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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생의 업장 ‘내 허물!’ 진실한 참회가 정토 일궈

부처님오신날 만난 큰 스님 합천 용흥사 회주 묘관 스님

절에 한 번 살아볼래?
어머니 한 마디에
12살 소녀 ‘예!’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보았다 하는 건
착각일 뿐!

동국대 장학금 권선 10년
사람 키워야 불교 진흥!

5월이다. 땅과 비, 그리고 해와 달이 빚어낸 기적들이 가야산 기슭에도 일어났다. 진달래와 철쭉이 겨우내 품었던 향기를 일시에 발산하고 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꽃이 피었으니 봄이다! 오늘은 특별한 스님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날이다. 인연 닿는 비구니 스님들께 부탁드렸었다. 선교를 통해 내외가 명철하신 스님 한 분 귀띔해 주십사 하고. 한 분을 추천 받았고 수소문 끝에 친견을 허락 받았다.

“먼 길 오셨습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칼칼함이 배여있다. 선기를 다스린 고승의 내공이 느껴진다. 다관에 찻잎 넣는 순간 푸릇한 녹향이 방안을 채워간다. 언론에 노출되는 걸 워낙 꺼려하시기에 스님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동국대에 장학금을 기부한다는 사실과 일본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것, 그리고 해인사 동진출가승이라는 게 전부다. 무엇보다 출가인연이 궁금했다.

해방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후 김천 청암사 부근에 터를 잡고 살던 무렵. 어머니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친동생이 머물고 있는 절로 향했다. 엄마와 걷던 계곡길이 가야산 홍류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일게다. 해인사 국일암에 머물고 있던 속가 이모 정인 스님을 처음 마주한 것도 그 때다. 다소 급한 성격에 매사를 허투루 보지 않는 엄격했던 이모였다. 서너 번 암자를 찾아갔을 즈음. 정인 스님 아래에 상좌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어머니가 뭔가 골똘히 생각고는 소녀에게 물었다.

“너, 이 절에서 살아볼래?”
“예!”

소녀의 간결한 대답에 어머니와 정인 스님도 깜짝 놀랐다. 12살의 풋풋한 소녀는 정인 스님을 은사로 이렇게 산문에 들었다. 먼저 와 있던 동자승들과도 잘 어울려 별다른 탈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씩 엄마가 찾아 온 날은 달랐다.

“엄마가 절에 오신 날이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정인 스님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자주 제 손을 잡으셨지요. ‘잘 있그레이. 시님 말씀 잘 듣고.’ 그리 말씀 하시는 엄마 목소리에도 슬픔이 배어 있었습니다.”

찰나의 만남이요 만겁의 이별처럼 느껴졌다. 막힌 둑 터지듯 엄청난 눈물이 흘렀다. “그리 울려면 엄마 따라 지금 가라!”는 정인 스님의 호령도 아랑곳 않고 펑펑 울었다. 엄마는 가려던 길 멈추고 다시 돌아 와 소녀를 안았다. “지금, 엄마랑 집으로 갈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울음을 그쳐갔다. 엄마는 다시 해인사를 나섰고, 소녀는 이내 또래의 동자승들과 어울려 놀다가 가야산 품에 안겨 잠들었다.

길고도 깊은 숙연(宿緣)이다. ‘절에서 한 번 살아 보겠냐?’는 말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예’라 답하고, 자신과 멀어지는 엄마를 보고도 울지언정 결코 산을 떠나지 않았으니 전생의 전생부터 부처님과 이어져 온 인연이리라. 15살 되 던 해인 1950년 2월15일. 소녀는 해인사서 인곡 스님을 전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학봉, 운허, 지관 스님 등 당대 내로라하는 강주 스님들로부터 ‘초발심자경문’과 ‘화엄경’, ‘전등록’을 배웠다. 사미계 수지부터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기까지 12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강원 수의과를 졸업하는데 3년이 더 소요됐다. 6·25한국 전쟁과 정화불사라는 격동의 세월을 헤쳐 가며 공부해야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더욱이 절 살림도 여의치 않았던 시대 아닌가. 묘관 스님은 절 밖으로 나가 처음 탁발했던 그 순간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 해인사서 공부하려면 쌀 다섯 말과 보리 다섯 말을 쌀독에 부어 놓아야 했습니다. 탁발 이외의 별다른 방책이 없었습니다.”

