨에 시원한 방바닥에서 푹 잠들 수 있습니다.

매일 경비를 조달해야 하고 먹고 입을 것을 마련해야 하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냐고 한다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불광산 근처 토지는 절 아랫동네 주민들이 땅값을 많이 올려서 비탈진 땅조차 지금은 한 평에 몇 백만 원씩 하기 때문에 사들이기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상관없는 것은 다행히도 애초에 옥림(玉琳) 국사께서 빈승이 이 땅을 사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옥림 국사는 300년 전인 청 순치황제의 스승이신데 어떻게 빈승이 불광산 땅을 사도록 도와주셨다는 말인가 하고 모두들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빈승이 ‘옥림국사’의 간략한 전기를 소설로 썼는데 중쇄를 몇 십 번이나 했을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홍콩, 필리핀에서도 줄곧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고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어서 저를 대신해 널리 선전해 주었습니다.

갑자기 많은 인세를 받게 되었고 빈승이 평소 돈을 쓰는 습관도 없었기에 토지를 샀습니다. 심하게 비탈진 골짜기 땅이 있기도 하지만 불광산도 점차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가격이 쌌기 때문에 제가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토지가 마련되고 나서 건축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흉한 곳에는 귀신도 오지 않을 거라면서 처음에는 신도들이 자꾸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빈승은 귀신은 귀신의 세계가 있어서 귀신이 오지 않고 저는 불보살님께서 오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빈승이 ‘대비전(大悲殿)’을 짓도록 관세음보살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대비전을 짓도록 관세음보살께서 어떻게 저를 도와주셨을까요? 빈승이 대만 중북부 신죽(新竹) 청초호(靑草湖)에서 강의를 할 때 일본어를 3개월간 배운 적이 있어서 일본학자 모리시타 다이엔(森下大圓) 선생의 저서 ‘관세음보살보문품강화(觀世音菩薩普門品講話)’를 번역하였습니다. 50년 전의 대만은 불교문화가 황폐한 시기였기에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인세 수입만으로 법당 한 채를 짓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관세음보살님께서 자비하셔서 보살상 한 존에 2만원씩, 인연 있는 불자들이 모실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빈승은 관세음보살 만불보전의 명의로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여 대비전을 지었습니다. 장개석(蔣介石, 중국 1887년 10월31일~1975년 4월5일) 총통까지도 소문을 듣고 참관하고 싶어 하셨으며 심지어는 그 아들이신 장경국 선생은 불광산을 네 번이나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불광산이 지어졌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지 구경하고 싶으셨던 거라고 빈승은 생각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으로 대비전을 지은 이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빈승이 대웅보전을 지을 수 있도록 나서서 도와주셨습니다. 부처님은 아주 평등하시고 전 세계의 수많은 사찰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대웅전을 지으려고 하는데 무슨 시간이 있으셔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도우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승이 쓴 ‘석가모니불전(釋迦牟尼佛傳)’이 동남아 등 많은 지역에서 100쇄 이상 출판되어 국내외로 널리 발행되었으니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널리 비추어졌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신도들의 지지를 받아 4만원으로 불상 한존을 모시도록 하였습니다. 빈승이 이렇게 대웅보전을 짓게 되었는데 별다른 어려움도 없고 많은 힘도 들이지 않았으니 제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비전과 대웅보전이 지어지고 나서 아미타부처님께서도 빈승을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빈승은 염불 7일정진과 조석예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아미타 부처님과 저는 더욱 연분이 있었습니다. 불광산 동쪽 산자락에 아미타 대불을 높이 세우고 낙성식을 하면서 빈승은 ‘서쪽에서 흘러온 샘물을 뜨고 고병계(가오슝과 병동지역 사이를 흐르는 하천, 역자 주)의 모래를 채취하고 전 세계인의 원력을 모아 최고의 대불을 세운다(取西來之泉水 採高屏之砂石 集全球之人力 建最高之大佛)’라고 게송을 썼습니다. 480존 부처님이 아미타대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한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면 수많은 부처님이 호위하고 지지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인연이 제가 즐거워하기에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불광산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기증해주는 사람이 있고 저것을 기증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빈승은 사람들에게 입을 뗀 적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 많이 내놓지 말고 보시는 가늘고 기다란 물줄기처럼 조금씩 하라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자신들의 최대한 힘을 다해서 저의 도움 인연을 자처하고 있으니 빈승도 물론 전력을 다해서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타이베이에서 중국불교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하였지만 경비를 조달할 곳이 없기에 우선 장소라도 빌려서 학생들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빌려도 문짝조차 빌리지 못했습니다. 빈승은 불광산 주요 소임자들에게 “곧 설날이라 신도들도 올 테니 불광산으로 돌아가서 신도들에게 국수라도 끓여주자. 신도들이 도우면 연구원을 세울 방법이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38호 / 2016년 4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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