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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포교를 위한 강설과 그 인연 ④

“사람이 없다고 법문 안했다면 오늘날 불광산은 없습니다”

▲ 불광산 성운대사가 미국 LA에 창건한 서래사.  대만 불광산 제공

“‘사람이 불도를 널리 알릴 수 있지만 불도가 사람을 키울 수는 없다(人能弘道 非道弘人)’는 말이 있듯이 불자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구상에 널리 퍼져나가도록 함께 노력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빈승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국제화와 본토화, 인간화, 생활화를 위한 과정에서 가치가 있는 일들은 아주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의회의 새해 개원을 축하하는 의식을 주의사당에서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백악관에서도 방문해 달라고 우리를 초청했으며 브라질 경찰 총감 부부도 불광산에 찾아와 삼보귀의를 했으며 또한 말레이시아 회교도 수상 몇명도 불광산 동선사(東禪寺)를 방문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버클리대학교 랭카스터 교수가 서래대학교의 총장을 맡아 주었으며 예일대학교 웨인스테인 교수는 학생들을 이끌고 불광산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 휘티어대학교, 남미주 칠레의 성토마스대학교, 홍콩대학교, 호주 그리피스대학교, 마카오대학교, 대만 중산대학교·보인(輔仁)대학교·중정대학교 등에서 저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빈승은 정말 부끄럽게도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오직 절 안에서 약간의 공부만을 했을 뿐인데 이러한 유수의 대학교에서 기꺼이 저를 격려해주고 저와 인연을 맺어 주었습니다.

이후로 상해 동제(同濟)대학교, 산동대학교, 호남대학교, 절강대학교, 동북에 있는 길림대학교, 남창대학교, 광저우 중산대학교, 운남대학교 등에서도 서로 저에게 강연을 요청하였고 명예교수로 정중히 위촉해 주셨습니다. 제가 하문대학에서 ‘공유(空有)의 관계’에 대해 강연했을 땐 총장이 직접 함께 동참했고 4000여명의 학생들이 강연을 들었습니다. 2014년에는 진강시(鎭江市) 정부의 초청을 받고 진강체육관에서 ‘꿈의 힘을 보았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진강시 당서기와 시장 등 8000여 명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저는 강연을 하면서 빔프로젝트 등 첨단장비를 동원해 강의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교를 더욱 대단하게 생각하고 불교가 더 이상 낙후되지 않았음을 알도록 했습니다.

그 외에도 사천 중경 화엄사, 삼협(三峽)박물관, 호남 악록(嶽麓)서원, 내몽고 우란차터극장, 상해중화예술궁(세계박람회 중국관), 북경인민대회당, 국가박물관, 대련인민문화구락부, 산동빈주(濱州)명주대극원, 광서인민대회당 등지에서 거동이 불편한 몸이지만 직접 찾아가 강연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남경대학교, 상해교통대학교, 복단대학교, 심양·하얼빈 등지에서도 초청이 끊이지 않았지만 지금 저 개인이 연로하고 몸이 쇠약한 탓에 뜻대로 인연을 맺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인연과 공덕으로 인해 인간불교가 중국대륙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고 쉽사리 말하지 못하지만 원래 중국불학원 승가청년이었던 학성(學誠), 성휘(聖輝), 심징(心澄), 융상(隆相) 스님 등이 이제는 모두 중년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들 모두 가 미래 중국불교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 중국불교협회에서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해 학성 스님이 회장으로 당선되고 전국부회장 수십 명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중국대륙에서 몇 년 만에 있는 불교의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특별히 국제불광회 중화총회 비서장 각배(覺培) 스님이 의흥(宜興) 대각사에서 ‘인간불교 교류우의회’를 거행한 인연으로 대만에서 지명도가 있는 청년 스님들과 일부 도반들을 초청하여 함께 북경으로 가서 학성 스님이 중국불교협회를 이끌게 된 것을 축하하도록 했습니다.

2015년 4월께 강소성 양주의 도시설립 2500주년을 축하하고자 꽃이 피고 따스한 봄에 빈승은 감진(鑑眞)도서관 양주강단에서 사흘간 ‘반야심경’을 강설했습니다. 강설에는 시장이 직접 찾아와 축사를 하였고 매일 4000~5000명의 청중들이 입장권을 구입해 경청했습니다. 강연의 마지막 날에는 절반 이상의 청중들이 눈물을 보이면서 “떠나는 것을 너무나 아쉬워했다”고 제자가 당시의 풍경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난 4월에는 인민출판사에서 저를 위해 ‘여행자를 위한 365일-중화문화와 불교보전’을 출판해 주었는데 첫 쇄에 110만부를 인쇄하고 출판발표회를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거행했습니다. 나중에 ‘인민일보’에서 저를 인터뷰하러 찾아왔는데 중국대륙에서 인민을 존중하고 저로 인해 인민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어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홍법 강연을 하는 가운데 저는 과거의 강택민, 호금도 주석에서 현재의 시진핑 총서기까지, 중국대륙의 지도자들을 여러 번 만날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만나기 전에 제가 만나본 지도자로는 인도의 네루 총리, 필리핀 마카파갈 대통령이 있었고 빈승은 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태국 푸미폰 국왕의 초청으로 황궁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싱가포르에서 홍법 강연을 할 때 리셴룽 총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연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2015년 3월 토니 애벗 호주 총리가 남천(南天)대학교 준공식에 참가하여 축하해 주었습니다.

