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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광산 개산 50주년의 기쁨과 낙관-하

“빈승이 항상 주방에 있으니 불자들이 봉사에 함께 합니다”

▲ 매사 솔선수범하는 성운대사는 국수를 조리하는 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만 불광산 제공

“신도들이 불광산에 와서 저를 찾으면 “스님은 주방에 계세요”라는 말에 국수를 끓이고 있는 저를 보게 되더라도, 말을 나눌 시간이 없어도 “대중들이 먹을 수 있도록 국수 좀 날라다 주세요”라는 저의 말에 그들도 기꺼이 나서서 도왔습니다. 대만 자원 봉사자의 성장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

 저는 1975년 정월을 맞으면서 매일 주방에서 국수를 끓였는데 하루에 큰 솥으로 50솥 이상을 끓였습니다. 신도들이 불광산에 와서 저를 찾으면 “스님은 주방에 계세요”라는 말에 주방으로 찾아와도, 국수를 끓이고 있는 저를 보게 되더라도, 말을 나눌 시간이 없어도 “대중들이 먹을 수 있도록 국수 좀 날라다 주세요”라는 저의 말에 그들도 기꺼이 나서서 도왔습니다. 대만 자원 봉사자의 성장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불광산이 전세계 오대주에서 불법을 전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을 맺었기 때문으로, 모든 인연이 성취되면 불법의 법수가 자연히 길게 흘러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불법은 인연에 의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광산에서는 당신이 어느 곳을 가던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개산 초기로 기억하는데 동방불교학원의 원형 문이 있는 앞쪽으로 약 30평 정도 시멘트 바닥의 평지가 있는데 울력이 끝나면 자주 개산 초기의 제자들과 바닥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나누었습니다.

누군가 동쪽 산자락 통로를 ‘보리1길’ ‘보리2길’ ‘보리3길’이라고 불렀는데 기실 이 길은 300m도 안 되는 길인데 ‘보리3길’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300m는 긴 거리가 아니지만 보리를 찾는 길은 아주 길다고 하겠습니다. 또 누군가 방생지에서 대웅보전까지의 길에 대해 방생지에서부터 불이문까지는 ‘자비1길’로, 불이문에서 조산회관까지는 ‘자비2길’로, 조산회관에서 대웅보전까지는 ‘자비3길’이라고 부르자고 건의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방편법문을 세간의 가르침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근거로 삼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누군가 건의하기를 일주문으로 들어와서 총림학원으로 가는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지혜1길’, 향광정(香光亭, 불이문 앞쪽광장 맞은편에 있는 정자. 역자 주)에서 총림학원의 원형 문까지를 ‘지혜2길’, 원형 문에서 대비전까지의 길을 ‘지혜3길’로 하자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쪽 산에 위치한 대지전(大智殿) 문수보살의 지혜와 서쪽 산자락 대비전 관음보살의 자비를 융화시켜야 하는 것이 전체 불광산의 중점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 길들이 길지는 않지만 한 사람마다의 서원은 무궁무진하고 무한하게 길다고 하겠습니다. 50년 이래로, 불광산 건설에 있어서 베푸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노소 참배객을 막론하고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불광산을 ‘환희산’이라고 말한다 해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불광산 서쪽에 위치한 총림학원과 조산회관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어서 왕래하기에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리를 놓아서 양쪽을 연결시켜야 하겠다고 나중에 결심했었습니다. 골짜기가 깊어서 다리 교각이 높아야 했지만 소정순 선생은 어렵지 않다고 여겼고 단지 400만원을 들여서 다리를 지었고 빈승은 이 다리에 ‘보교(寶橋)’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부처님 재세 시에 부처님께서 강물을 건너셔야 하는데 외도들이 다리를 파괴하였기에 목건련이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다리로 변하게 하여 부처님이 순조로이 건너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교로 부처님을 건너게 하다(寶橋度佛)’라는 이야기의 출처입니다. 이 다리가 지어지고 나니 총림학원과 조산회관 간에 산 아랫길이나 뒷산의 먼 길을 돌아가지 않고 신도와 제자들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가 제자들과 재가 불자들이 건너가고 건너오게 되었으니 진정으로 명실상부한 보교도불(寶橋度佛)이 되었고 대중들도 찬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어느 한 번은 태풍이 불어 보교 근처에 심어져 있던 작은 보리수를 쓰러뜨렸습니다. 태풍이 지난 후에 산을 둘러보고 있던 제 눈에 나무뿌리도 잎사귀도 나무 가지도 없이 마치 방망이처럼 보이는 약 1m 길이의 나무줄기가 보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저는 뿌리도 없이 방망이 같은 나무줄기를 원래 그 자리에 심어주고 바람과 햇살을 못 이길까 싶어 짚을 덮어 주었습니다. 습기를 보존하면서 날마다 물을 주었습니다. 두세 달이 지난 후 그 나무줄기에서 잎사귀가 자라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주 큰 보리수로 자랐습니다.

