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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구니리더] 8. 중앙승가대 교수 본각 스님

“열 수 없는 문은 없다” 다부진 원력으로 비구니연구 초석

 

▲ ‘보살은 일체가 공함을 알지만 보살행을 멈추지 않는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은 정진과 원력으로 일궈온 스님의 행적을 말해주는 듯하다.

흐드러진 벚꽃 시샘하는 봄비 덕분에 도량에 꽃비가 내린다. 일요법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천불설법도량 고양시 금륜사의 오후 풍경은 더 없이 푸근하고 여유롭다. 수화로 설법하는 부처님을 모신 곳, 이 독특한 도량불사를 이룬 스님의 행적 또한 예사롭지 않다.

6남매 출가에 3살에 불연
14살까지 한글도 모른 ‘무학’
묘엄 스님 만난 후 공부 발심

 

“비구니수행관 신축 불사는
부처님 가치로 가능했던 일”

한국비구니연구소 홀로 이끌며
비구니 승가 행적 세계에 알릴
자료정리·연구에 17년째 매진

“나도 출가 할래요.”

3살 막내딸 입에서 나온 대답은 또렷했다. 슬하에 6남매를 둔 모친은 그 길로 신변을 정리했다. 남편이 떠나고, 집안의 기둥처럼 의지했던 장남이 출가의 길을 택한 지 1년 후, 맏딸까지 출가의 뜻을 밝혔다. 더 이상 자식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모친은 남은 5남매 모두에게 출가의 뜻을 물었다. 그렇게 진가(陳家)네 6남매는 모두 출가사문이 되었다.

“고작 3살이었어요. 뭘 알아서 출가하겠다고 했겠어요. 그저 어머니가 ‘출가해서 절에 가 살래? 아니면 친척집에 있을래?’하고 물으니 출가하겠다고 대답 했겠지요.”

성철 스님의 맏상좌로 가장 먼저 출가한 장남 천제 스님에 이어 남은 5남매가 모두 출가했다. 차남 삼소 스님, 장녀 혜근 스님, 차녀 적조 스님, 삼녀 보명 스님(지난해 입적) 그리고 세납 3살에 출가인연을 맺은 막내가 바로 성정본각(性淨本覺) 스님이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 일이다. 삭발염의 하는 날은 아마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렇게 출가수행자가 된 3살 동자승은 중앙승가대 교수가 되어 어느새 정년퇴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 은사 육년 스님은 본각 스님에게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은사다.

△모친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을듯하다.
“절에 왔을 때가 3살이니 출가 전의 기억은 전혀 없다. 맏형인 천제 스님이 출가한 후 모친은  5남매와 함께 당시 인홍 스님이 계시던 태백산 홍제사로 입산하셨다. 한동안은 가족이 그곳에 함께 있었지만 맏언니 혜근 스님을 시작으로 각자 은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모친은 절에 가면 식구들이 함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니 너무 당황하셔서 병이 나셨을 것이다. 출가하려고 ‘성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아 놓고는 입산 3년여 만에 돌아가셨다. 비록 출가를 결심하셨지만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그 심정이 얼마나 황망하셨을지, 내 나이 60이 지나서야 그 심정이 헤아려졌다.”

△은사인 육년 스님이 어머니와 다를 바 없겠다.
“그렇다. 인홍 스님의 권속이었던 육년 스님이 인천 제물포의 수봉산 부용암에 계셨는데 한국전쟁 후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절에서 키우셨다. 워낙 자비롭다고 소문이 나있던 스님이라 인홍 스님께서 그곳으로 보내셨다. 육년 스님은 더 없이 자애로운 분이셨다. 2,30여 명 아이들이 절에서 함께 자랐다. 아동인권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육년 스님은 아이들의 의견 하나하나를 듣고 아이들 입장에서 모든 사안을 처리하셨다. 은사 스님과의 나이 차이가 57살이니 내게는 어머니 그 이상이다.”

