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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페샤와르 - ① 아! 페샤와르

협 존자가 맑은 바람 드날리고 세친이 ‘구사론’ 지은 곳

▲ 페샤와르 박물관. 1907년 빅토리아 여왕 기념 홀에 세워진 페샤와르 박물관은 간다라 미술에 관한 한 세계 최대의 콜렉션 중 하나다. 현재 이곳 간다라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쿠샨, 파르티안, 인도 스키타이(샤카) 시대의 유물 1만4000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말대로라면 ‘향기로운 땅’인 간다라(Gandhara)의 고대 중심도시는 탁샤쉬라나 푸쉬칼라바티(오늘날 차르사다)였지만, 2세기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이 푸루샤푸르(Puruṣapur)를 수도로 정한 이후부터 이곳이 간다라의 중심이었다. 아마도 중앙아시아나 박트리아 땅에서 카이버 패스(고개)를 넘어온 그들이 탁샤쉬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인더스 강을 건너야 하였고, 푸쉬칼라바티로 가기 위해서도 카불 강과 스와트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인도서 중앙아시아 나가는 관문
‘변방의 요새’ 뜻 지닌 폐샤와르
무굴제국 시대 지은 목조건물에
뒤엉킨 전깃줄 만큼이나 혼잡

2세기 쿠샨제국 카니시카 왕이
푸루샤푸르를 수도로 정한 이후
‘향기로운 땅’ 간다라의 중심지

‘인간(Puruṣa)의 도시’라는 뜻의 푸루샤푸르(진제 역은 丈夫國)는 오늘날 페샤와르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라고 할 만한 카이버 패스 ―다리우스1세도 이 고개를 넘었고, 알렉산더도, 카니시카도, 나아가 현장도, 혜초도, 티무르도 바부르도 이 고개를 넘었다― 동쪽 50㎞ 지점에 위치한다. 하지만 인도에서 페샤와르는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관문이다. ‘변방의 요새’라는 뜻의 페샤와르(‘푸루샤푸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는 16세기 무굴 제국의 황제 아크바르가 붙인 이름으로, 이후로도 서북인도의 중심 도시였으며, 오늘날 역시 카이버 팍툰콰(Khyber Pakhtunkhwa, KPK로 약칭)의 주도(州都)이다.

▲ 무굴시대 이래 페샤와르는 16개의 문과 이를 잇는 벽으로 구획되어 ‘벽으로 둘러쳐진 도시(Walled city)’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5개의 문만 남아 있다. 시장 동쪽에 위치한 라호리 게이트. 라호르로 가는 문이다.

오늘의 간다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이버 팍툰콰’라는 주 명칭에 대한 이해가 조금 필요할 것 같다. 2010년 이전까지 이 주는 서북변경지역(North West Frontier Province, NWFP로 약칭)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파키스탄에는 이 밖에도 판잡, 신드, 발루치스탄의 세 주가 더 있는데, 이는 모두 판자비(Punjabis), 신디(Sindhis), 발로치(Balochis)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독 파슈툰 어를 사용하며 이 지역에서 천년 가까이 살아온 파슈툰(Pashtuns)의 땅만은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01년 이래 ‘서북변경지역’으로 불려왔다. 그래서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이 지역 파슈툰 족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2010년 지역의 주요거점인 ‘카이버’에 그들 종족의 옛 이름 ‘팍툰콰’(‘팍툰’은 파슈툰 족, ‘콰’는 심장의 뜻)를 붙여 ‘카이버 팍툰콰’로 바꾸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 고대왕국의 이름인 ‘간다라’와 파슈툰의 땅이라는 의미의 ‘파슈투니스탄(Pashtunistan)’, 인더스 강의 파슈툰 이름인 ‘아바신(Abasin)’, 파슈툰의 또 다른 이름인 아프간의 땅이라는 뜻의 ‘누리스탄(Nuristan)’ 등의 명칭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사실 파키스탄이라는 나라이름도 건국의 아버지 무하마드 알리 진나가 나라를 구성하는 다섯 지역, 판잡(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명칭을 합성하여 만든 것이었다.

