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 국제포교에 나선 까닭은-하

“낯선 곳이라도 인연과 고난 있다면 세계일화 피어나리”

▲ 대만 불광산사가 호주에 건립한 남천대학.   대만 불광산 제공

“빈승에게 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방법을 찾으면서 단지 한 걸음 한 발자국 발전하였습니다. 현재는 불광산의 청년 빈승에 의지하여 런던, 베를린, 파리, 마드리드, 네덜란드 심지어는 세계 곳곳의 많은 유명도시에 절과 도량을 지었습니다.”

빈승은 면세로 비용을 줄이면서 미국에서 홍법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자장과 의항 스님이 아주 능력이 있었던 덕분에 다음날 오후 그 스님들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2명이 탈 수 있는 차를 운전해서 돌아왔습니다. 차 가게주인이 “종교인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면서 차 값 1만 달러에 포함된 세금 500달러를 돌려주면서 나머지 9500달러는 나중에 매월 할부로 내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이는 정말 천하에 기이한 일로, 차를 샀는데 돈을 내기도 전에 500달러를 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에서 멀지 않은 곳의 백화점을 돌아보다가 “텔레비전은 얼마나 하나요?”라고 그냥 물어 봤는데 “450달러”라고 하기에 “나중에 돈이 생기면 다시 사러 오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생각지도 않게 그 사람이 텔레비전을 보내 와서는 “종교인은 세금 50달러를 면제하고 400달러만 내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 미국은 정말 천당이구나. 이렇게 살기가 쉽다니 정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오려고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교회에서 살게 되었고 미국에서의 포교홍법의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20여개 국가의 출가자들이 우리한테 특별히 찾아와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다행이 음식을 만드는 재주가 저에게 약간 있어서 프라이팬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접대하였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먹어주었고 함께 서래사가 미국에서 발전하도록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발전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신도는 늘어나는데 장소가 좁아 밥을 먹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이우드’에 위치해 있는 한 교회에 대중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시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들여 ‘백탑사(白塔寺)’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빈승의 출가종찰인 ‘백탑산’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았습니다. 신도들이 끊임없이 늘어나게 되면서 할 수 없이 약 1만7169평(14에이커)의 말을 키우던 대지를 다시 사들였는데 훗날 오늘날의 서래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20여 년 이래로 자장, 심정, 의공, 자용, 혜전, 심보, 혜동 등 스님들이 주지를 맡았습니다. 이후로 캐나다와 유럽 각국에서도 곳곳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쉽게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2주간의 시간을 들여 자장 스님이 런던과 파리의 큰길과 골목길을 찾아다니면서 유럽에 사찰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사람들은 임대를 하거나 구매하려는 사람이 대만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완곡히 거절을 하곤 했습니다. 유럽인은 종족을 따지는 것 같았습니다.

1991년, 어렵사리 프랑스 파리 한 백화점 위층에 10평 정도 되는 작은 방을 임대하게 되었고 대만에서 온 10여명이 이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을 가졌습니다. 소벽하(소벽하사고 蕭碧霞師姑 : 입실 유발제자, 역자 주)는 화장실 내에 있는 약간의 공간에서 음식을 만들어 우리들이 먹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비록 볼품없는 공간이었으나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불법을 펼칠 것인지 모두들 한마음으로 의논하였습니다.