△아이들이 많으니 절 집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겠다.
“전쟁 직후라 인천에는 유독 피난민과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시절이었다. 학교는 생각도 못해봤다. 초등학교 다닐 시기를 놓치고 중학교도 못 갔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아이들은 후일 모두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 지나면서 절 살림이 조금씩 나아지자 육년 스님이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셨다. 하지만 나는 이미 중학교에 갈 나이여서 학교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은사 스님께서 학교 가겠냐고 물으시면 싫다고 했다. 워낙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학교 가야겠다는 생각도 못해 봤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무학’이었을 것이다.”

 

세납 14살에 석남사로 갔다. 맏이 천제 스님 덕분이었다. 한글도 모르는 막내가 안쓰러웠던 천제 스님이 석남사에 본각 스님의 공부를 부탁했다. 출가 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불필 스님의 지도로 한글공부부터 시작했다. 산수며 자연이며 초등학교 과정을 모두 석남사 스님들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몇 해 후 묘엄 스님이 운문사강원에 강사로 오자 석남사에서는 도혜, 일철 스님과 함께 본각 스님을 운문사 강원에 보냈다. 대천다리를 놓기 전이라 겨울에 대천강이 얼어버리니 운문사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했다. 동네 거사 두 명이 짐을 나누어지고 가지산을 넘어 운문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 묘엄 스님을 만났다.

 

▲ 본각 스님(맨 왼쪽)을 비롯해 출가수행자의 한 길을 가고 있는 6남매 스님들.

△묘엄 스님의 첫인상은 어땠는가.
“너무 잘 생기셨다. 그리고 멋있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 한 눈에 반했다.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다. 나도 묘엄 스님 같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저 스님처럼 될까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강사스님 거처를 새로 지어 사집반이었던 우리가 묘엄 스님 짐을 옮겨 드리게 됐다. 나는 사집반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렸는데 묘엄 스님께서 ‘너는 어리니 이거나 옮겨라’ 하시며 짐을 주셨다. 뭔가 싶어 슬쩍 열어보니 동국대 졸업장이었다. ‘저 스님처럼 되려면 동국대를 나와야 되겠구나’ 싶었다. 그 순간 동국대가 목표가 됐다. 대학이 뭔지, 무슨 대학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동국대만 가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불이 붙었는데 연이어 사건이 벌어졌다. 강사스님 방 도배를 하는데 당시에는 신문지로 초배를 했다. 절집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고사하고 신문 보기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초배하라고 받은 신문이 신기해 학인들이 강사채에 쭈그리고 앉아 모두 신문 읽기에 정신이 없었다. 나도 초배지로 받은 신문을 읽었는데 그때 읽은 기사 제목이 ‘한글 전용제 도입’이다.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산문 밖 세상은 한글전용으로 변해 가는데 우리는 한문만 배우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동국대를 가야겠다, 세상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학교를 가겠다고 절집을 나서는 일은 사실상 환속. 아니, 환속이라는 말도 몰랐다. 그냥 ‘나쁜 일’이었다. 본각 스님은 차마 묘엄 스님에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혼자 애를 태워도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둘째 언니 적조 스님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결국 천제 스님을 거쳐 성철 스님에게까지 이야기가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천제 스님으로부터 성철 스님이 허락하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묘엄 스님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배우던 ‘선요’를 몇 장 남겨놓고 조용히 운문사를 나왔다.

△묘엄 스님께서 서운해 하지 않으셨나.
“당시에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성철 스님께서 허락 하셨다니 더 할 말이 뭐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나중에 말씀하셨다. 상의 한마디 없이 성철 스님 허락을 받았다며 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무척 서운하셨다고 했다. 그러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묘엄 스님에게 차마 강원을 나가서 세상공부를 하겠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속마음을 한참 후에야 털어놓을 수 있었다.”

