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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연등의 크기에 대하여

기자명 성원 스님

비싸고 큰 등이 더 간절한 것은 아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오월은 인생 어느 때나 설렘의 계절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어린이날이 있어 오월이 오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자신의 전부 담은 빈자일등은
절대적 크기 떠난 마음의 표현
눈에 보이는 모습 기준 삼으면
풀지 못할 일 너무 많아져

대학시절 오월은 젊음을 아픔 속에서 분노의 열정으로 들끓게 하곤 했습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를 노래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던 기억들이 싱그럽게 다가옵니다.

신록의 계절 오월이 곁에 왔습니다.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부러워할 새도 없이 나 자신도 신록을 향한 그리움으로 오월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오월은 천하에 새 생명의 신록과 만화(滿花)가 방창한 계절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지침을 온통 설렘으로 바꾸어 놓으신 성자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신 날이 가까워진다는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워 온 도량을 장엄하고 마음껏 뽐내고 싶은 마음인데 큰 등 작은 등, 부처님 가까운 등 먼 등으로 맘 상해하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네요.

가끔 빈여일등(貧女一燈)의 의미를 저도 생각해 봅니다. 이번 편지를 읽으면서 바라보는 견해는 약간의 차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인의 등이 단지 작은 등이라서 아름다웠을까요?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하나의 등불이 아니라 그 한 개의 등조차 공양할 수 없었던 여인은 자신의 전부를 담아 올린 등불이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물질의 다소(多少)를 부러워도 하지만, 때로는 물질로서 마음의 진정성과 깊이를 측량하기도 한답니다.

아무리 작은 등불이라도 자신의 마음과 의미를 다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자신의 마음을 온통 담기에 알맞다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의 양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라 하는 재벌의 회장님이 우리 약천사에 1만원짜리 등을 올리면서 온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있을까요?

부처님은 물질의 절대적 양을 따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늘 신도들의 안위와 소원을 축원하는 저도 또한 그리 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가난한 그 여인은 자신이 가진 전부, 아니 가진 것이 너무나 없어 등불 하나 올릴 수 없는 아픔 맘을 추스려서 구걸하여 모은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발원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나 다름없는 것을 올리는 사람의 간절함을 어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한국 유수의 재벌 총수가 1만원짜리 연등에 온 맘을 담았다고 하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본인도 거기에 마음을 다 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봉축일을 기념하여 불교 발전을 위해 거의 전 재산, 10조원쯤을 기부한다면 어느 누군들 그 맘의 진지성을 의심하겠습니까?

자산(資産)의 절대량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기부 자산의 비율을 사람들은 더 놀라워하고 부처님도 기꺼워하실 것입니다. 마음은 자산의 절대치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기부하는 비율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교를 공부할 때 절대적 가치를 측량의 기준으로 삼으려 하다보면 풀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집니다.

제자들에게 십억만 국토 너머에 극락세계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한마음 돌이키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이라고 하는 가르침은 결코 빈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절대적 거리와 상대적 거리에서 불교는 상대적 거리를 더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시간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언제나 상대적 개념의 시간관을 이야기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한 뒤 56억7000만년이 되는 때에 강림하신다는 미륵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 또한 절대적 시간개념보다 상대적 시간관으로 이해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불자들은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사홍서원을 발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초파일에 혹시 부족함이 있어 자기가 다니는 사찰의 부처님 바로 앞에 등을 켜지 못하셨다면 가까이 등을 단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절 부처님 더 앞쪽에 불을 밝히지 못하였다면 앞산 너머 암자의 부처님께 더 가까이 등을 달았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두두물물 불성 아니 지닌 것이 없고 삼천대천세계가 부처님의 가피 아니 미치는 곳 없다는 믿음이 앞서면 조금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모든 불자님들이 이런 맘으로 등을 달아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한다면 저희 출가자들 또한 더없이 평등한 맘으로 모든 이들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우리 리틀붇다어린이들도 합창단 연습실에 모셔진 부처님 둘레에 등불을 밝히고 각자의 등표를 달았습니다. 1년 동안 등불을 밝히기로 약속하고 어린 단원들은 가족의 이름과 소원을 적고 각자 2000원씩 등값을 내게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보시한 것을 자신의 일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1년 전기료가 얼마일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단원들은 스스로 등을 만들고 불을 밝히며 벌써 소원이 다 성취된 듯 기뻐하였습니다. 그러한 아이들의 소원을 살펴보면 정말 놀랍기도 했습니다. ‘올백 맞게 해 주세요’ ‘엄마아빠가 제발 싸우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도 있어 한참을 웃었습니다.

올해도 모든 불자님들의 간절한 마음 담아 전국 방방곡곡 사찰과 거리거리에 등불이 밝혀지고 부처님오신날을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저도 해마다 등을 답니다. 하지만 저의 등불은 제 휘몰아치는 욕심의 바람 앞에서 항상 꺼지고 마는 작은 등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올해는 저도 꺼지지 않는 등불을 켜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밝히는 나의 등불에 내 맘 전부를 담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까닭에 혼자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어봅니다.

차별한 연등으로 마음 쓰시는 글에, 저는 자꾸 마음 쓰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두 마음 모두 무슨 높낮이가 있겠습니까? 모두 무등(無等)하지 않겠습니까?

도량 장엄으로 하루를 보내는 행복한 사문 성원 두 손 모읍니다.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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