2000달러의 돈으로 캐나다에서 포교의 길을 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캐나다 여행길에서 저는 넓은 대지와 수많은 공원과 많은 빈 땅을 바라보면서 대만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려 해도 마땅한 땅을 찾기에 어려움이 많은데 캐나다에서는 “대통령 집무실을 100채라도 지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곳에 마땅히 절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관광버스의 창밖을 가리키면서 “땅이 이렇게 넓고 좋은데 너희 가운데 누가 여기에서 절을 지을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동행하고 있던 의굉(依宏) 스님이 손을 들고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타이중 홍광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하여 약간의 영어도 통하기에 저는 “아주 잘됐다”라고 말하고 바로 버스를 세웠습니다. “너는 여기에서 차에서 내리도록 해라”고 말한 뒤 2000달러를 제자에게 건네 주었더니 길가에 멈춰선 차에서 두말없이 내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자를 토론토에 내려놓고 차를 출발시켜 일정을 계속 진행하였습니다. 불광산이 토론토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아무런 목표도 없이 오직 발심 하나에 의지해 천천히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 이후 저는 유럽과 미주지역을 여러 번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국제화되고 해외에 사찰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언어와 인재라는 요건 이외에 시간을 들여 인연을 점차 길러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럽과 미주지역에서의 홍법을 위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가장 먼저 현지 신도를 알아야 하고 신도의 신뢰를 얻어야 그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선 모텔에 방을 하나 빌려 살면서 신도 집 거실을 빌려 매주 하루 가정모임을 갖는 것에 대해 신도와 의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신앙을 가진 신도는 이러한 일을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단지 2~3개월 정도이어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더 길어지면 그 집에 다른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서양에는 한 가정 안에 각기 다른 신앙을 가진 경우가 자주 있으니 지나치게 남의 거실을 써서 그 가정에 불편을 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단계로는 신도들의 차고를 빌리고 벽에 걸 수 있는 괘불을 준비해서 차고에 불상을 걸고 강좌나 법회의식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2~3개월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신도가 30명 정도가 되는 세 번째 단계가 되었을 때 “차고에는 화장실도 없고 찻물도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으니 우리 조금 더 큰 장소를 빌려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30~40명의 신도들이 모두 동의를 하거나 찬성을 하게 되면, 심지어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자금을 모아 장소를 빌리러 갈 것입니다. 임시로 빌린 도량에서 홍법 포교는 일 년 정도는 해야 하고 신도도 70~80명이나 100명이 넘어야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대중이 함께 동참해야 일이 비교적 쉽게 전개될 수 있는 것으로, 본인의 조건이 부족하여 신도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혼자의 힘으로는 절을 지으려는 꿈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조건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신도를 100명으로 늘릴 수 있으며, 200명 신도들이 자연스럽게 더 넓은 기도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니 주도적으로 경비를 모으고 땅을 사서 작은 도량을 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럽, 미주지역, 호주, 뉴질랜드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진정으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삼천 세계에 널리 비추고 불법의 강물이 오대주로 널리 흐른다”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빈승은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인연과 비바람 속에서 오직 원력에 의지하여 극복하라” 했습니다.

감동적인 수많은 인연공덕과 전법 이야기도 아주 많지만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일일이 다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 하화사(荷華寺)를 짓는 과정에도 아주 기적과 같은 인연이 있었고, 런던에서는 수녀들이 살던 수도원을 거처로 하였고, 브라질에서는 신도 장승개(張勝凱)의 집을 절로 하였으며, 호주에서는 울런공 강철회사 사장이 직접 불광산으로 찾아와 초청을 하였고 자용 스님이 용감하게 홀로 건너가 개척하는 등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좋은 인연 이외에도 약간의 비바람도 있었고 심지어는 습관이 다른 것이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모두다 원력에 의지해 하나하나 극복하였기에 불법을 세상에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빈승에게 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방법을 찾으면서 단지 한 걸음 한 발자국 발전하였습니다. 현재는 불광산의 청년 빈승에 의지하여 런던, 베를린, 파리, 마드리드, 네덜란드 심지어는 세계 곳곳의 많은 유명도시에 절과 도량을 지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현지 본토인과 화교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짧은 50년에 수백 개의 도량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빈승이 출가해 홍법 포교한 70여 년의 세월을 거치고 오늘에 이르러 네 마디 말로써 빈승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마음은 중생제도라는 자비원력을 품고(心懷度眾慈悲願) 몸은 법의 바닷물처럼 배를 묶어두지 않는다(身似法海不繫舟). 나에게 일생으로 무엇을 바랐는지 물으면(問我一生何所求) 평안과 행복으로 오대주를 비추리라(平安幸福照五洲).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