△강원을 나왔지만 대학 진학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천 부용암으로 가서 인화여고에 들어갔다. 야간학교였는데 그 당시는 중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입학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육년 스님도 기꺼이 허락해주셨다. 사형 스님 속가 동생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부터는 고등학교 입학이 까다로워졌다. 만약 그때 때를 놓쳤더라면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발 들이는 세속은 만만치 않았다. 공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 한 번도 어색하게 느껴본 적 없던 삭발, 없는 것이 당연한줄 알았던 머리카락이 문제였다. 학교 다니는 비구니스님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귀밑 2cm 단발’에 ‘흰 카라 교복’이 여학생의 상징이던 시절, 삭발한 머리로는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머리를 깎는 것도 다 공부하자는 것인데 머리카락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다면야, 머리카락 있고 없고가 무슨 대수냐.” 은사 스님의 한 마디에 본각 스님은 ‘여고생 진영유(속명)’가 됐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진영유?”하고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해 대답을 못하는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동급생들은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도 했다. 그렇게 3년, 무명초를 짊어진 채 책을 부여잡고 스스로와 싸웠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입학했지만 2학년 때는 장학생이 됐다. 3학년이 되자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 위해 꼬박 10개월을 학원기숙사에 틀어박혀 지냈다. 발이 퉁퉁 부어올라 신발이 들어가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그해 졸업생 가운데 대학입학 예비고사 합격자는 여고생 진영유를 포함해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온 우주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원하던 동국대학에 원서를 썼나.
“아니다. 처음엔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원서를 썼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낙방하고 의기소침해 있는데 천제 스님이 찾아왔다. ‘동국대에 승가학과가 새로 생겼는데 그곳에 입학하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스님이라는 생각을 버려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위해 머리를 길렀지만 환속을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불교 공부는 어차피 평생 할 것이고, 이제 막 시작한 세상 공부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천제 스님에게 말씀드리니 더 이상 권하지 않으셨다. 다만 ‘송충이는 소나무를 먹어야 하니 대학을 갈 것이면 동국대를 가는 것이 좋다’는 성철 스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동국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그렇다면 다시 삭발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1976년 동국대를 졸업한 뒤다. 서양철학을 전공하며 독일유학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갈 방법이 없었다. 졸업 후 그해 가을까지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은사스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너도 시집가고 싶으면 가라. 내가 다른 아이들도 다 가르쳐 시집보냈는데 너라고 못 보낼 것 없다’고 하셨다. 말문이 탁 막혔다. 나는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작 시집갈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다음날 삭발하고 석남사로 향했다.”

은사의 그 한 마디에 무명초도, 고민도 모두 잘려나갔다. 철없던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린 첫 삭발이 인연출가였다면 두 번째 삭발은 태산 같은 자부심으로 선택한 발심출가였다. 다시 돌아온 석남사서 맞은 새벽, 발우공양을 마치고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받아 든 발우 속 퇴수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비췄다. 14살 석남사에 첫 발을 들인 어린 본각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마치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본래 그대로였구나.’ 그날 밤 삼천 배를 올렸다. 밤새 가지산을 휘몰아치던 바람은 어딘가 배어있었을 털끝만한 속진조차 모두 날려 보냈다. 텅 빈 자리에 환희심이 차올랐다.

이듬해인 1977년 봉녕사강원으로 스승 묘엄 스님을 찾아갔다. 마무리하지 못했던 대교과를 마쳤다. 그 후 82년까지 3년간 봉녕사승가대학서 중강을 맡았다. 그토록 존경하던 스승 곁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학인시절의 꿈이 이뤄진 것 같았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강단은 높았다. 오르면 오를수록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일본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사람을 가르쳐 보니 내가 참 무식하게 느껴졌다. 치문반에서는 불교학개론을 가르치고 사집반에서는 히라가와 아키라 선생이 쓴 ‘인도불교사’를 번역해서 가르쳤다. 밤새 번역해서 낮에 가르쳤다. 한 3년을 그렇게 보내니 지치기도 했지만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독학으로 1년간 일어를 공부한 후 무작정 일본으로 갔다. 릿쇼대학서 석사를 마치고 고마자와대학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일본유학 시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나.
“석사과정 마칠 때까지는 한국에 올 때마다 이곳저곳 인사 다니며 받은 돈을 모아 학비에 보탰다. 말이 인사지 학비를 얻으러 다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박사과정에 들어가니 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가능한 장학금은 전부 신청해 놓고 기도했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학업을 중단해야할 상황이었다. 두 달여를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기도가 이뤄졌다. 사립장학금으로는 가장 액수가 컸던 로터리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돈으로 4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로터리장학증서를 은사스님 사진과 나란히 걸어두고 있다.”

