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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분별의 득과 실

기자명 이미령

옳고 그름 구분조차 분별심으로 폄하돼서야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안녕하세요.

어느 사이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온 세상을 꽃 대궐로 만듭니다. 노란 꽃, 분홍 꽃, 흰 꽃, 빨간 꽃, 주황 꽃, 심지어 보라색 꽃까지 온갖 빛깔의 꽃들이 산과 들에, 도시의 골목길과 아파트 단지에 피어난 걸 보다가 문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한 몸에 저런 빛깔로 옷을 입는다면 분명 촌스러울 테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저 꽃들은 저리도 잘 어우러지는 걸까?

‘막존지해’는 외면과 달라
부처님도 의문 갖고 출가

부정·부당 판치는 사바서
잘 분별해 ‘최선’ 찾아야

멋쟁이는 비싼 브랜드 옷을 걸친 사람이 아니라 옷 색깔을 얼마나 조화롭게 해서 입느냐에 달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꽃들에게는 그런 말이 들어맞지 않습니다. 제각각 시절인연을 따라 그저 활짝 피어났다가 시들어서 떨어져야 할 때 후루룩 꽃잎을 떨어뜨리거나 댕강 꽃봉오리를 떨구면 그뿐입니다.

꽃들은 남에게 멋져 보이려는 게 아니라 그냥 피어나지요. 반면 사람은 남에게 멋지다는 소리, 패션 감각이 있고 세련됐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색깔을 고릅니다. 바로 이 ‘고르는 마음’, 이것이 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골라야 하기 때문에 이 색깔은 괜찮고, 저 색깔은 촌스럽고… 라는 분별이 생깁니다.
그런데 분별은 불교에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 말입니다. ‘분별심을 내지 말라!’라는 말도 있지요. 대다수 불자들은 이 말이 어떤 뜻인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그 뜻을 물으면 애매모호한 대답만 돌아오니, 묻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그래도 자꾸 캐물으면 ‘분별심 일으키지 말라’는 핀잔이 돌아오니 결국 나름대로 판단을 합니다.

‘난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건데…. 그렇다면 궁금해 하지도 말라는 말인가? 아하,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 하니, 지해(知解)란 알음알이요, 그 알음알이란 바로 이것저것 알려는 마음이니 알려고 하면 분별해야 하고, 알면 분별심이 생기니, 옳거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거로구나. 불자가 되려면 그런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그래서 불자들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립니다.

‘그래, 알려면 따져야 하는데 따져 봤자 머리만 아프고, 머리 아픈 건 분별심을 내서 그런 것이니 그냥 살자!’

어떤 것이 최선의 길인지를 잘 따져볼 생각은 접어두고 그냥 살던 대로 살자고들 말하지요. 이게 불교라고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스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과 옛 스님들의 가르침 가운데 어쩌다 이런 구절만이 불자들에게 각인되었을까요?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부터가 따지던 사람 아니던가요?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게 마련이거늘,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따진 사람이 싯다르타 태자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남에게 생로병사 현상이 찾아오면 측은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꺼림칙하게까지 여기면서 자기에게는 그런 현상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러다 자신에게 찾아오면 마치 절대로 찾아와서는 안 될 일이 찾아온 것처럼 기겁을 하는, 바로 이런 모순이 왜 일어나는지, 찾아와야 할 현상들이 찾아왔으면 그저 기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왜 불안과 근심, 초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지…. 이렇게 사사건건 따지고 들었던 분이 바로 싯다르타 태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이 그분으로 하여금 성문을 나서게 했지요.

‘그냥 마음을 내려놓자, 마음을 비우자’라는 결론으로 쑥 빠져 버리지 않고, 그 생로병사와 그에 따른 불안과 슬픔과 근심과 고뇌의 원인을 캐물으신 분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무시하고, 그저 ‘막존지해’라는 네 글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게 불교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봄꽃들의 잔치를 말씀드렸지요. 꽃들의 세계에서는 그냥 제 피어난 자리에서 피었다가 시들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세계는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조화를 이루고 평화로울 수 있는지 그 길을 모색하고 탐색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럴 때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사바의 화두가 아닐까요? 남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나의 일색(一色)으로 바꾸고 싶더라도 다른 이의 빛깔을 무시하지 말고 어우러져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바세계에 사는 우리 모두의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출가하신 스님이나 머리가 긴 재가자나 사바의 숙제를 풀어야 하는 건 똑같지 않을까요?

사바에 사는 사람들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겠지요. 국가라는 큰 틀에서 국가 구성원들의 공동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고 그저 옛 정과 인정에 호소하는 국회의원 후보자들, 권위를 내세우며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고 소리 지르는 이른바 갑질하는 바보들, 그 바보들의 갑질에 지레 겁먹고 알아서 충성을 바치는 ‘을’ 속의 ‘갑’들, 내 가정의 행복만 최고라면서 그 울타리 너머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우물 속 개구리 같은 어른들, 제 속으로 낳았으면서도 그 어린 생명을 죽을 때까지 패고 그러고도 저희들은 자기들 살 궁리하느라 바쁜 패륜부모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이런 자들이 판을 칩니다. 그런데 분별하지 말아야 할까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내 마음만 내려놓고 있으면 되는 걸까요?

벼슬이란 것이 어떻게 인간사회에 자리하게 되었는지를 일러주는 경이 ‘디가 니까야’에 들어 있는 일명 ‘세계의 기원에 관한 경(aggannasutta)’입니다. 거기에 보면, 인간 사회가 처음으로 농사라는 걸 지을 때 내 것과 네 것이라는 경계가 지워지는데, 어느 욕심 많은 중생이 제 것을 놔두고 남의 것을 훔쳐갑니다. 이걸 막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지요. 그래서 한 사람을 뽑아서 도둑을 막고 처벌하는 일을 맡기자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대신 뽑힌 사람은 노동을 하지 않고 사람들이 농작물을 거둬줘서 생계를 유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는 왕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좀 더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제도인데, 어쩌다 인간들은 저희가 뽑은 자에게 굽실거리며 살게 됐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습니다.

아이러니는 그렇더라도 봄날은 잘도 가네요. 꽃잎이 나부낍니다. 스님의 답장을 기다리며 오늘은 꽃비를 맞아보려고 합니다. 평안하세요.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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