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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숲의 화쟁

기자명 김용규

숲은 치열함 피해 각자 아름다움 피워내는 화쟁공간

나무에 붙어 먹이를 구할 때 딱따구리는 일반적으로 동선(動線)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 즉 나무의 아래쪽인 밑동에서 나무의 위쪽인 줄기 끝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먹이를 구하는 것이다. 반면 동고비는 딱따구리의 동선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먹이를 구한다고 한다. 즉 줄기의 위쪽에서 나무의 아래쪽으로 움직여가며 먹이를 구하는 생태적 특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두 종의 새가 먼저 훑고 지나간 종의 궤적을 회피함으로써 한정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살아야하는 두 종의 새가 각각 먹이활동의 가난을 피하는 전략으로 소개되는 이야기다. 산까치라 부르는 어치와 까치 역시 공간을 나누어 산다. 까치는 민가와 들 주변을 서식지로 삼을 때, 어치들은 숲의 가장자리를 제 서식지로 삼고 있다. 나는 아직 이 두 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본 적이 없다.

진달래와 철쭉의 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 있다면 눈썰미 있는 사람이다. 두 꽃은 똑같이 봄날에 피고 비교적 키가 작은 나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꽃의 색도 분홍색 계열에다가 꽃모양마저 비슷한 터라 그 구분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진달래는 화전을 만들어 먹지만, 철쭉은 먹을 수 없는 꽃이므로 자연과 가까이 살았던 옛 사람들은 이 둘을 정확히 구분했다. 몇 가지 차이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분홍이라 해도 그 꽃 색이 미묘하게 다르고 잎 모양도 같지 않다. 꽃과 잎만 놓고 보면 대략 진달래가 더 순하게 생겼고, 철쭉이 조금 더 강하게 생겼다. 무엇보다 꽃을 피우는 시기가 절묘하게 다르다.

둘 중 누가 먼저 꽃을 피울까? 진달래가 더 일찍 핀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철쭉이 대략 보름쯤 늦게 피어난다. 왜 그 시기가 다른 걸까? 어느 생태학자는 이 또한 서로가 가난을 피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라고 추정한다. 다시 말해 비슷한 꽃의 색과 모양을 가진 두 종의 꽃이 동시에 필 경우, 예컨대 진달래가 피는 이른 봄철에 철쭉마저 함께 꽃을 피울 경우 아직 매개 곤충이 그리 많지 않아서 꽃의 수정 확률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진달래는 조금씩 일찍 피고 철쭉은 조금씩 늦게 피어나면서 그 치열함의 시간을 회피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 생태학자의 추론이다.

비슷한 색으로 피는 꽃 중에는 조팝나무와 이팝나무 꽃이 있다. 이팝나무는 요즘말로는 쌀밥나무라는 뜻이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쌀밥을 ‘이밥’이라 부르는데, ‘이팝’은 바로 그 순백의 흰꽃이 촘촘히 매달린 나무의 꽃모양에서 쌀밥을 연상하여 붙인 이름이다. 조팝나무는 곡물의 하나인 ‘조’의 크기만큼 작게 피어나는 꽃모양을 지녔는데, 그 모양에서 조밥을 연상하였고 그 상상을 나무의 이름에 담아 불렀던 것이다. 조팝나무와 이팝나무 꽃은 둘 다 순백의 색깔로 핀다. 그 흰빛이 얼마나 새 하얀지 인간이 천연의 물질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색에 가깝다.

둘은 숲에 사는 다른 나무들이 잎을 틔우기 시작하는 시점을 지나면서 개화한다. 그들의 꽃이 그토록 순결한 백색인 까닭은 바로 초록으로 깊어가는 공간에서 묻히지 않고 제 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분투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동일한 순백을 가진 녀석들 역시 그 개화의 시간이 다르다. 조팝이 먼저 핀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작은 키의 떨기나무인 조팝은 제 소박한 크기의 한계를 기필코 넘어서서 자신을 드러내고야 말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 길고 가는 줄기 곳곳을 하얀 빛깔로 가득가득 채우며 피어난다. 이팝나무는 상대적으로 큰 키의 나무다. 조팝나무보다 훨씬 늦게 순백의 쌀밥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듯 피어난다.

나무들은 스스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을 나무들에게 내린 신의 형벌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숲은 대충 그 움직일 수 없는 존재들의 욕망이 결집한 것으로 기반을 이루고 있는 공간이다. 거칠게 말해 사회란 인간들의 욕망이 결집한 것을 토대로 형성된 공간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이념이 서고 또 각종 법이 세워지면서 그 욕망의 방향과 크기 등을 조절한다. 그러고도 인간은 끝없이 피 흘리는 역사를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 세상과 달리 숲에는 이념도 법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지키면서 또한 타자의 욕망도 지켜내는 세계를 이루었다. 욕망의 시간을 달리하기도 하고, 욕망의 공간을 달리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화쟁의 세계를 이루었다. 푸른 숲을 늘 보며 사는 나는 항상 인간의 화쟁을 그리워한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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