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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자살의 충동 속에서 만난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

기자명 법보신문

[신행수기 당선작] 중앙신도회장상-이선애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폐암 말기였다.

엄마를 입원시켰다. 엄마는 병원에 있으면서도 집 걱정 일 걱정만 하셨다. 폐암 말기라는 것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로 마음을 달랬고 점점 앙상하게 말라가셨다. 마음이 아팠다. 사남매는 돌아가면서 엄마 병실을 지켰다. 하루는 내가, 그다음 둘째 셋째 막내까지 넷이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켰다. 그날은 내가 병실을 지키는 날이었다. 한 살 어린 둘째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독기 품은 독사뱀처럼 원망을 쏟아냈다.

폐암 말기 어머니 병실에서
동생과의 처절한 몸싸움

동생에 대한 분노·원망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자살 시도

친구따라 부처님 만난 뒤
평창 월정사에서 단기출가

참회의 절로 원망 녹인 뒤
감사함으로 하루하루 살아

“엄마가 저렇게 몹쓸 병에 걸린 게 다 네년 때문이야. 네년이 얼마나 엄마 속을 썩였으면 저렇게 몹쓸 병에 걸렸겠어. 그러니까 너 이년 네가 대신 죽어. 네년이 엄마 대신 암에 걸려 죽으란 말이야. 병에 걸려서도 넌 곱게 죽어선 안 돼. 처참하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어 차에 깔려 죽던지 갈기갈기 찢겨 죽으란 말이야. 살려내, 내 엄마 살려내! 내 엄마 살려내란 말이야!”

모두 내 탓이라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어쩔 줄 몰랐다. 화장실 변기에 주저앉았다. 한참 정신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그날 밤을 새웠다.

다음날 새벽, 동생이 교대하러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내 어깨를 힘껏 툭 치는 것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말았다. 동생의 긴 머리채를 잡았다. 입고 있는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동생을 깔고 앉아 때리고 잡아 뜯기 시작했다. 동생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둘이 엉켜 붙어 싸웠다.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동생을 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이것들아, 그만 해 그만 해.” 엄마가 허공에 손짓하며 울부짖고 계셨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왔다. 집 밖에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아팠다. 엄마 간호하러 병원조차 갈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돌아가셨다. 동생과 싸움,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보여드린 마지막 모습이었다.

꽃상여에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싣고 내 손으로 직접 언 땅속에 묻어드리며 한없는 눈물과 후회와 아쉬움을 남겼다. 동생에 대한 원망이 나날이 커져만 갔다. 목소리가 한시도 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송곳이 가슴을 후벼 팠다.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쥐어짜며 우는 날이 많았다. 방바닥을 치며 내 머리를 조아려 잡아 뜯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남편은 학위를 받는다고 독일로 훌쩍 떠났다. 두 딸도 공부를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나는 혼자였다.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눈 떠서 감는 순간까지 동생 원망하는 소리를 곱씹었다. 처음으로 술을 샀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마시고 깨면 또 마시고 반복했다. 취한 상태에서도 동생의 목소리만큼은 생생하게 들려왔다. 억울했다. 울면서 술 마시고 울면서 잠들고 모든 게 엉망이었다. 누워만 있었다. 찾아오는 친구도 가족들 전화도 귀찮았다. 의욕도 없었다.

죽기로 했다. 엄마가 아버지 때문에 농약을 마셨듯 나도 동생 때문에 죽고 싶어졌다. 동생의 목소리를 계속 끄집어 올리며 ‘죽어죽어’ 그 소리를 놓지 않고 상상하며 방문 위에 못을 박았다. ‘그래, 내가 죽으면 되는 거지. 내가 죽으면 네가 행복해 진다는 거지’ 하면서 목을 졸라매기 시작했다. 의자를 발로 찼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멀리서 계속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돈 친구가 찾아와 나를 발견했다. 나는 ‘왜 구했느냐’며 또 원망을 했다.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친구들은 언니니까 참으라고 했다. 서운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나만 보면 교회 가자고 했다. 시끄럽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직장 모임에서 1박2일로 월정사에 간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친구 따라 월정사에 처음 갔다. 사람을 피해 절 귀퉁이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적광전으로 들어갔다.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나 큰 부처님을 보았다. 방석 하나를 부처님 앞에 놓고 앉았다.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 쳤다. 따뜻함이 느껴졌다. 내 눈엔 부처님이 글썽였다.

부처님은 인자한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그래, 내가 네 맘 다 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니. 이제부터 다 괜찮아 질 거다. 걱정하지 마라.’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마당으로 나왔다. 알 수 없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위로와 따뜻한 감정이었다. 그제야 절 풍경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단기출가자 모집’ 현수막이 펄럭이며 눈에 띄었다. 날짜를 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원서를 제출하고 출가자로 등록했다. 동기 란에는 ‘동생 때문에 못살겠다. 억울하다. 죽고 싶다’ 온통 동생을 원망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단기출가 입소를 하였다.