△고마자와대학에서는 화엄학을 전공했다. 화엄의 매력은 무엇인가.
“일생을 해도 다 못하고 남을 것을 찾다 만난 것이 화엄이었다. 처음에는 무궁무진한 ‘화엄경’의 세계가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가르침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더욱 환희심을 느끼게 됐다. 특히 ‘무진등’과 ‘뱃상공의 비유’는 평생의 의지처다. 하나의 등불로 무한히 많은 등불을 켤 수 있지만 불씨를 나누고 나누어도 하나의 등불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무진등’의 가르침은 보살도의 참뜻이다. 하나의 등불을 켜는 순간, 천년을 이어져온 어둠이라도 일순간에 사라지니 우리의 마음도 무진등이다. 또한 뱃사공은 고통 받는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데려다 주지만 뱃사공 자신은 피안에 머물지 않고 다시 배를 돌려 고통 받는 중생에게로 돌아온다. 차안에도 피안에도, 심지어는 그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보살은 일체가 공한 줄 알지만 일체 복덕을 닦는다’는 가르침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일체가 공함을 안다고 해서 손 놓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어떤 것도 집착할 것이 없는 줄 알지만 모든 부처님을 존중하고 모든 복덕을 닦는다는 것이 화엄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평생 화엄경을 읽고 또 읽어도 좋은 이유다.”

△박사과정을 마치기까지 승가대학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것인가.
“사실 승가대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였던 가을, 일이 있어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조카상좌를 따라 처음 승가대를 가봤다. 당시 승가대는 안암동에 있었는데 조카상좌가 이왕 왔으니 학장스님에게 인사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당시 학장이었던 혜성 스님을 찾아가 ‘인천 부용암에 있는 본각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리고는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학장 스님이 한참 후에야 ‘뭐 하는 학인이요’라고 묻는데 그 순간 ‘저 일본서 유학 중인데 내년에 학위 받고 들어옵니다. 나중에 대학에 강의 하나 주세요’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처음 뵙는 스님에게 하는 말이 제법 당돌했는지, 스님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것저것 물었다. 마침 해주 스님이 동국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화엄경 강의할 사람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내 전공이 화엄 아닌가. 이듬해인 91년 봄부터 승가대학서 화엄경과 동양철학 강의를 시작했다.”

14살이 되도록 한글도 몰랐던 본각 스님은 마침내 교수가 됐다. 마치 약속이라도 돼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스님에게 기회는 늘 한 번 뿐이었다. 그 한 번의 기회조차 언제나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처지에 대학가겠다는 꿈을 꾸었고, 강원 입학도 하늘의 별따기 같던 시절 여고진학을 소망했다. 대학도, 유학, 교수도 모두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었다. 하지만 고작 열 몇 살, 스물 몇 살에 불과했던 본각 스님은 열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문을 두드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문이 없으면 만들었다. 하나의 등불을 켜는 순간 천년의 어둠이라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듯, 일체가 공함을 알지만 복덕행을 멈추지 않듯, 화엄의 가르침처럼 본각 스님은 등불을 밝히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 될 것 같은 일이지만 도전하는데 망설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본각 스님은 “오직 주변의 선연(善緣)과 기도의 도움이었다”고 공덕을 돌린다.

교수로 첫 발을 디딘 안암동 중앙승가대학은 허름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그 해 4월에는 중앙승가대 부속 보타사의 주지 겸 비구니수행관장 소임까지 맡게 됐다. 38만6000여원을 인수받은 후 개운사에서 지원해준 보조금300만원을 들고 보타사 소임을 시작했다.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학인스님들은 ‘방바닥이 차가워 뼈골이 쑤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보일러를 고치고 텅 비어있던 연료통에 기름을 채웠다. 밀려있던 공양주보살 월급까지 주고 나니 남은 돈은 만 원짜리 몇 장이 고작이었다. 매달릴 곳은 부처님뿐이었다.

