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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자유를 향한 선택] 3. 왜 출가하나

기자명 성재헌

가슴에 품은 질문 세상 향해 던지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

▲ 동산양개 스님은 개울을 건너다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림은 남송(南宋) 때 저명한 화가인 마원(馬遠)의 ‘동산섭수도(洞山涉水圖)’ 일부.

출가(出家)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집을 나선다’이다. 이는 단순히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학교나 직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도 출가이고, 여행이나 나들이를 위해 집을 비우는 것도 출가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집[家]’이란 기존의 세상에서 소유했던 유형무형의 자산을 뜻한다. 즉 집·전답 등의 동산·부동산과 친척·친구 등의 인간관계와 신분·지위 등의 사회적 권위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즉 출가란 기존에 소유했던 유형무형의 자산들을 몽땅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소유했던 유무형 모든 것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 선택하는 것

태자·황제·출세 버린 출가자들
삶에 대한 궁금증 버리지 않고
관념·관습에 정면으로 맞선 이들

‘나는 누구인가’ 의문 품은 양개
40여년간 의문 놓지 않고 정진
질문하지 않으면 구할 답도 없어

여태 소중하게 여기며 아끼고 보전하던 것들을 몽땅 내던지고 훌쩍 새 길을 나선다는 것, 삶의 목표에 대한 획기적 수정 없이는 실로 불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출가는 어려운 길이었고,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 힘든 길을 선택한 자들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졌고, 지금도 그 길을 걷는 자들이 도처에 수두룩하다.

누가 그 길을 선택하는가? 이런저런 세상사에 내몰리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길로 출가를 선택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세간(世間)의 탄탄대로를 등 떠밀어도 마다한 채 스스로 외지고 험한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선택하였다. 태자의 지위를 버린 부처님이 그랬고, 황제의 지위를 버린 청나라 순치제가 그랬고, 천재 소리를 들으며 과거장으로 향하던 단하 선사가 그랬다. 어찌 그분들뿐이겠는가. 지금도 훌륭한 가문의 인재들이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 가운에 출가를 선택하고 있다.

그들이 굳이 그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세상 사람들 눈에 그들의 선택은 바보 취급을 면치 못할 어리석은 짓이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아름다운 음악과 여인이 넘쳐나던 화려한 궁궐을 버리고 옷 한 벌 밥 그릇 하나뿐인 수행자의 삶을 사셨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감탄하고 존경할 사람보다 비웃으며 손가락질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 바보 취급을 감내하면서까지 출가를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며 출가를 만류한 숫도다나왕에게 태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영원히 젊음을 누리며 늙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영원히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통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게 해주실 수 있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사, 만났다 헤어지고 얻었다가 잃어버리는 세상사, 그 틈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 부처님의 출가 이유이다. 어떤가? 그 이유가 타당하게 여겨지는가? 아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사람이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숫도다나왕도 그랬다.

“이 세상에 늙고 병들어 죽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행여 누가 듣고 웃을까 겁나는구나.”

아버지 숫도다나왕의 눈에는 아들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이유 또한 어처구니없게 보였던 것이다.

