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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포교를 위한 강설과 그 인연 ②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인간불교 핵심입니다”

▲ 성운 대사가 1996년 홍콩 콜로세움 체육관에서 대규모 강설 법회를 갖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어떻게 수 만의 많은 청중들이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가장 주요한 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 가져오고 가정에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가져 와 불교가 사람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인간불교’에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즉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법문을 했다는 의미로,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노래와 무용을 법문에 융합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강연을 하기 전 먼저 문화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시대에 이러한 것은 아주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

빈승이 의란에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불법을 펼치는 경전 강설을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타이베이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의 정보력은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그 시대 법회에 관한 정보와 소식은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확산되는데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타이베이에서 강연을 했고 몇 년간 법문을 했어도 타이베이가 아닌 곳에서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타이베이 지련정사(志蓮精舍)에서 ‘불교와 생활’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이것은 제가 의란에서 ‘10년간 갈아온 칼’을, ‘홍법의 노하우’를 타이베이에서 펼쳐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청중의 반응이 열렬했지만, 300~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재가 신도의 건물에 매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더라도 다만 그 뿐이었습니다.

법회 이후 누군가 저에게 “국립예술관에서 강연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안했습니다. 그곳은 타이베이 식물원 안에 교육부장관 장기윤(張其)이 지은 예술관으로,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큰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강연을 했었지만 무슨 제목과 내용으로 강연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예술관에서 강연한 경험을 가진 이후 누군가 저에게 “‘중산당(中山堂) 광복홀’에서 강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하였는데 그곳은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곳으로, 그곳도 1000명 이상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저는 다시 그곳에서 강연을 하였고 역시 무슨 강연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창의적인 강좌는 해마다 법회를 개최할지라도 빈자리가 없도록 하는 주된 요인이 되었습니다. 두 곳에서 강연을 한 이후로 호응이 좋았기 때문에, 또 누군가가 빈승에게 “30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타이베이 국부기념관에서 강연을 하면 좋겠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마침 그 당시 저도 남부 가오슝에서 불광산을 창건하여 도량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빈승은 1977년부터 2006년까지 30년 동안 매년 국부기념관에서 3일간 연속으로 강연을 했는데 해마다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국부기념관이 개원한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장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청중들이 동참할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가장 주요한 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 가져오고 가정에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가져 와 불교가 사람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인간불교’에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즉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법문을 했다는 의미로,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의란에서 포교했던 빈승의 경험으로, 노래와 무용을 강좌 속에 융합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강연을 하기 전 먼저 문화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시대에 이러한 것은 아주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또한 의란에는 노래와 무용에 특별히 재주가 있는 청년이 있었는데 빈승의 제자인 자용 스님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훌륭한 무대를 선보이면서 획기적인 성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30년간 열린 강좌마다 제목도 30년간 모두 달랐는데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금강경’ 대의(大義)로 시작해 ‘유마경’ 대의, ‘아함경’ 선강(選講), ‘대보적경’ 요의 등등을 강설하였습니다. 불교의 부자가 되는 이치, 복덕과 장수의 이치, 인간관계의 이치로부터 참선수행법, 정토수행법, 율법수행법 등등을 강연하였습니다. 2002년에는 전통 ‘강창(講唱) 문학’의 방식에 따라 강설과 병창, 범패가 함께 어우러지는 ‘불교창송(唱頌) 강좌’를 열기도 했습니다. 2006년에는 엄장수(嚴長壽), 선국새(單國璽) 추기경, 타이베이 시장 마영구(馬英九)와 함께 하는 대화의 장 등 매우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일류 사회자로 ‘호수경(胡秀卿)’과 ‘구봉(勾峰)’이 있었고 대만어 일류 통역자인 자혜 스님, 일류라 할 수 있는 의란청년합창단과 무용단의 공연이 있었고 또한 일류라고 할 수 있는 청중들이 있었습니다. 복도까지 자리 잡은 일류 청중들은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사람 한 명 없이 항상 자리를 법회 내내 지켜주었습니다.