△비구니수행관을 새로 지은 것이 이즈음이다.
“수행관을 새로 짓는 것은 고사하고 운영조차 막막했다. 보타사 마애부처님 앞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내 나이 세 살에 불연을 맺어 지금껏 부처님 회상에서 나를 키우셨으니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처님께 물었다. 남들은 내가 유학마치고 돌아와 동국대학에 채용되지도 못하고 중앙승가대 수렁에 빠졌다고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혹 수렁에 빠졌더라도 부처님이 건져주셔야할 것 아니냐고. 그렇게 떼쓰듯이 기도를 하고 나니 답답하던 속이 후련해졌다. 그리고는 앞뒤로 9년간 수행관장을 했다. 보타사에서 1년을 지나고 나니 학인들이 무공해 비누를 팔아 만든 돈이라며 74만원을 갖고 와서는 비구니수행관을 새로 지어달라고 했다. 그 정성을 외면할 수 없어 화주를 했다. 1억4000만 원이 모였을 때 비구니수행관을 허물고 땅 파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94년 종단개혁이 시작됐다. 조계사 승려대회에 동참했던 학인들이 줄줄이 경찰서로 잡혀가고 비구니수행관 불사에는 아무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완공을 했나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다시 기도했다. 비구니수행관 불사만 무사히 회향할 수 있다면 평생 내 개인 소원은 절대 부탁 안하겠다고 부처님께 약속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나니 불교방송에서 경전강의 방송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왠지 부처님의 대답 같았다. 종단개혁으로 강의가 중단된 며칠 동안 강의 교재를 만들어 방송강의를 시작했다. 틈틈이 방송을 통해 비구니수행관 불사를 알렸다. 그런데 그 4개월 동안 1000원부터 1억 원까지 후원금이 답지했다. 부처님 가피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 도움으로 무사히 고비를 넘기고 1995년 3월 비구니수행관이 준공됐다.”

1994년 종단개혁은 본각 스님을 종단행정의 한 복판으로 불러들였다. 개혁회의의원이 된 본각 스님은 종헌종법의 비구니 차별조항 개정을 요구했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남녀평등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훗날 불교가 가장 뒤처지는 종교가 될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개혁회의 법안이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총무원장을 ‘비구’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승려’로 바꿔야 합니다.”

본각 스님의 강한 어조에 개혁회의에서는 논란이 커졌지만 결국 달라진 것은 없었다. 비구니스님들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개혁회의 뒤를 이어 종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종헌종법개정소위원회에 들어간 본각 스님은 ‘비구니의 법계는 율장에 준한다’는 종법을 ‘비구에 준한다’로 고치는 것을 관철시켰다. 이 개정 덕분에 2003년 종단 최초로 총무원에 비구니부장이 임명될 당시 제기됐던 법계 문제는 종법상 아무런 하자 없이 처리될 수 있었다.

△종단 내 비구·비구니 차별의 관습을 해소할 방법은 없는가.
“비구·비구니의 평등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되찾는 일이다. 비구와 비구니의 대립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 평등 요구는 이미 지난 세기의 과제였다. 이제는 비구니가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때이다. 비구니가 아니라 불교가 힘을 얻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불교가 어떻게 접근하고 인식돼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17년째 혼자 힘으로 운영하고 있는 한국비구니연구소 또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비구니의 뿌리를 찾고 역사를 밝히며 오늘을 기록하는 것. 비구니 스스로의 위상을 넓히는 길이자 세상을 향해 한국 비구니의 오늘을 알리는 첫 걸음이다. 1999년 대한매일신문사의 요청으로 시작한 비구니 자료 취합과 연구는 본각 스님에게 또 하나의 대작불사가 되었다. 2000년 중앙승가대가 김포로 이전하며 정식으로 간판을 달았지만 한국비구니연구소는 지금까지도 중앙승가대 내의 정식 연구소가 아니다. “비구 연구소도 없는데 비구니 연구가 웬 말”이냐는 비구스님들의 냉소적인 시선은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노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본각 스님의 원력과 학인스님들의 동참은 2003년 ‘비구니와 여성불교’를 필두로 지난해 9월 발간된 ‘신문 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자료집(2007~2012)’까지 총 24권의 비구니 자료집 발간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500여 명에 달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담 녹취자료가 그 뒤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방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

