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가야산 소리길-농산정-길상암-해인사
33. 가야산 소리길-농산정-길상암-해인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6.05.0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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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산으로 들어 가 마음 심자를 얻다

▲ 해인사 일주문서 봉황문으로 길게 뻗은 길은 고즈넉하면서도 모든 번뇌를 끊어 버리는 힘이 배어 있다.

진달래가 떨군 꽃잎 서너 장이 가야천 물길 따라 내려오고 있다. 저 꽃잎 흘러 온 길 따라 오르면 가을 단풍을 그대로 담고 흘러 물마저 붉게 변한다는 홍류동 계곡이다. 가야천과 홍류동 계곡이 이어져 생성된 길, 마을과 산사의 인연이 닿은 길 ‘소리길’이다. 우주 만물이 소통하고, 자연이 교감하며 내는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는 길이다.

가야천·홍류동 계곡 이어지고
마을과 산사 인연 닿은 소리길
만물 소통·생명의 소리 들려줘

치인리는 최치원 이름 딴 지명
그의 책에 해인사 창건기 전해

일주문 지나 사천왕문 향한 길
망상·탐욕 한조각 허용 않는 곳
이젠 ‘해인총림 길’이라 부르리


1100여년 전 최치원은 스스로 고운(孤雲)이라 하고는 가족들과 함께 이 길에 들어섰다. 최치원이 머문 마을이라 해서 ‘치원촌(致遠村)’이라 했는데 훗날 ‘치인촌’이 되고, 촌이 리로 바뀌며 ‘치인리’가 되었다. 가야천과 홍류동, 그리고 해인사가 자리한 이 지역 일대가 치인리다.

12살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 가 18살에 외국인 상대 과거시험이었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던 사람. 당나라 때 발생한 민란 ‘황소(黃巢)의 난’ 때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려 보낸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이어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땅속 귀신들도 처치할 것을 의논했다”라는 대목에서 황소는 저도 모르게 꿇어 엎드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 고운 최치원이 책을 보았던 농산정에도 봄이 왔다.

29살에 귀국 했으나 쇠락해 가는 신라의 국운과 함께 비운을 맞는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라는 개혁정책을 건의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수용되지 않았는데, 따지고 보면 개혁정책을 폈어도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을 듯싶다. 이미 양길, 궁예, 견훤 지방 호족들이 궐기해 자신이 누릴 땅을 확보해 가고 있었고, 중앙정부가 무너지며 이미 후삼국 시대가 열리고 있었지 않았나. 효공왕 즉위 4년 즈음엔 신라의 영역은 경주 땅 정도였다. 그는 신라의 사회상황을 이렇게 토로했다 “선현들의 가르침도 무시하고, 법장 스님이 전한 ‘연기법’도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잠깐. 유불도에 정통했던 최치원. 사회상을 비판하는 데 있어 그는 왜 중국의 화엄3조 법장을 시대의 사표로 등장시켰을까? 

최치원이 머물렀던 정자 농산정에도 봄이 찾아왔다. 짙은 라일락 향기 사이로 피어 난 철쭉도 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 앞을 힘차게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 청량하다. 더 이상 정치에 미련 둘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최치원은 900년께 제 스스로 은둔을 택하며 가야산으로 들어온다. 그 때 지은 시 한 편이 ‘최치원 은둔시’라 불리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 소리길서 만난 길상암이다. 벼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듯하다.

“첩첩이 쌓인 바위계곡을 굽이치며 온 산을 뒤흔드는 물소리에/ 지척에서도 사람들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다/ 항시 어지러운 시비가 두려워/ 흐르는 물길로 산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노라.”(광분첩석후중만 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 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 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 故敎流水盡籠山)‘

‘농산정’은 저 시 마지막 시어 ‘농산’에서 비롯됐다. 농산정서 글을 읽다 지인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바둑을 두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렸던 최치원. 그러나 그가 붓마저 놓은 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해인사가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됐다는 기록 밖에 없다. 그러나 최치원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량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는 창건 과정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해인사 불사를 주도한 인물은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다. 순응은 의상의 10대 제장 중 한 사람인 신림의 제자다. 8세기 중엽 부석사 화엄학풍을 크게 일으킨 인물인데 1000여명을 상대로 균여대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를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순응의 제자가 바로 이정이다. 선승이었지만 은사가 화엄의 대가였으니 그 또한 화엄에 밝았을 것이다. 최치원이 있었기에 우리는 해인사가 화엄도량이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가 머문 연못. 목어와 연관된 일화도 담겨 있다.

정계 활동 당시 ‘화엄결사회원문’을 지었던 그는 화엄도량 해인사에 들어서며 화엄학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쓴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등의 해인사 관련 글 3편과 함께 화엄 관련 글 4편이 방증하고 있다. 그는 또한 법장의 스승이요 중국 화엄의 2조인 지엄 화상을 기리는 기원문과 해동 초조 의상 스님의 재일 때 쓰일 축원문도 지었다. 그의 화엄 관련 글을 관통하는 게 있다. 신라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신라의 혼돈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법장을 내세우며 신라를 비판한 데서 신라 말기의 혼란과 국운을 원융무애의 화엄사상으로 다잡아 보려 했던 그의 의중이 엿보인다. 

