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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빈승의 수난기-하

“어른 노릇은 나이와 법랍으로 하는게 아닙니다”

▲ 26세 때 성운 대사는 의란 뢰음사에서 “별다른 특기가 없다”고 생각해 글을 써서 홍법에 나서기로 다짐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스스로 생각해보니 어른께 부끄러운 짓으로 윗사람에게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승가들이 이러한 말씀이나 생각을 가진 어른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절 집안에서 생존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오 선생이 중국 노인들은 권한은 물려주지 않으면서 청년들에게 도리어 몽둥이질을 하려고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1948년 봄, 저는 남경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남경 화장사(華藏寺)는 지용(智勇)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저와는 동기로 형제처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돌아온 저를 보고 갑자기 “주지를 맡지 않겠다”면서 주지를 양보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화장사에서 짧은 기간 동안 주지를 맡았습니다. 그 당시는 마침 서방회전(회해전투 徐蚌會戰 : 1948년 11월6일부터 65일간 중국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 군대를 전략적으로 공격한 전투로 양측에서 7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함. 역자 주)이 일어났을 때로, 길거리에는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지용 스님은 ‘승려구호대’를 결성하여 길거리에 널린 시신을 수습해 주기로 발심하였습니다. 반년 정도 대원들을 모으니 100~200명이 모이게 되어 함께 승려구호대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누군가 이는 잘못된 것이라면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매장할 수 있느냐며 그들의 자손이 죽은 가족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을 하려면 먼저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디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대만에 가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용 스님은 승려구호대를 조직하려는 것을 갑자기 포기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네가 안 가면 내가 갈게”라고 저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당시에 연안(延安) 대학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거나 대만의 국민당 쪽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젊었고 절 안에서 살다 보니 사회의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해 국민당이나 공산당을 구분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남경에서는 은사 스님께서 당신이 잘 알고 지내던 손입인(孫立人 : 항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 역자 주) 장군과 이미 연락을 취해 놓으셨기에 저는 은사스님으로부터 은전 20원을 받아 들고 시키는대로 대만으로 건너왔습니다.

대만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저에게 연안으로 가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제가 대만과 연안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에 대해서도 개념이 없었고 오로지 갈 곳이 있다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몰랐기에 태평륜(太平輪) 해난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상해에서 배를 타고 대만으로 왔던 것입니다.

대만에 도착한 것은 1949년 봄으로, 정월을 지난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숙소가 없었고 앞날이 막막한 어려움에 부딪쳤으나 고난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고맙게도 오백웅(吳伯雄) 선생의 부친인 오홍린(吳鴻麟) 선생께서 저의 호적 만드는 것을 도와주셨기에 남아있을 수 있었고 나중에는 중력(中壢)에 있는 원광사(圓光寺)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5월이 되었을 때로 기억하는데 대만의 행정장관 진사수(陳辭修)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승려 100여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중에는 자항(慈航) 스님과 중년에 출가한 황려초(黃臚初, 율항 律航 스님) 장군과 물론 저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잡혀간 사람들은 대부분 총살을 당하거나 포대자루에 담겨서 바다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도원(桃園)에 있는 한 창고에 23일간 갇혀있었는데 다행히도 여름이라 모두들 땅바닥에서 잠을 자도 춥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국정(吳國禎)의 부친인 오경명(吳經明) 노선생과 손입인 장군의 부인 손장청양(孫張淸揚) 여사, 입법위원 동정지(董正之)와 감사위원 정준생(丁俊生) 등이 우리들의 구명을 위해 발로 뛰어다니며 호소하였기에 백색공포 시대에서 우리는 결국 석방되었습니다. 이는 비교적 심각한 재난을 겪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석방되고 나서 고맙게도 원광사에서는 우리를 예전처럼 받아주었고 우리는 더욱 부지런히 사중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물을 긷고 장작을 져 나르고 수레를 끌고 화장실 청소 등을 기꺼이 해냈습니다. 당시 주지 묘과(妙果) 노스님께서는 아마도 저의 부지런함이 마음에 드셨는지 묘율(苗栗) 법운사(法雲寺)에 친히 저를 데리고 가서 저에게 그곳에서 산림을 돌보도록 하셨습니다. 저의 첫 책인 ‘소리없는 노래(無聲息的歌唱)’의 대부분이 바로 그곳 산 위에 있는 원두막 바닥에 엎드려서 쓴 것입니다.

