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자귀나무의 욕망

기자명 김용규

내 것 아닌 것 빼앗아 나를 채우려 않는 나무

부산, 포항에 이르는 강연 길에 인천에 사는 제자 하나가 따라붙었습니다. 나와 제자는 이런저런 질문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대화중에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도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욕정이 일어서는 때가 있나요?”

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 동아시아의 옛사람들은 그것을 리(理)라고 불렀다. 여기 직각 삼각형이 있다. 직각 지점에 닿아 있는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그 합을 내면 반드시 나머지 한 변을 이루는 길이의 제곱과 같다. 오래전 피타고라스가 이 법칙성을 발견했고 ‘a2+b2=c2’이라고 요약했다. 이러한 것이 곧 수리(數理)이다.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물은 0℃가 되면 얼고 99℃를 넘는 지점에서 끓는다.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의 하나, 곧 물리(物理)이다. 또한 땅을 생성하고 변화를 이끌며 관통하는 리(理)가 있으니 그것이 곧 지리(地理)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성장하게 하고 유지하며 되돌아가게 관통하는 법칙이 있으니 그것의 한 모습을 생리(生理)라 할 것이다. 너와 나는 연(緣)으로 세상에 왔고 동시에 생리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 매혹적인 이성을 향해 일어서는 어떤 마음 역시 살아있는 존재를 지배하는 리(理)의 하나, 나에게 왜 욕망이 없겠느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조금 더 친절할 필요를 느껴 말을 이었습니다.

“너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너를 포함 누군가가 나를 선생이라 부를 뿐, 나 역시 생리의 선상에서 숨을 이어가고 있는 인간이다. 다만 나는 인간을 관통하는 또 다른 리(理), 즉 도리(道理)를 놓치지 않고자 애쓰고 살고 있을 뿐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붓다께서는 일찍이 탐(貪)과 진(瞋)과 치(癡)가 곧 고통의 핵심 원인임을 갈파하셨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셨다. 미욱한 나는 생리의 지배를 끊는 것을 중도라 여기지 않는다. 나는 부처의 말씀처럼 그 길은 ‘올바른 믿음과 바른 결정과 바른 말, 올바른 삶과 죽음, 그리고 올바른 의식과 생각’ 위에서 펼쳐진다는 가르침에 동의한다. 해서 나는 생명의 질서 위에 있어 욕망하는 존재지만 그 욕망을 바라보고 바르게 다루는 삶을 살고자 애쓰고 있다.” 대화로 시간은 많이 늦었고 나는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포항으로 향했습니다. 울산을 비껴 놓인 길 어느 지점에서 나는 자귀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외쳤습니다. “저기 자귀나무 꽃 좀 봐라!” 초록색 촘촘한 잎사귀들 위로 마치 공작의 꼬리 깃처럼 펼쳐내며 피고 있는 분홍빛의 꽃이 우리의 시선을 단박에 빼앗았습니다. “자귀나무의 욕망은 저토록 아름답구나.” 그도 시선을 주며 감탄했습니다. 자귀나무를 들어 나는 어제의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자귀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욕망이 저 나무, 저 꽃과 같을 수 있기를 소망해 왔다. 생각건대 생명 안에 프로그램 되어 있는 생리의 하나인 욕망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욕망의 주인이 되어 욕망하지 못하는 탐(貪)일 것이다. 중도의 길을 따르면 부질없는 것을 탐하지도, 내 것 아닌 것을 빼앗아 나를 채우려 하지도 않는다. 자귀나무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피는 꽃이다.”

자귀나무는 비가 오거나 날이 저물면 마주난 잎사귀를 서로 맞대어 접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나무를 합환수(合歡樹)라 불렀습니다. 즉 남녀가 흘레하며 기쁨을 나누는 것을 연상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 나무가 온전히 휴식에 드는 모습입니다. 빛이 사라지면 더는 광합성의 욕망을 펼치지 않고 딱 멈출 줄 아는 나무가 바로 자귀나무인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광합성을 할 수 있는데, 빛이 사라졌을 때도 잎의 팽압을 유지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공작의 펼친 꼬리처럼 피는 부분은 꽃의 수술입니다. 수술이 그토록 화사한 까닭은 한여름 녹음 속에서 제비나비, 산제비나비, 긴꼬리제비나비, 풍데이들 길 잃지 말고 찾아와 먹이를 구하라는 배려입니다.

쓸데없이 욕망하지도,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나를 채우는 것을 욕망하지도 않는 자귀나무처럼만 욕망할 수 있다면, 그 자연스러운 욕망이라면! 그의 질문에 대한 내 답의 결론이 그랬습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