불광산 초기에 많은 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에도 역시 이렇게 관심을 주며 정성껏 키워서 오늘의 그늘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마죽원에서 동쪽 산으로 가는 보리길 옆으로 한겹 한겹의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아미타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나무들이 일곱 겹으로 늘어 선’ 모습과도 같습니다. 저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나무와 꽃들의 생명력 역시 같이 성장해 왔습니다. 현재 이 나무들은 50년의 세월 동안 천천히 성장하여 어떤 것은 한 사람이 다 감쌀 수 없는 거목으로 자랐으니 이곳이야말로 복덕이 있는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무들이 자라 불광산에 그늘을 이룬 것 외에도 온갖 꽃들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꽃에 눈길을 잘 주지 않는 성격이라서 누가 화분을 보내오더라도 보지 못하다가 꽃이 져서 바닥에 떨어지면 그제야 꽃이 있었던 것을 알고는 합니다. 빈승은 저의 이러한 성격을 알고 “왜 꽃이 아름답게 피었을 때는 보지 못하고 꽃이 진 다음에서야 꽃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광산의 제자들은 수시로 저를 따라 길을 걷다가 ‘부겐빌레아’가 길가에 만개한 것을 보고 “은사 스님, 꽃 좀 보세요!”라며 알려 줍니다. 나무에 늘어져 있는 포장화 넝쿨을 보아도 제자들은 “스님, 꽃 좀 보세요!”라며 저에게 말해주니 안볼 수가 없는데 정말 환하고 아름답습니다.

현재 불광대로에는 대만 모감주나무, 인도 자단나무와 7월 학생들의 졸업시즌이면 활짝 피는 봉황꽃 등이 일년 내내 꽃을 피워 우리들이 별도로 꽃을 사서 불단에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온갖 꽃으로 불광산 시방제불께 공양을 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의 위대한 불교건축인 운강, 용문, 돈황, 대족, 보정석굴 모두 다 예술 걸작으로, 옛날에 나라에서 자금을 들여 지은 것으로 현재 말법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 당시와 같은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근대에 지어진 사찰 가운데 불광산처럼 불상이 많은 도량은 아마도 드물 것입니다. 불광산에 모신 크고 작은 불상이 실내외에 적어도 수만 존은 되는데 우리들의 정성어린 신심을 나타내고자 싱싱한 꽃들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면 싱싱한 꽃들이 수없이 많이 필요합니다. 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온갖 꽃들이 만개할 때는 제불보살님을 생각하며 환희심을 금할 길 없습니다.

빈승은 불광산에 절강 보타산 관세음보살의 도량인 대비전을 서쪽 산에 지었고 산서 오대산 대지문수보살의 도량인 대지전을 동쪽 산 위에 건립했으며 왼쪽 편으로 사천 아미산 금정 보현전이 있고 오른쪽 만수원 옆으로 지장도량을 지었습니다. 난 꽃의 꽃잎과도 같은 불광산 지형에 건물들이 골고루 자리잡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불교 사대명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불보살님께서 우리들 마음에 계시고 세상이 우리들 마음에 있다고 항상 말합니다. 지금 불광산이 이렇게 지어진 것은 우주에 계신 제불보살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신도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자비광명과 끝없이 흘러나가는 불법의 물길에 함께 심신을 적시게 하여 선열과 법희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불광산에 있는 정토동굴을 구경하고 나온 사람들은 18층 지옥을 보고 두려워하는 얼굴이 아니라 희망으로 충만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광산에서 역대로 거행한 행사에 신도들의 삼보일배의 성지순례 혹은 도량참배 등을 막론하고 이곳에서의 한 끼 밥이나 하룻밤 잠자리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광산이 완성된 이후 불타기념관을 짓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티베트의 많은 린포체들께서 저에게 기증해주신 부처님 치아사리가 크기는 작지만 모실 수 있는 아주 큰 땅이 필요했습니다. 불타기념관을 짓기 위해 빈승도 정부의 도움으로 이러한 좋은 일이 이루어 질수 있는지 바랄 뿐이었습니다.

행정원장(한국의 국무총리와 같음, 역자 주) 소만장(蕭萬長) 선생은 정말 열심히 대만 여러 곳의 몇 군데 땅을 추천해 주었는데 제가 둘러보니 기념관을 지을 수는 있겠지만 주차장 용도로 쓸 수 있는 넓은 땅이 필요했습니다. 주차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는 그 많은 땅에서 함부로 공사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불광산과 잇달아 있는 ‘경천신(擎天神)’ 화약 회사가 위치한 땅은 오스트리아 사람과 대만정부가 합자하여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때마침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땅의 소유권을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 사람이 이 땅을 불광산에 넘겨주고자 했었지만 워낙 넓은 땅이라서 빈승이 이번 생에서 취득할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열정적인 불자들이 자금을 모으고 나서면서 이 땅이 있게 된 것입니다. 토지를 사는 것 이외에도 방대한 건축자금 역시 필요했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부처님께서 사찰 1000곳과 100만명의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주셨으니 대중의 원력이 성을 쌓듯이 다 함께 불타기념관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불타기념관이 완성되어 100대가 넘는 관광버스와 1000대에 가까운 자동차들이 입구 주차장에 정차되어 있는 것을 수시로 보게 되지만 온 가족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다니는 것을 보게 될 때가 가장 기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젊은 자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3대, 4대가 함께 불타기념관을 느긋하게 걸으면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을 빈승은 자주 보았습니다. 불타기념관 앞뒤 좌우에는 무장애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휠체어나 유모차도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불편을 감수할 염려가 없습니다.

또한 좋은 뜻을 가진 많은 인사들이 동참하여 식당을 운영하거나 커피전문점 등을 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븐일레븐, 그랜드하이라이호텔에서 운영하는 채식전문식당, 스타벅스 등등이 있는데 모두들 영업이익 추구에 목적을 두지 않고 방문자의 편의를 위해 영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불타기념관의 발전을 돕게 되었고 참관 방문객의 편의를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불타기념관은 불교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대만 문화교육의 한 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빈승이 불교를 사람들 마음 속과 가정 속으로 끌어들이고 문화교육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 들이게 되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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