1953년 새해를 맞이하고 음력 설 전에 강습회가 타이베이로 이전하게 되면서 저도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신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초청을 받아 의란에서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강설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인 모리시타 다이엔(森下大圓)이 쓴 책으로, 제가 일본어를 배우면서 더불어 번역을 하였는데 대만 독자들이 아주 중요시 여겼기에 이 경전을 강설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대만의 228사건이 발생한지도 이미 어느 정도 시일이 흘렀기 때문에 사회적인 ‘375임대료 절감정책’, 기초단체장 선거로 사회의 백색공포 분위기가 이미 약간씩은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란에서 저는 수시로 경찰의 끊임없는 괴롭힘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매주 한밤중에 찾아와 잠자는 저를 깨워서 심문하였고 심지어는 홍법 포교할 때 쓰는 환등기 필름에 일본글자가 있다고 경고를 하는 등 지속적으로 감시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포교에 열중하느라 저도 목숨에 상관하지 않았고 곳곳의 경찰들과 술래잡기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결국은 대만의 불교를 위해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고생의 맵고 신맛은 한두 마디의 말로 다 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세월동안 국가와 사회에서 부딪친 차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불교계 어른 스님들로부터 받은 압박은 실로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동초 스님을 위해서 잡지 ‘인생’을 편집하고 있을 때 책이 나오기로 약속드린 전날 밤 저는 강자취(江子翠)에서 걸어서 만화(萬華) 기차역까지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역까지 가서 또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북투(北投)로 갔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잡지가 젖을까 걱정이 된 빈승은 두루마기를 벗어서 잡지를 덮어 싸서 둘러메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아마도 그 때가 밤 11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발행인 동초 스님이 잡지를 받아보시고 아주 기뻐하시며 저에게 아주 책임감이 많다며 칭찬하셨습니다. 밤이 너무 늦어 타이베이로 돌아갈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법장사에서 자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스님은 빈승에게 점심때 손님을 접대해야 하니 남아서 손님접대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원장의 부탁을 받은 저는 기꺼이 그릇들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식사를 할 때가 되어서는 스님이 갑자기 저를 부르더니 어찌 주방으로 가서 밥을 먹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큰 모욕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도 학교 교장을 했고 주지도 했고 현재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데 당신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조차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저는 “네, 주방에 가서 먹겠습니다”하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주방에 가보니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빈승이 아는 사람이 없으니 들어가서 밥을 먹기가 민망해서 하는 수 없이 조용히 산을 걸어 내려왔습니다. 법장사 계단이 산 아래까지 아마도 400계단이 넘을 것인데 제가 내딛는 계단은 솜을 밟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아서 어떻게 산 아래까지 걸어 내려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별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조금의 원망도 없었으며 앞으로는 절 문을 활짝 열어 다른 사람이 와서 밥 먹는 것을 환영해주리라고 원력을 세웠던 것입니다.

훗날 불광산 타이베이 포교당 보문사에는 정말 두 테이블의 음식을 더 준비해서 날마다 이름을 모른 채 오고가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불광산 개산초기 10~20년간 불광산을 찾아오는 모든 출가자들에게 하루 잠자리와 세끼 식사의 공양 이외에도 떠나갈 때는 2만원을 담은 봉투를 차비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빈승이 하는 많은 사업의 이름을 ‘보문(普門)’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의 심가정(沈家禎 : 미국거주 유명한 사업가, 불자로 미국불교회를 창립. 역자 주) 거사의 추대를 받고 저는 ‘밀레르빠 장학금’ 심사위원을 맡았는데 매번 가오슝에서 타이베이에 회의를 하러 가면 600위안의 차비를 주었습니다. 한 번은 높은 상금으로 불교를 위해 저술하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나설 것이기에 3000위안에 5만자의 논문을 쓰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니 상금을 5만 위안으로 높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의 의장을 맡은 남정(南亭) 스님은 수차에 걸쳐 다른 위원들에게 제 말을 듣지 말라고 하면서 이런 건의를 제시하면 안 된다며 저를 나무랐습니다. 이런 강압적인 태도가 여러 번 반복되니 결국 그 당시 젊은 혈기의 빈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치며 “어른 노릇은 나이로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니 어른께 부끄러운 짓으로 윗사람에게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승가들이 이러한 말씀이나 생각을 가진 어른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절 집안에서 생존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오(李敖 : 대만의 작가, 정치평론가로 대만의 사상 자유운동을 하다가 5년8개월간 투옥. 역자 주)선생이 중국 노인들은 권한은 물려주지 않으면서 청년들에게 도리어 몽둥이질을 하려고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더 이야기 한다면 백성 스님은 중국불교회 이사장이라는 높은 직책으로 여러 번에 걸쳐 제가 출국 방문하려는 기회를 막았습니다. 어느 한번은 월남의 선정(禪定) 스님이 대만불교의 정황을 알고 저에게 월남을 방문하여 당신이 주관하는 사회복지기금발전회의에 참석해달라고 특별히 편지를 보내 초청했습니다. 물론 중국불교회도 그들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출국을 하려면 필히 출국 사전회의를 해야 했고 국민당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감시해야만 출국할 수 있었으며 출국하려면 필히 그들 단체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빈승은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오슝에서 밤차를 타고 타이베이에 올라오니 마침 그분들이 회의를 시작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백성 스님이 저를 보더니 “당신은 무엇하러 온 거요?”라고 물었고 “저도 월남에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출국회의에 참석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다시 “우리 모두 당신을 싫어하니 돌아가시오”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평소 절제를 잘하지만 그 당시 저는 일순간 반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내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회의장 밖으로 나오니 회의장에 있던 입법위원 막담운(莫淡雲) 여사가 좇아 나와 “그냥 이렇게 돌아가시게요?”라고 했고 저는 “이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제가 어쩔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분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기에 저는 기차역으로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가오슝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 빈승이 일생으로 겪은 고난과 굴욕, 상처, 괄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불가에는 인내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참는 것은 힘이 될 뿐만 아니라 지혜가 됩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2호 / 2016년 7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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