빈승 역시 정도를 지켰기에 30년간의 강연 중 불광산을 창건하고 있었음에도 불사와 관계되는 그 어떠한 말을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이 강좌를 통해 제자를 끌어 모으거나 불광산에 참배하러 오라고 각계 인사들을 불러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불법을 펼친다는 명분을 내걸고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자 기도하지 않았음을 자부합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였으며 그곳에서 불광산을 선전하거나 혹은 불광산의 세몰이를 하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빈승의 과거 행적과 일생을 되돌아보면 무슨 일을 하였든지 빈승은 항상 본분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길은 길로, 교량은 교량 그대로, 문화는 문화 본연으로, 교육은 교육 그 위치로, 신앙은 신앙 그 자체로, 청년은 청년으로, 출가자는 출가자로 인연 과보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인연이 잘못 얽히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빈승은 당당하게 물을 수 있습니다. 30년 동안 강연에서 빈승이 여러분에게 “불광산이 어려우니 도움을 줄 것을 바란다”는 말을 한번이라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30년간 함께 해 주신 청중들이 모두 증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빈승은 지난 30년간의 세월을 “홍법과 강연, 포교에 대해 온 마음을 쏟고 집중해서 배우는 기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이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 대화를 경청해 주세요. 그리고 되풀이 해 보세요.

“어디를 다녀오세요?”
“설법을 듣고 옵니다.”
“어느 스님께서 설법을 하셨는데요?”
“네, 아무개 큰스님이요.”
“설법이 좋았나요?”
“네, 아주 좋았어요!”
“어떻게 좋았나요?”
“무슨 말씀인지는 못 알아 듣겠어요.”

좋긴 좋았는데 못 알아 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저는 반복해서 탐구하고 마음을 쏟고 노력하면서 모든 부처님 말씀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모두가 알아듣고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법문을 했습니다. 이 역시 제가 일생으로 가장 부지런히 공부한 대목입니다.

나중에 저의 도반 자운 스님도 “자네가 말하는 불법은 옛 경전구절이 한마디도 없고 불법이 아닌 말을 할 때는 자네가 하는 모든 말이 모두 경전에 있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면서 공평하게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자운 스님 역시 홍법포교에 애쓰고 있었기에 저도 지기(知己)로 삼고 있었는데 저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같이 공부했던 터라 서로가 상대를 잘 알고 있는 도반 중의 도반이었습니다.

빈승은 홍콩의 콜로세움에서 강연을 하면서 국제적인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비록 국부기념관에서 30년을 강연했고 모든 강연이 성황을 이루었지만 특별히 언론보도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빈승의 강설은 여전히 대만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내 포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부기념관의 인연으로 인해 대만의 각 대학교와 교도소, 공장, 심지어는 외교부, 교육부 등과 같은 정부 부처에서도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빈승의 강연을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0년 홍법 강연 과정에서 가장 기록할 만한 일은 1988년 ‘곽도회(韜晦)’라는 사람이 저를 찾아와 홍콩 호만틴에 있는 법주정사(法住精舍)에서 ‘반야심경’을 강설했었고 나중에 다시 호만틴대회당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던 일입니다. 이러한 인연이 있은 후 불자들이 나서서 초청을 해 ‘야유마테이 양현리(梁顯利)지역업무센터’에서 강연을 할 수 있었고 다시 ‘샤틴대회당’으로 장소를 옮겨 강연하였는데 이곳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호응이 매우 열렬해 임요명(林耀明)·장려경(張麗瓊) 부부와 이소룡의 여자 친구인 ‘딩페이(丁)’가 빈승에게 홍콩 콜로세움에서의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추진했습니다. 콜로세움은 2만여 좌석을 가진 홍콩의 대표적인 체육관으로, 이 체육관을 가득 채울 많은 청중들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주최 측에서는 “입장권 한 장을 홍콩달러 20달러에 팔겠다”고 기획하였습니다. 만약 청중 인원이 2~3만 명에 달한다면 40~60만 홍콩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이 발생한다니 그 돈은 강연과 관련된 일체의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는 돈이었습니다.

콜로세움에서의 강연은 대만국부기념관의 기본 틀을 도입하기로 하면서 공연과 법문이 조화를 이루어 법문을 듣는 사람에게 재미도 있고 삶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일 년에 한 번씩 해마다 계속해서 강연을 하였는데 중국 본토에서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주최 측은 바깥 광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강연을 경청하도록 배려했습니다.

과거 홍콩 콜로세움은 홍콩을 대표하는 일류 연예인이어야만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빈승도 스타처럼, 불교적 신분으로 불법을 알리는 강연을 하게 되면서 많은 부담과 압력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들의 청중은 질서도 잘 지켰고 그래서 저는 매년 홍콩 콜로세움에서 3일간의 강연을 20년 동안 이어 왔습니다. 해마다 이어지는 강연은 마치 설을 쇠는 듯 한 불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는 가운데 진행됩니다. 이는 제가 국제적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특별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48호 / 2016년 6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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