평평한 작은 돌 조각들이 산길에 늘어서 있다. 그 조각들을 이어 보았다. “홀로 외로이 너의 사유를 바라본다. 더 조심스러운 생각 다시, 다시, 다시 마주할 때까지.” “이 곳으로부터 떠나고 싶다. 가끔은 나를 멀리 멀리 볼 수 있는 곳으로.” 글 새긴 석판 있으니 풍광에만 마음 뺏기지 않고 발아래도 내려 볼 수 있다. 눈길 닿은 그 곳에 오늘 걸어야 할 길이 있다.

▲ 이른 봄날의 아침을 맞은 해인사 대적광전 앞 전경.

작은 연못에 징검다리와 함께 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그 데크 중앙엔 나무 한 그루 심어져 있다. 징검다리로 쓰인 돌 하나하나에도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건 뭐지? 길가 안내판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 등에 나무가 자라 바람 불 때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는 그 물고기다. 훗날 전생의 스승이 천도재를 열어 고기 몸을 벗게 해 주었다지. 등에 난 나무로 고기모양의 목어를 만들었고, 그 목어를 축소한 게 지금의 목탁이라고 했다. 연못 속 목어는 법을 얻어 제 스스로 고기 몸을 벗어 보려는 듯 머리를 가야산으로 두었다.  

해인사 일주문 지나 봉황문을 향해 길게 쭉 뻗은 길! 사소한 망상 하나도 허용치 않는 길이다. 일말의 탐욕 한 조각도 용서치 않는 길이다. 그렇게, 힘 있게 쭉 뻗은 길이다. 곡선의 길이 아름답다 하지만 해인총림으로 가는 이 길 만큼은 곡선이 아닌 직선이어야 한다. ‘소리 길’에서 떼어 놓아야겠다. 오늘부터 이 길을 나그네는 ‘해인총림 길’로 부른다.

▲ 5천여만자를 품고 있는 장경판전서 어떤 글자, 어떤 글귀를 얻어 갈 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해인사 장경판전이다! 경율론 삼장이 새겨진 이 대장경의 총 판수는 8만1350매. 그렇기에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 대장경에 새겨진 글자는 총 52,389,400자. 최치원에게 한 자 더 새겨보라 했다면 무엇을 새길까? 선지식들은 일렀다. 5천여만자의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에 넣는다면 그 한 자는 마음 심(心)이라고!

장경판전서 풍광을 둘러보니 가야산의 웅대함이 새롭게 다가온다. 최치원이 1천여년 전 전한 소리가 봄날의 꽃향기 사이로 들리어온다.

“대경(大經)에 이르기를 세간 또는 출세간의 모든 선근은 최승(最勝)의 땅 신라의 대지서 생긴다고 하였다. 석가모니가 법을 일으킨 곳이 바라시(波羅提, 바라나시, 녹야원)이고, 도를 이룬 곳이 가야(伽倻, 부다가야)다. 그러하기에 국호를 신라(新羅)라 하고, 산을 가야(伽倻)라 했다.”

목어는 어디쯤 와 있나!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소리길 주차장. 각사교를 건너가면 소리길 입구다. 가야천을 끼고 길게 난 마을길을 따라가면 숲에 이른다. 한 예술가가 바위에 새긴 부처님과 조우한 후 조금 더 걸으면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와 만난다. 해인사 매표소를 지나면 가야천은 홍류동 계곡으로 그 이름을 바꾼다. 최치원이 머물렀던 농산정을 지나면 길가서 200m 거리에 자리한 길상암이다. 해인사 통제소로 가면 찻길. 영산교까지 올라 가 해인사 성보박물관을 들러 본 후 해인사로 가면 된다. 총 거리는 7.2Km이고 소요시간은 약 2시간 40분. 해인사 버스정류장서 버스를 이용 하면 대장경 테마파크서 내릴 수 있다. 여기서 소리길 주차장까지는 3분 거리.

 

이것만은 꼭!

 
장경판전: 고려대장경, 즉 8만대장경이 보관 돼 있는 판전이다. 처음엔 강화도 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로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대대비로전: 원래 해인사 대적광전(보물 1779호)과 법보전에 있었던 두 비로자나불좌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특히 비로자나불은 크기나 착의법, 표현양식이 거의 동일해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으로 불린다. 그러나 나무 속을 파내는 제작기법이 달라 제작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학사대 전나무: 고운 최치원이 해인사에 입산할 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는데 이것이 자라 전나무가 됐다고 한다. 최치원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한림학사(翰林學士) 벼슬을 지낸 바 있다. 따라서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을 ‘학사대(學士臺)’라 이름한 것으로 추측된다. 천연기념물 제541호다.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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