10리 산길을 걸어 나와 마을에 이르렀다. 어찌해야 하나! 문 앞에 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 누군가의 집 앞에 서서 목탁을 쳤다. 한 청년이 나왔다. 얼핏 보아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무. “시주 해 달라!”는 말을 끝내 못 하고 고개를 돌린 체 다른 집으로 향했다. 할머님이 나오셨다. 그냥 반가웠다. “할머니! 시주 좀 해 주이소.” “와? 뭐에다 쓸긴데?” “공부 할라코 예!” 난생 처음 탁발로 받은 시주물은 한 줌의 보리쌀. “부처님 공부 잘 하그레이!”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동국대 인재불사에 써 달라며 형편 닿는 데로 100만원, 500만원을 기부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10여년 동안 보낸 장학금이 1억원을 넘는다. 사중 돈이 아니다. 어찌어찌 해서 얻게 된 ‘개인 살림살이’다. 사제와 상좌들을 만나면 늘 이른다. “부처님 법 누가 전하나? 사람 키워야 한다. 개인이 써야 할 거 조금만 더 아껴 쓰고 동국대에 장학금 좀 보내 주거라.” 묘관 스님의 원력과 정성에 감동한 동국대는 스님의 법명을 이름으로 한 ‘묘관장학회’를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장학회 설립에 묘관 스님은 반대 했지만 “이렇게 해야 장학불사가 더 잘 된다”는 말에 결국 승낙했다.

묘관스님이 처음 용흥사 주지를 맡았을 때만도 허름한 대웅전과 비새는 요사채 한 채가 전부였다. 폭포수도 그릇이 있어야 담을 수 있는 법. “불보살님께서 머무실 전각을 짓겠습니다.” 거마비라도 받게 되면 불사금으로 돌려놓고는 형편 닿는 대로 기와를 사고 기둥을 세워갔다. 불사금 내달라 한 적 없지만, 스님의 행보를 지켜 본 신도들은 작은 힘이라도 보탰다. 도심사찰에 걸 맞는 사격이 갖춰진 건 발원 10년 만이다. 용흥사는 절에 오는 사람의 숫자로 포교의 기준을 삼지 않지 않는다. 진정한 불자가 몇 명인지를 본다.

“불자가 꼭 알아야 할 교리가 있고 새겨야 할 경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계가 있지요. 공부하지 않고 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불자가 아닙니다. 건실한 불자가 곧 포교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묘관 스님은 대교를 마친 후 3000배를 올리고는 곧장 성철 스님을 찾아 뵈었다. 스님이 받은 화두는 “마삼근!” 이후 결제철이면 선방에 가부좌를 틀었다. 2014년까지만 해도 해인사 약수암 선덕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지난해부터 선방으로 향한 발길을 거두었다.

“나뭇잎에 떨어진 빗소리도 잘 받아 내던 귀가 세월 따라 어두워졌습니다. 저와 담소라도 나누려면 후학들은 목소리를 좀 높여야 합니다. 그래, 이제 선방도 자주 오면 안 되겠구나!”

선방은 대중이 정진하는 공간이다. 자신 때문에 선방서 큰 목소리가 새어 나는 것에도 마음 쓰는 건 아마도 후학을 위한 세심한 배려일 것이다. 선객이 주석하고 있는 도량이지만 용흥사는 신도들을 위한 ‘참선’보다 ‘기도정진’에 더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자비도량참법’에 따른 참회정진이 이색적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는 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인정한 잘못만 참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연기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의 잘못도 내 허물로 삼아 참회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중생의 죄와 업장을 내 허물로 삼아 참회할 때 이 세상은 정토로 빛날 것입니다.”

용흥사에 피어 난 5월의 봄을 품은 묘관 스님의 눈이 참 초롱하다. 쮆 A12면으로 이어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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