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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어둔 밤, 동동 떠 있는 연등을 바라보며

기자명 이미령

가장 큰 연등 꼬리표에 약자들 이름 담기길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안녕하세요. 봄의 한가운데로 쑥 들어와서인지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편지에 꽃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꽃을 지금처럼 많이 이야기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예요. 꽃 이야기에 슬그머니 싫증이 나서 눈을 들어 창밖으로 눈길을 던집니다. 하지만 그곳에 역시 꽃이 있네요.

퇴근길 지친 세상 사람들
위로해 주는 거리의 연등은
저렴하고 흔한 플라스틱등
힘없는 이들 곁의 불교 돼야

지난번 답장에 쓰여 있던 스님의 생각, 잘 읽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봄꽃의 정확한 이름이나 원산지, 식물학적 계통은 알지 못해도(중략) 꽃에 대한 알음알이보다 꽃을 꽃으로 보고 아름다운 시 한 구절 써보는 일이 꽃을 더 본질적으로 아는 일이 아닐까요?”라고 말씀하셨지요. 같은 생각입니다. 꽃을 보고 그 계통이나 학명을 따지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꽃에서 우리를 더 멀어지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상은 꽃의 계통을 따져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야 그 꽃을 잘 보호하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꽃이 훼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작은 것들이 그 자체로 살아내기에 너무 힘든 곳입니다. 강자가 짓밟고 뭉개기 일쑤이지요. 게다가 영원한 강자라는 것도 없으니 언제든 더 큰 임자를 만나면 무너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짓밟혀서 흔적조차 없어질 수도 있는 꽃들이 보호받고 유지되려면 우리는 그 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꽃을, 다른 꽃이 아닌 바로 그 꽃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버려야 할 알음알이는 그런 꽃들의 식물학적 계통에 대한 앎이 아니겠지요. 내게 이로우면 점수를 더 주고 내 것으로 만들고, 내 오감에 흡족하지 않으면 밀쳐내고 뭉개려는 마음, 어떤 존재를 그 자체로 귀히 여기지 않고 자꾸 이론을 붙이는 바람에 어느 사이 이론에 묻혀 그 존재를 보지 못하게 되는 편협한 관점이야말로 버려야 할 알음알이가 아닐까요? 심지어 세속에 살면서 지해와 지혜를 자꾸 갈라서, 지해는 버리고 지혜를 구하라고 하는 것 또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분별심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세속에는 세속의 앎이 필요하고, 그런 세속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 중생들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것이 세상의 종교, 출세간의 세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알음알이를 버려라, 분별심을 버리라고 하기 보다는,
잘 알아보십시오.
제대로 아십시오.
잘 분별하십시오.
정확하게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지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스님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고도 저는 짐작합니다. 말이란 것이 하면 할수록 오해가 쌓일 수 있고, 부연설명이 자꾸 필요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 엇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니까요.

스님,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절에서는 연등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스님 계신 곳에서도 그렇겠지요? 참 좋은 계절에 부처님이 오셔서 정말 좋습니다.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눈을 홀리던 꽃들이 총총 빈 가지만 남기고 떠나가면, 그 자리에 초록의 물이 오릅니다.

이 ‘물이 오른다’는 말. 무엇인가 강제하여 뺏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를 지키며 세상에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초록은 그렇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도 그 초록에 실려 우리에게 옵니다. 연두빛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설레는 이 햇초록의 계절에 절집안에서 고운 빛깔의 연등이 하나씩 내걸리는 요즘, 저는 이 계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연등은 절 밖으로 나와 도로가에도 내걸립니다. 한낮이야 등이 달려있다는 걸 그리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마지막 남은 기운마저 탈탈 털린 뒤 헐렁한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 어둠 속에 동동 떠서 발갛게 빛을 내는 연등을 만나면 이따금 눈물이 핑 돌기도 합니다. 제게 이렇게 말을 걸어주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았지? 네 몫의 삶을 온전히 다 살고 돌아오는 길이지? 그런 너를 위해 난 네 앞의 어둠을 밝혀줄게.”

밤거리를 밝히는 연등은 힘들게 비벼서 붙이는 종이등이 아닙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플라스틱등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나는 등,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섰다가 해가 지고도 한참을 더 지나 캄캄한 길을 달려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마중하는 등은 바로 이 플라스틱등입니다.

초파일에 가장 크고 화려한 연등은 대웅전 부처님 바로 앞에 내걸립니다. 그 연등은 값도 만만치 않아서 절에 크게 시주한 사람이거나 저명인사가 아니면 웬만한 불자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이따금 그런 크고 멋진 연등과 그 연등에 달린 이름표를 볼 때면 많이 가진 자가 부처님 앞에 설 수 있는 특권을 얻는 것 같아서 언짢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중생이야 그런 우세로 사는 보람을 느끼지만 부처님은 그러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에게는 당신의 코앞에 내걸린 고운 종이 연등이나 거리에 내걸린 플라스틱등이나 다 한결같은 등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파일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가난한 할머니의 등불이야기가 바로 이럴 때 떠올려야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을 찾아와 뵙고 법문을 들으며 저마다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등불을 밝힌 사람들, 그들이 돌아간 뒤 부처님께서 목련을 불러 이르셨지요.

“목련아, 밤이 깊었구나. 가람의 등불들을 끌 시간이구나.”

목련 존자는 부지런히 가람에 켜져 있는 등불을 껐지만, 아무리 손바람을 불러 일으켜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할머니가 자신이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밝힌,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등불이었지요.

저는 길가에 높이 내걸린 저 플라스틱 등이나, 당일에만 불 밝혔다가 버려지는 종이컵등에서 그 할머니의 등불을 보게 됩니다. 그 등불이 캄캄한 승가를 지켜주고, 무명의 긴 잠에 빠진 세상을 밝혀주고, 경쟁과 소외에 사나워진 마음을 덥혀줄 것입니다.

모쪼록 이번 부처님오신날, 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연등의 꼬리표에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들의 이름이 담기기를 바랍니다. 불교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일 테니까요.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41호 / 2016년 4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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