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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불행

기자명 김용규

허락된 시간만큼 머물다 갈 뿐 진정한 소유란 없어

숲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 더러 ‘당신이 소유한 숲과 농토가 몇 평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찾기가 어려워 곤란한 마음이 되곤 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나는 저 숲과 농토를 나의 소유라고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저 잠시 내게 허락된 시간만큼만 이 공간에 머물다 떠나게 될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진정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등기부등본에 기록된 면적의 수치로 소유를 말하지만 기실 진정한 소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긴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대부분 누군가의 무덤 자리였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대략 46억년 지구 역사 속에 생명이 존재한 36억년의 세월 동안 내가 소유했다고 믿는 이 자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다른 생명들이 머물렀겠는가? 우리 각자의 터전은 한 때 공룡이 살았을 수도 있고 스라소니나 호랑이, 늑대나 여우가 살다가 사라진 땅일수도 있다. 또 앞서 온 사람들이 살고 죽었을 땅이다. 땅을 빼앗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묻혔을 땅이었겠는가? 무덤 자리 아닌 곳이 없을 만큼 무수한 사람과 생명들이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자리에 살았고 또 묻혔을 것이다.

더 멀리보고 더 깊게 보면 소유는 인간 영역 바깥의 차원이다. 차라리 그것은 지구의 것이요, 나아가 우주의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과 인류가 겪는 비극의 대부분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에서 연유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누군가가 머물고 있는 저 땅을 갖겠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 지구 어느 땅도 가릴 것 없이 소유에 대한 착각이 인간과 생명과 영혼을 파괴했다. 땅 만이 아니다. 권력 역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다른 이름은 더 나은 세계를 이루고 이끌기 위해 잠시 맡겨지는 의무와 책임에 불과하다. 권력을 소유와 쟁취의 개념으로 착각한 이들 역시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과 생명과 영혼을 파괴해 왔다.

내가 낳은 아이 역시 나의 소유일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아이는 다만 내 몸을 빌려서 찾아온 귀하디 귀한 인연이다. 이 인연을 소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자신의 뜻대로 디자인하려 하고 그 디자인대로 살아주기를 바란다.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내가 나누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모든 나무와 풀이 꽃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면 저마다 자신의 꽃을 피웁니다. 이제 여기 다섯 종류의 꽃이 있다고 칩시다. 냉이와 민들레와 수선화, 장미와 국화가 그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이 계절에 가장 비싼 꽃은 어떤 꽃일까요? 아마도 가장 구하기 어려운 꽃이 국화일 테니 국화가 가장 비쌀 것입니다. 나무나 풀도 제 꽃을 피우는 존재이니 나의 아이에게도 피어날 꽃이 있다고 믿습니까?’ 대부분의 부모들은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다섯 종류의 꽃 중에서 어떤 꽃으로 내 아이가 피어나기를 바랍니까?’ 용감하고 솔직한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국화’로 피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귀하게 대접받는 꽃이 국화이므로 자신의 아이가 그렇게 피어나는 꽃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어떤 부모는 ‘민들레가 자유로운 꽃이니 민들레’로 피기를, 다른 어떤 부모는 ‘사계절 주목을 끄는 장미로’ 피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렇게 일으킨 부모의 상이 아이를 시들게 한다. 냉이더러 국화로 피라하면 그 냉이는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민들레더러 장미가 되라하면 그 민들레는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훌륭한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봐 주고 물어봐 준다. “너는 어떤 꽃이니? 냉이니, 수선화니, 장미니?”

숲의 세계에는 소유가 없다. ‘지금 저 눈부신 꽃 피우고 있는 산벚나무는 이 숲의 몇 평을 소유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밤 숲의 적막에 노래를 흐르게 하는 저 부엉이가 얼마의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부모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새는 단 한 마리도 없고, 제 발 아래 씨앗이 싹터 부모 그늘에 비실거리는 것을 바라는 나무는 없다. 나는 제 살던 자리를 상속하겠다는 나무나 풀을 본적도 없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데 우리의 불행이 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40호 / 2016년 4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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