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길

기자명 하림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6.06.20 13:29
  • 수정 2016.06.20 13:30
  • 댓글 0

어제 서울로 오는 길에 새마을호를 탔습니다. 요즘 뭔가 허덕 거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KTX 타면 금방오지만
일부러 새마을호 선택
빠른 것만 선호하지만
느림도 느낄 필요 있어

예전에는 빠른 것이 놀랍고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KTX로 인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3시간도 안 걸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100m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더 빠른 것을 원합니다. 빠른 것은 느렸을 때에 좋습니다. 그러나 빠르다고 느낄 때에는 다시 느린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즘 느린 것을 누리고 싶어지나 봅니다.

새마을호를 타니 서울까지 5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KTX에 비하면 2시간 정도 더 걸립니다. 그런데 요금이 2만원 정도 차이가 나니 시간당 만원의 차이가 나는 셈입니다. 제가 받는 한달 보시가 시간당 5000원도 안 되는 꼴이니 가만히 기차 안에 앉아만 있는 게 더 이익입니다. 오는 내내 자연과 함께 달리는 기분은 오랫동안 잊었던 자연을 다시 만난 듯 반갑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함께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기분은 서울 가는 길에서 만나는 친구와 같습니다.

좌석이 반대 방향이라 승무원에게 부탁해 자리를 바꿔보았습니다. 친절한 아저씨는 이곳의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면서 미소로 답해줍니다. 산과 들이 주는 풍경에 그대로 취했습니다. 사실 부산을 출발 전에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하게 느끼고 사는 것이 깨지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냥 두면 더 큰 일이 생길거야’ ‘이 번에는 꼭 결단을 내려야 해’라는 생각들이 어디에선가 계속 솟아났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화를 내는 감정에 불을 더 지피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시달렸더니 머리까지 아팠습니다. 다행히 느린 기차 안에서 강을 따라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차에 몸을 맡기니 마치 흐르는 강물의 엄마가 아이를 팔에 안고 부드럽게 흔들면서 달래주는 것 같았습니다.

굽은 나뭇가지를 펴려고 할 때 급하게 하면 부러지고 맙니다. 서둘러 결정하기 전에 느린 기차를 타고 시간을 보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은 그 생각들이 올라오는 강도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감정도 사그라 들었습니다. 저도 고집이 있나봅니다.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많은 것을 잃더라도 고집을 꺾지 않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지혜로운 판단이 아닌 것 같은데도 그냥 가고 싶습니다. 이런 욕구가 아직은 높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은 누가 시켜서 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그 길을 선택해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도 이 길이 참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지만 그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상대의 탓이 아닙니다. 내가 그 길을 가고 싶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 하림 스님
미타선원 주지

언젠가 제가 다른 선택을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또 그 길을 가고 싶어서 갈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그 생각과 감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이런 기분이 갈 것 같습니다. 아니 저 창밖의 산들이 오름이 있으면 내림의 선이 있듯 이 감정도 오르고 또 내리고 할 것입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야 잠재워지듯 이 마음도 언젠가 바다에 이르면 고요를 만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곳에는 해수관세음보살님이 계셔서 저를 고요와 평화의 곳으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진 오직 저 강물처럼 흘러만 갈 뿐입니다.

 

[1348호 / 2016년 6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