과거 설했던 강연을 말할 것 같으면 몇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어느 한번은 제가 미국 LA에서 강연할 때로, 갑자기 불교의 법복처럼 생긴 옷을 입은 서른 명 정도 되는 기독교도들이 와서 저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기독교 내부의 불교파로, 그 근거지가 샌디에이고에 있다면서 강연을 듣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나중에는 다시 서래사로 와서 저와 왕래를 가졌습니다.

미국불교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역사학자 당덕강(唐德剛) 교수의 말에 의하면 멕시코 중부에 아카풀코라는 도시가 있는데 시민 전부가 불교신자라는 것을 연구해서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1500년 전의 일로, 대략 중국 남북조(南北朝) 유송(劉宋) 시기 중국에 거주하던 인도 출신 비구 혜심(慧深) 스님이 홍법 포교를 위해 건너왔다고 합니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보다 1000년이 빠른 시기로, 그곳에 불교적인 기초를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 있는 수많은 옛 유물 가운데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돌로 조각된 닻’이 혜심 스님께서 남기신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LA에서 도량을 창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LA타임즈’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9명의 출가자들이 LA에서 홍법포교하는 사진을 실은 신문을 어떤 신도가 저에게 보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그 신문을 제대로 보관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를 연구한다면 불교의 씨앗이 미국에 전파된 역사가 100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어느 곳에도 종적을 남기지 않고 보이는 이외의 것에 치중하는(處處無跡 聲色外威儀)’ 빈승의 성격으로 인해 그 어떤 사적도 남기고자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백년불연(百年佛緣)’과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를 구술하는 것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지 준비를 거친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 이래로 강연의 대상인 청중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가장 특수했던 것은 감옥에 있는 수감자들이었을 것입니다. 1987년경 빈승이 군부대의 초청을 받고 신점(新店), 암만(岩灣), 태원(泰源) 등 군 교도소에서 일련의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1953년으로, 의란 교도소에서 처음으로 포교의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저의 재소자 교화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만 전역의 각 처에 있는 감옥 가운데 제가 교화의 인연을 맺지 않은 곳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수시로 대만의 각 교도소에서 포교를 하였던 관계로 빈승은 첫 번째로 법무부 교화사로 위촉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한번은 화련교도소로 교화를 나갔는데 그 안에는 2000여명의 젊은이들이 수감되어 있었고 모두가 중범죄로 형기가 10년 이상이었습니다. 제가 강연을 하면서 그들에게 만약 여러분 모두가 나를 따라서 출가하면 여러분들을 이끌고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여 공덕을 지을 것이니 그리하면 사회가 바뀌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한 토성(土城)교도소에서 단기출가를 거행하고 삼귀의 수계법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몇년전 제가 가오슝여성교도소에서 600명의 젊은 여성수감자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남편에게 명의를 빌려주어 금융법을 위반하거나 혹은 마약을 한 남편을 대신하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녀자들의 위대한 정조를 느꼈고 남자들이 정말 부끄러운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형인들이 풀려난 이후 쉽게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자신들도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교도소와 사회를 이어주는 ‘중도의 집’을 설립하려고 생각했었습니다. 형기를 마치기 수개월 전 그들을 절로 데려와 우리들이 심리적인 계도와 관심을 주도록 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는 서 있어도 안 되고 앉아 있어도 안 되고 누워도 안 되고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등 너무나 많은 ‘안돼’가 있기 때문에 저는 합법적인 상황에서 사찰에 와서 그들이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도록 하여 그들이 적극적이고 선량하고 부드럽고 자비한 마음으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형기가 거의 다돼 가니까 그들도 도망가지 않을테고 범죄의 길로 다시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빈승의 이러한 생각은 동의를 받지 못했습니다. 법무부에서는 법령상의 온갖 제한에 근거하고 특히 수감자들이 정말 도주할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나서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우리는 이 일을 하고자 두 군데의 절을 제공하려고 준비하였으나 결국에는 만들어 내지 못해서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무부에서도 불광산자비기금회와 협력하여 타이난 명덕교도소에서 마약사범전담반 한 반을 맡아 불광산 스님들이 교화에 힘쓰고 있으며 저도 이를 위해 전후임 법무부장관 료정호(廖正豪), 마영구(馬英九) 등과 여러 번에 걸쳐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줄곧 걸어온 강연의 인연을 되돌아보니 처음부터 많은 청중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53년 빈승이 의란에서 강연을 했을 때가 마침 6월로, 날씨는 매우 무더웠는데 시간이 되어 단상에 올랐지만 단상 아래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평생 시간을 엄수하고 약속을 지키는 성격이라서 단상에 올라서서는 단상아래에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던 10~20명의 사람들이 그제야 조금씩 앞으로 와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빈승이 처음 홍법 강연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렇듯 민망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빈승이 대만에서 60년이 넘게 홍법포교하면서 절 안에 머물러있던 불교를 사회 속으로 널리 홍포하고 법당에서 학교로 들어가게 하고 산림 속에서 도시로 나아가게 하고 작은 동네마당에서 나라의 대회당으로 진출하게 하고 대만에서 국제무대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사람이 불도를 널리 알릴 수 있지만 불도가 사람을 키울 수는 없다(人能弘道 非道弘人)”는 말이 있듯이 우리 불자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구상에 널리 퍼져나가도록 함께 노력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빈승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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