△ 한국비구니 연구의 후속 계획은.
“이미 발간한 ‘한국비구니수행담록’ 3권과 명감 1권은 지금까지 인터뷰한 비구니스님들 500여 명의 기록이다. 하지만 전체비구니에 비하면 일부일 뿐이다. 앞으로 기록·정리해야할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담록이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풀어야할 숙제지만 여력이 부족함을 느낀다. 내년에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비구니연구소를 학교에 짐처럼 남겨두는 것도 고민이다. 연구소의 위상 정리와 후속 작업 등을 모두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데, 아직은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 일은 많고 시간, 인력, 재정은 늘 부족하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일단 내년 초에 정년퇴임을 하면 시간은 좀 생기지 않겠는가. 솔직히 퇴임이 기다려진다.”

△비구니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한국불교에 비구니승단이 있고 계맥이 이어져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만큼 한국 비구니승가에 대한 외국의 관심도 높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역사와 현재를 알고자 할 때 그들에게 보여줄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한국불교계에 어떤 비구니가 있었고 어떻게 계맥이 이어졌으며 오늘날 비구니스님들은 어떻게 수행하고 전법하며 세상과 소통하는지 정리된 기록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선대 비구니의 역사와 발자취를 후대에 알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승가대학은 강원과 달리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공부하는 곳이다. 비구·비구니를 함께 교육하며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
“비구와 비구니가 평등하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 평등의 시작은 서로간의 예의다. 비구스님을 존중하지만 비구스님 또한 존중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중앙승가대서 가장 강조하는 것도 비구와 비구니 간의 예의다.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행동하며 정의로운 신뢰관계를 갖춰야 종단 전체가 존중받을 수 있다. 중앙승가대의 학인들이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태도를 몸에 익힌다면 종단의 미래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불교에는 오직 청정한 승가가 있다는 점이다. 불교는 권력도, 조직도, 돈도 없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청정한 승가가 있을 뿐이다. 돈에 찌든 사람, 권력에 짓눌린 사람은 절대 누릴 수 없는 청정한 기운이 승가의 힘이니 그것을 지켜야 한다. 스님들이 지금도 삭발염의 하는 것은 그러한 청정함을 지키겠다는 의지다.”

△어떤 학자로 기억되고 싶은가.
“부처님의 말씀에 부처님의 마음을 담아서 전달한 학자로 먼저 기억되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할 말은 정확히 한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위의를 갖추고 원칙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잔소리를 많이 했다. 그 잔소리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요즘 본각 스님은 어느 때 보다도 바쁜 일상을 보낸다. 금륜사 불사를 시작한 후로 주중엔 학교, 주말엔 사찰에 온 시간을 쏟아 붓는다. 4년 전 처음 인연을 맺은 인근 권율부대의 군법당법회를 3년 전부터는 도맡아 진행하고 있다. 매주 80~90여 명의 장병들을 위해 법회와 간식을 준비한다. 신도들과 사중 스님들이 총동원되지만 스님은 금륜사 창건 후 가장 큰 보람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이것도 인재불사라는 생각 때문이다. 지난 1994년 보타사서 처음 시작해 올해 21년째 이어오는 화엄장학회도 본각 스님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불사다. 불교방송 경전 강의를 듣고 보타사를 찾아온 불자들에게 ‘화엄경’을 강의하며 수강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보시금을 학인이었던 보타사 부전 스님에게 장학금으로 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로 계속된 화엄장학회는 43회가 이어지는 동안 총 511명에 3억1300만여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금도 6개월 동안 회원들이 모은 보시금 전액을 중앙승가대 학인과 대학원생, 일반대학생, 어린이 청소년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한다. 또 본각 스님은 2002년 인연을 맺고 2004년에 8차 대회를 한국서 개최한 세계여성불자대회(샤카디타) 공동대표를 다시 맡았다. 세계의 여성불자들에게 한국의 비구니승가를 자랑하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좀처럼 한가한 시간이 없어 보인다. 연구나 수행에 전념할 시간이 있는가.
“사실은 이번 한 생에 여덟 생을 한꺼번에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천에서의 동자승 시절을 시작으로 석남사, 운문사, 고등학교, 대학교, 강원 중강, 일본유학, 승가대 교수, 금륜사 불사까지 그야말로 전혀 다르게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아마 아홉 번째 즈음 되는 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각각의 모습이 다를 뿐이다. 서로 다르다 생각하고 힘들어할 것이 아니다. 살아오며 마주친 어려움과 역경계들이 모두 나를 성장시키고 담금질하는 스승이자 도량이 되었다.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그 어느 하나 수행이 아니었던 것이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가르침은 추상적인 의미의 공이 아니다. 오직 공한 것을 실천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평생 마음에 품고 있는 화두같은 것인가.
“나에게는 ‘공’이 화두다. 어떤 어려움, 역경계라도 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비어버리고 놓아버림이다. 그렇게 살다보니 ‘공’이라는 가르침이 화두 대신 들렸다. 어려운 상황이나 곤란한 인간관계에 걸리다가도 이 모든 것이 또한 공임을 떠올리면 길이 보인다.”