출가란 이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이유로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바보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 “삶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은 없을까?” 하는 그 바보 같은 질문을 품은 싯다르타가 결국 보리수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재산과 권력을 버리고 옷 한 벌 밥 그릇 하나로 만족하는 바보 같은 길을 선택한 싯다르타가 결국 미소가 그치지 않는 자라는 칭송을 받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바보 같은 삶을 산 싯다르타가 결국 곳곳마다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행복하게 사세요” 하고 당당하게 외치지 않았는가? 출가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만약 싯다르타가 아버지의 타이름을 수긍하고 “그래,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야. 조금의 괴로움도 없는 완전히 행복한 삶이란 있을 수 없어” 하고 질문을 포기했다면 이 땅에 불교는 없었을 것이다.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 해답이란 없다. 뉴턴이 “사과는 왜 아래로 떨어질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뉴턴 역시도 아마 당시에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럼, 수많은 출가자들은 어떤 질문을 품었을까? 출가자들이 품은 질문은 싯다르타의 질문처럼 누구나 의심하지만 누구도 속 시원히 답하지 못하는 문제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질문은 아마 “나는 누구일까?”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씀이 오랜 세월 고귀한 금언으로 받들어지는 까닭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탐구가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하루에 수천 번 수만 번 사용한 단어가 ‘나’이다. 그것을 빼버리면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나’라는 단어이다. 그렇게 반드시 사용하고,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나’이지만 “그 ‘나’란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들 입을 닫아버린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청소년기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마흔이 넘고 쉰이 넘어서도 여전히 이런 의문을 품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왜 그럴까? 명쾌한 해답을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대부분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 이럴 때, 출가자들은 예외의 경우가 된다. 출가자들은 이런 강렬한 궁금증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소가죽을 뚫는 송곳처럼 견고한 관습과 관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들이다.

당나라 때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렸던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도 그랬다. 양개 스님은 어린 시절 동네 뒷산에 있던 작은 절에서 생활했다. 절에서 공덕을 많이 쌓아 무탈하게 자랐으면 하는 신심 깊은 부모의 의도였다. 영특했던 어린 양개는 주지스님 뒤를 따라다니면서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곧잘 따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법당에서 스님과 함께 예불을 할 때였다. 스님 곁에서 부처님께 예배하던 아이가 막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던 스님의 가사자락을 잡아당겼다.

“스님, 스님.”

성품이 온화했던 스님은 염불을 멈추고 어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스승에게 물었다.

“저에게는 분명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혀도 있는데 왜 부처님께서는 ‘없다’고 하셨습니까?”

동네 뒷산 작은 절에 살았던 그 스님은 참으로 솔직하고 진중한 분이었나 보다. 그 스님은 “너는 아직 몰라” 하며 무시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것을 물어” 하며 나무라지도 않았다. 도리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칭찬하였다.

“참 좋은 질문이구나.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단다.”

스님은 아이에게 오설산(五洩山)의 영묵(靈黙) 선사에게 가서 수학하도록 권했다. 소년은 출가를 할 것인지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교를 배우면서 조금씩 깊어졌던 의문을 반드시 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영묵 선사를 시작으로 참선을 하며 제방을 편력한 양개 스님은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 회하에서 그 굳은 절개와 날카로운 지혜를 칭찬받았다. 하지만 끝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자신을 속이지 않았던 양개 스님은 제방의 명성을 뒤로하고 운암담성(雲巖曇晟) 선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운암 선사와이별하고 산을 내려오던 길에 개울을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마침내 크게 깨달았다. 그가 노래한 오도송은 이렇다.

절대로 다른 곳에서 찾지 말게/ 자기와 점점 더 아득해질 뿐이니/ 내 이제 홀로 가노나니/ 곳곳마다 그 분을 뵙는다오/ 그가 지금 바로 나이지만/ 나는 지금 그가 아니라네/ 모름지기 이렇게 알아야만/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하리라

이후 양개 선사는 대중(大中) 말년(859)부터 신풍산(神豊山)에서 법석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으니, 그의 나이 53세 되던 해이다. 대략 계산해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40여년 이상을 품었던 것이다.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 해답은 없다. 간절하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도 한낱 말잔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나 역시 청소년 시절에 이런 의문을 품었다.

“과연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하나의 질문이 없었다면 나는 불교를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살지도 않았을 것이며, 아침저녁 한숨을 내쉬면서 “자네는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묻는 옆집 할머니에게 싱긋이 웃어보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고 세상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자. 과감하게 집을 나설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풀리지 않는 본질적 질문을 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다가가자. 이것이 출가이고, 불자의 길이다.


 
성재헌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를 역임했으며, 동국대 역경원에서 근무했다. 현재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청소년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했고, 저서로 ‘커피와 달마’‘붓다를 만난 사람들’ 등이 있다.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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