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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첫 명사 정화 스님 입적

  • 부고
  • 입력 2016.05.03 12:58
  • 수정 2016.05.03 12:59
  • 댓글 0

4월29일, 법납 82세로
전국비구니회장으로 엄수
견성암 선원장 등 역임

 ▲ 묘각당 정화 스님.
묘각당 정화 스님이 4월29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납 82세.


일제강점기인 1922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난 정화 스님은 독립운동, 한국전쟁, 종단정화 등 근현대불교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는 혼란 속에서도 불교의 미래를 위한 승가의 역할과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으며 후학들의 사표가 되었다. 1933년 표훈사 돈오암에서 원각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금강산 신계사 자족원에서 일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이후 1942년 신계사 여여원에서 효봉 스님을 전계사로 보살계를, 1945년 선학원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출가 후 표훈사에 머물던 스님은 은사 원각 스님, 대원 스님, 성공 스님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던 용성 스님을 도왔다. 다시 신계사로 돌아온 스님은 1939~1944년 여여원에서 효봉 스님의 지도로 사미니과를 수료했고, 1954년 범어사 대성암에서 운허 스님에게 ‘능엄경’을 수료하는 등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해 수덕사 견성암에서 2년간 정진했다.

1950년대 말부터는 종단정화운동에도 적극 참여, 조계사 정화과정에서 효봉 스님과 단식을 하기도 했다. 1998년 ‘선우도량 13호’에 게재된 ‘한국불교 정화관련 인사 증언 채록’에 따르면 스님은 단식하는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정화운동이 끝난 후 후학들의 교육에 뜻을 세운 정화 스님은 1961년부터 개심사 비구니 강원 총무 소임을 맡은데 이어 1962~1970년에는 개심사 비구니 강원 주지를 맡았다.

주지 소임에서 물러난 후에는 수행에 매진했다. 1970~1972년 수덕사 극락암서 안거한 데 이어 1972년에는 서울 화양동에 광림선원을 창건하고 1994년까지 광림선원에서 정진했다. 이후 견성암으로 자리를 옮겨 2년간 안거정진 한 후 1996~1999년 견성암 제일선원 선원장을 역임하며 비구니 수행의 사표가 됐다. 정화 스님은 2007년 조계종 최초로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 법계를 품수했다.

한편 정화 스님의 영결식은 4월30일 일산 동국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봉행됐으며, 다비식은 5월1일 수덕사에서 엄수됐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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