요컨대 오늘날 옛 간다라 땅인 파키스탄 서북 변경지역은 파슈툰 족이 살고 있고,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동족인 카이버 고개 너머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으로 인해 치안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며, 그 중심도시가 고대 쿠샨제국 시대 수도였던 페샤와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불상의 발상지인 간다라의 불교유적지 대부분이 파슈툰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탈레반의 소행이기는 하였지만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의 대불(大佛) 2기를 로켓포로 폭파한 것에서 보듯이 그들은 불교유적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이번 답사여행에서의 위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서북부의 카이버 팍툰콰와 동부의 무자파라바드를 중심으로 하는 파키스탄 령 잠무&카슈미르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NOC(No Objective Certifi cated)라 불리는 별도의 여행허가증이 필요하며, 반드시 현지 가이드를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파키스탄에 입국한 다음날이었다. 금시초문이었다. 더욱 난감한 것은, 라호르에서 만난 여행사 직원에 의하면 그것을 발급받는데 한 달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라호르에서는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 가서 직접 부딪쳐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메트로 버스 이슬라마바드 쪽 종점(팍크 세크리타리아트 역)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내무국을 찾아갔을 때는 라마단 종료 축제(이둘 피트리)로 인해 나흘간의 연휴 중이었다.

연휴를 탁실라에서 보내고 다시 내무국을 찾았지만, 오전 내도록 로비에서 그들의 온갖 형식의 연휴인사만 구경해야 하였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면담한 NOC 담당 책임자는 우리의 사정은 딱하기는 하지만 허가가 나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실제 우리와 함께 기다린 여행사 직원인 듯한 이도 무자파라바드 건설현장에 들어가려는 한국직원의 NOC를 신청하기 위해 서류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 또한 한 달이 걸린다고 하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NOC 없이 여행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출발한 곳으로 추방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카이버 팍툰콰의 주도인 페샤와르는 NOC 없이도 여행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래, 가자. 페샤와르라도 가자.”

▲ 숙소 인근 시네마 로드 초입, 코하티 게이트 옆 망루.

거기서 차르사다에 갔다가 추방되면 다시 페샤와르로 돌아오면 되고, 마르단에서도, 밍고라에서도 다시 페샤와르로 돌아오면 되지 않는가? 인구 300만이 넘는 대도시에서 무슨 일이야 벌어지겠는가? 페샤와르는 지난 20년간 고대하였던 곳인데, 거기서 일주일인들 머물지 못할 것인가? 비록 지금은 흔적도 없다지만 카니시카 스투파가 세워졌던 샤지키데리도 거기 있고, 현재의 위치가 불분명할지라도 세친이 ‘구사론’을 지었다는 카니시카 가람도 그 인근 어딘가에 있었다지 않은가?

어디 세친뿐이든가. 무착도 법구도 간다라 출신이었다. 세친의 스승으로 알려지는 마노라타(manoratha) 즉 여의(如意) 논사도, 카니시카 왕께 진언하여 카슈미르에서 불전편찬(결집)을 주도한 파르슈바(Pārśva) 협(協) 존자도 카니시카 가람에 머물렀다. 현장은 그들로 인해 그곳은 언제나 맑은 바람(淸風)이 일었고 지극한 공덕(至德)도 끊어지지 않았다고 찬탄하였다. 협 존자는 ‘대비바사론’의 발의자였지만 거기에 그의 학설이 100여 차례 이상 언급된다. 예컨대 그는 아비달마를 “구경(究竟)의 지혜, 결단(決斷)의 지혜, 승의(勝義)의 지혜, 불오류의 지혜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 규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나이 80에 출가하였다.(협 존자는 모태 중에 60여 년을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 흰머리의 늙은이였다) 도성의 젊은이들이 호구를 면하기 위한 얕은꾀라고 비웃자 삼장의 이치에 달통하고 삼계의 욕망을 끊을 때까지, 6신통과 8해탈을 증득하지 않는 한 갈비뼈를 자리에 눕히지 않겠다고 맹서하여 3년이 지났을 때 누진(漏盡)과 숙명(宿命)과 천안(天眼)의 3명(明)의 지혜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협 존자’라는 이름으로 그를 공경하였다.

‘마명보살전’(구마라집 역)에 의하면 협 존자는 마명보살의 스승이다. 협 존자가 중인도에 갔다가 말솜씨가 뛰어난 외도인 그를 제자로 삼았고, 카니시카 왕은 그곳을 정벌하고서 강화의 조건으로 2억 금의 배상금 대신 부처님이 사용하던 발우와 마명보살을 요구하였다. 마명이 이곳 간다라(북인도)에 와 설법하였을 때 닷새를 굶은 말조차 먹이를 먹을 생각도 않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마명(馬鳴)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생애를 세간의 노래(kavya)로 짓는 등 뛰어난 방편으로 뭇 사람들의 공덕을 성취하게 하였다. 이에 사방의 모든 이들이 그를 공경하여 ‘공덕의 태양(功德日)’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다른 찬불승(讚佛乘)으로 불타의 전기와 함께 아쇼카 왕의 전기(‘승가나찰소집경’: 僧伽跋澄 역)를 쓴 승가나찰(僧伽羅刹) 역시 카니시카 왕의 스승으로 이곳 간다라 페샤와르에서 활동하였다.