요즘 본각 스님의 작은 희망은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평생 학교와 사찰을 오가다 보니 마음 편히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숨 가쁜 길이었지만 후회한 적도 없다.

“무학의 수행자로 정진했다면, 그 한 생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이생에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었겠는가?” 되묻는 본각 스님은 “하나라도 마무리 할 수 있는 정년이 다가와서 감사할 뿐”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정년퇴임은 결코 끝이 아니다. 닫혀 있는 문을 열며 한발 한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며 정진해 온 스님에게는 또 하나의 문이 열릴 준비를 하고 있음이다. 그 문 뒤에 비구니연구의 도약이, 21세기 화엄학의 눈부신 변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토록 해보고 싶은 ‘기약 없는 여행’은 어쩌면 당분간 힘들 수도 있겠다.

문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는 한 스님에게는 열 번째, 열한 번째 그리고 그 이상의 생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차안에도 피안에도 그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 뱃사공의 나룻배는 오늘도 부지런히 강을 오간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원칙 강조 엄격하지만 진심 담겼기에 감복

내가 본 본각 스님

 

▲ 1965년 8월15일 석남사서 능엄법회 수료 후. 동그라미 안이 당시 세납 14살의 본각 스님이다.

중앙승가대 대학원장 보각 스님=학자의 역량 못지않게 수행과 실천을 갖추신 분이다. 학인들에게 엄하게 대하시지만 학인들이 기꺼이 그 뜻을 따르는 것은 실천이 겸비된 수행자에게서 나오는 힘이다. 본인의 생활이나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다면 그처럼 당당한 모습이 우러나올 수 없다. 본각 스님의 정년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어떤 교수의 퇴임 때보다 더 서운하게 느껴진다.

전국비구니회 경기북부지회장 능인 스님(의정부 석림사 주지)=수십 년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한 결 같이 언행이 일치한다. 수행자로서 흐트러진 모습이 없으니 빈틈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의외로 유머감각도 좋다. 다만 농담을 즐기거나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없을 뿐이다. 쉬는 모습을 볼 때는 학회 때문에 해외 출장 가는 비행기 안이 고작일 정도다.

강형진 니르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장=우리 절은 내게 친정과도 같다. 스님이 어머니나 언니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신도들에게는 늘 따뜻하게 대해주신다. 그런데 그 속에 간절함과 엄격함이 함께 들어있다. 한 번도 권위적으로 말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시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진심과 간절함 때문에 저절로 그 말씀을 따르게 된다. 어려운 단어나 유창한 법문을 하시지 않지만 말씀에서 느껴지는 솔직함과 평소 보여주는 스님의 흐트러짐 없는 행동이 하나로 일치돼 그 어떤 법문보다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1340호 / 2016년 4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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