긴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후회하는 마음과 사과하는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이 최초로 많이 생겼던 것 같다. 지도법사는 시간 날 때마다 나를 조용히 불러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반드시 말은 뱉은 사람한테로 다시 뒤돌아가 비수처럼 꼽히고 만다. 말이라는 것은 화살과 같다. 동생이 심한 말을 해서 언니인 그대가 힘들고 괴롭다면 말 뱉은 동생 또한 반드시 괴롭고, 아플 것이다.”

처음엔 내가 복수해서 나보다 몇 곱절 더 힘들고 괴롭기를 바랐다. 아파보니 동생도 나처럼 아프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 비록 나는 힘들고 괴로워도 동생의 괴로움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을 확실히 확인했다.

스님은 매일 동생을 위해 절하라고 권했다. 동생이 사는 쪽을 바라보면서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하면서 참회의 절을 아침저녁으로 하라고 했다.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지도법사가 시키는 대로 아침저녁으로 108배 절을 했다. 처음엔 그렇게도 싫던 마음이 점차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해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진심으로 참회의 절을 다시 시작했다. 나를 토닥이는 절도 했다. 나를 보듬어주는 절도 했다. 동생에게도 진심으로 참회하는 절을 한 배 한 배 아침저녁으로 정성들여 했다. 동생이 나를 많이 믿고 의지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언니로서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이기심이 부끄럽게 느꼈다. 방과 후 언니와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담 밑에서 기다렸는데, 언니는 친구들과 집에 가버리고 없어서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가 너보고 기다리라고 했느냐며 무심히 이야기 한 것이 생각났다. 돌이켜보니 동생은 언니를 많이 좋아했는데, 나는 한 번도 동생을 좋아하거나 동생 마음을 헤아려 본적이 없었다. 동생도 혼자였다.

졸업하기 전날 3000배를 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동생들과 아버지께 참회하는 마음으로 엎드렸다. 태어나 그렇게 힘들게 무엇을 해본 것이 처음이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지도법사는 보이지 않게 응원해 주셨다. 스님 옆자리에 앉도록 배려했고, 지칠 때 마다 힘찬 목탁소리로 이끌었다. 지금도 진선 스님의 우렁찬 목탁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새벽 4시쯤, 회향한 3000배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모든 게 새로웠고 달라 보였다.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이 됐냐고 물었다. 어렴풋이 언니가 절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해 보았지만 알려주지 않아 궁금하고 걱정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남아 있던 원망은 사르르 녹는 듯했다. 동생에게 용기 내어 밥을 먹자고 했다. 10여년 만에 세 자매는 마주앉았다.

가슴 설레고 좋았지만 아직 어색했다. 하지만 앉아있는 내내 행복함을 느꼈다. 용기 내어 그동안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동생들은 말없이 한참 이야기를 들으며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동생들은 그렇게까지 힘들어 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언니, 미안해. 언니 이제 마음 풀어 잘못했어.”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지. 너희들은 잘못한 게 없어.” 세 자매는 10년 만에 서로 손을 맞잡고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울었다.

지금은 서로 이해하며 위해주고 아껴주며 잘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부처님 가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옛날처럼 동생들 몫까지 김치 담는 날이면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불법 공부를 시작했다. 단기출가 때 맛본 불법만으로도 이렇듯 내가 변하고 주위가 변하는데 이 좋은 공부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부처님법이 궁금해졌다. 경전을 읽고 있으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집중하게 되었다. 행복했다.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하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일 아침 나를 내려놓고 비워내는 108배를 시작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참회의 절은 놓지 않았다. 절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화가 많은 사람임을 알았다. 나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참회의 절을 하면 화내는 일이 줄어들고 상대에게 참회하는 마음이 있어 차츰 고치려고 노력하는 내가 보였다.

일요일마다 다리가 불편하신 시어머님 모시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린다. 연세가 많으신 시어머니를 이겨보려 했던 지난날을 참회하고 지금은 감사함으로 살고 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당신 귀한 아들 낳아 나에게 보내주셨으니 원래 주인은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께 잘하겠습니다. 잘 모시겠습니다.’

요즘 남편도 행복하다고 한다. 클래식 작곡가로 작년에는 내가 사놓은 불교서적을 많이 읽는가 싶었는데 십우도를 연구하여 곡을 작곡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세계무대에 한국대표로 십우도를 작곡 발표하여 극찬을 받기도 했다.

어제는 엄마 산소에 올라가 꽃 잔디 30여개를 심었다. 꽃을 심으며 엄마를 불러 보았다.

‘엄마 많이 보고 싶고 그리워요. 예전에 많이 죄송했어요. 좋은 모습 보여드리지도 못하고 모두 제 탓이에요. 부족하고 욕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나아졌어요. 아버지 그리고 동생들도 잘 있어요. 손주가 회사에서 잘했다고 상을 탔데요. 엄마 기쁘시죠? 이제 아무 걱정마세요. 제가 부처님 법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어요.’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불법 만나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두 함께 행복해 지기를 발원합니다.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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