협 존자가 맑은 바람을 드날린 곳도, 마명이 그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곳도, 세친이 카슈미르에서 돌아와 ‘구사론’을 지었던 곳도 페샤와르 어디쯤에서 일 것이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오늘의 그곳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아득한 옛날 그들 땅에 존재하였던 ‘카니시카 왕의 성탑사(罽膩吒王聖塔寺)’라는 이름의 탑원을 기억하고 있을까?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작리부도(雀離浮圖)’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 카불리 게이트(카불로 가는 문) 앞 대로변. 카불에서 카이버 패스를 넘어온 상인들은 저 문을 거쳐 큇사 카와니 바자르를 지나 당시 여행자 숙소(옛날에는 카니시카 왕이 중인도에서 얻어온 부처님 발우를 모셨던 탑사)였던 고르 가트리로 들어갔다. 지금은 이같이 알록달록 치장한 버스가 왕래한다.

우리는 다시 메트로 버스 이슬라마바드 쪽 종점인 팍크 세크리타리아트 역에서 라왈핀디 쪽 종점인 사다르 역으로 와(운임은 거리에 관계없이 20루피) 택시를 타고 대우 버스터미널로 갔다. 페샤와르 행 버스표를 샀다. 라왈핀디에서 겨우 175㎞, 차비 380루피(4300원 정도), 노쉐라를 경유하는 것임에도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아득히 멀리 있던 페샤와르가 이제 저 만치에 있다.

그런데 저 위대하였던 옛 도시를 이처럼 냉방이 잘 된 안락한 디럭스 익스프레스 버스를 타고 가도 괜찮은 것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고대도시로의 시간여행은 그에 걸 맞는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파키스탄 특유의, 알록달록한 원색의 그림을 그리고, 꽃 장식에 수술에 방울에 깃발까지 단 50∼60년도 넘었을 트럭 형 완행 로컬 버스가 제격일 것인데….

거의 비행기 탑승 수준의 짐 검사 몸 검사에 비디오 촬영까지 마치고서 버스는 출발하였다. 버스는 잠시 후 시가지를 벗어나 서쪽으로 뻗은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어제 왔던 탁실라를 지나면서 평원이 이어졌다. 이따금 숲이 스쳐가고 마을도 스쳐갔다. 강도 건넜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누런 황토물이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큰 강도 건넜다. 인더스 강이다. 현장은 귀국길에 탁실라에서 3일 걸려 저 강에 이르러 5∼6리나 되는 강을 코끼리를 타고 건넜다. 다른 이들은 배를 타고 건넜는데, 돌풍이 불어 인도의 온갖 꽃씨와 50여권의 경전을 잃기도 하였다.(이에 현장은 오장나국에 사람을 보내 음광부의 삼장을 베껴오게 하였다.)

얼마 후 버스는 다시 카불 강을 건너고 노쉐라에 잠시 정차하였다가 마침내 페샤와르에 들어섰다. 페샤와르, 아니 푸루샤푸르, 쿠샨제국의 수도, 세친(바수반두)과 무착(아상가)의 고향 푸루샤푸르에 왔다. 왁자지껄 요란함과 함께 뜨거운 공기가 온 몸을 감쌌다.

7월의 페샤와르는 뜨거웠다. 그리고 혼돈스러웠다. 카이버, 큇사 카와니, 안다르 샤흐 등 다섯 바자르(시장)가 시가 중심을 차지하는 올드 페샤와르는 무굴제국 시대 지어진 낡은 목조건물에 뒤엉켜 있는 전깃줄만큼 혼잡하였고, 이는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그들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검은 수염마저 이방인의 경계심을 자극하였다.

카이버 바자르 끝머리, 시네마 로드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비누와 세제만을 전문으로 파는 시장가였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저렴한 가격의 첫 번째 호텔에 갔지만 빈방이 없었다. 거기서 소개한 호텔이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호텔 지배인은 “NOC가 없다. 페샤와르 관광 후 마르단을 거쳐 밍고라로 여행하려고 한다. 어떻게 방법이 없냐?”는 우리의 하소연에 연신 ‘노 프로블럼’(문제없다)을 외치며 자기가 해결해줄 것이라 호언에 장담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 안전을 장담한다는 뜻인지, 혹은 퇴근시간이 되어서인지 겉옷 안쪽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프론트 데스크 옆 선반 위에 올려둔다.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그래, 여기는 ‘팍툰콰(파슈툰의 심장)’의 주도 페샤와르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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