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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 애끊는 헤어짐이여

기자명 이미령

할머니는 덩그러니 남은 자신에게 혀를 찼다

▲ 일러스트=강병호

이른 아침입니다.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습기를 머금은 대지에는 새벽 기운이 서늘합니다. 새들이 지저귀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동차를 몰고 일터로 향합니다. 이 이른 아침.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것이
더 어렵다 생각한 적 있지만
이른 새벽 찬 기운 속 허전함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일 수도

2600여년 전, 인도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은 보름달이 두둥실 뜨는 서늘한 저녁에 신하들을 불러 놓고 “지금 무엇을 하면 가장 좋을까?”를 물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 파란 새벽기운이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이 시각에 눈을 뜨고서 말끔하게 세수를 하고 난 뒤에 이렇게 여쭙는군요.

“모든 생명이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는 이 시각, 무엇을 하면 가장 좋을까?”

며칠 전에 받은 스님의 편지에 제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랑하는 분을 떠나보낸 애잔하고도 허탈한 소회가 깔깔한 여운을 안겨줍니다.

이 이른 새벽,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을 마음에 담아두고서 가만가만 들춰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애별리고라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뜨거운 욕정을 나누었던 이성과의 이별뿐이겠습니까? 마음과 마음이 흐르고 흘렀던 이와의 헤어짐도 지독한 서글픔을 안겨줍니다. 오죽하면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며 하나 마나 한 후회마저 하게 만드는 것이 애별리고입니다.

하나의 생명인 이상, 우리는 어떤 이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덟 가지 괴로움 가운데 애별리고와 원증회고가 있지요. 이 두 가지 괴로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피치 못할 감정입니다.

강의시간에 슬쩍 이렇게 질문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과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 가운데 차라리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까?”

수강생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더군요. 이런 건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둘 다 지독한 슬픔과 괴로움을 안겨주니 어느 게 낫다 못하다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종종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보다는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이 더 우리를 힘겹게 한다고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뒤에는 차라리 그리워하는 따뜻한 느낌이라도 있지, 미워하는 이와 마주치면 한순간에 화라락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님, 스님의 편지를 받고서 몇 날 며칠을 지내오고, 이렇게 이른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 답장을 쓰려다보니, 그 애별리고의 심정이 얼마나 잔인한 아픔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온전히 그 사람을 향해 열려 있던 친애의 창문이 느닷없이 확 불어 닥친 거센 바람에 닫히고, 창살마저 부서졌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은애(恩愛)의 감정은 나를 키운 이슬입니다. 그 사랑이 내 목숨 뿌리를 촉촉하게 적신 덕분에 이만큼 내가 자라 있으니까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소리 없이 내 삶의 기운으로 젖어 들었던 은애의 감정을 ‘이제는 여기서 그만!’ 하면서 잘라내야 하는 것이 애별리고의 심정 아닐까요.

애끊는다는 것.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 바로 애별리고이겠지요. 바깥의 누군가를 향해 토해낼 수도 없고 그저 지그시 제 몸 속에 담아두고서 시달려야 하는 그 심정에 오장육부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 이제야 생각났습니다. 아직은 어둑한 이른 새벽에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게 된 이유를 말이지요.

아주 어렸을 때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지요. 외할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웠습니다. 늘 바깥에 정인(情人)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북에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채 내려와 자식을 여섯이나 낳고 길렀건만 외할아버지가 작고 깡마른 외할머니에게 해준 것은, 나이 어린 외손녀인 제가 봐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시고, 외할머니 홀로 남으셨습니다.

언제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외할아버지의 부재(不在). 그런데 어느 이른 새벽, 쯧쯧 하며 혀를 차는 소리에 깬 적이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운 채로 외할머니가 내신 소리입니다. 반듯하게 천장을 향해 누우신 할머니는 늘 오른팔을 들어 손등을 이마에 대시곤 하셨습니다. 그 자세로 할머니는 쯧쯧 하며 혀를 차신 것입니다. 어린 저는 무슨 까닭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할머니는 먼저 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계신다’고 단정지어버렸습니다.

인생살이를 장야(長夜)라고 하여, 길고도 오랜 밤중이라고 경전에서는 비유하지요. 그 밤중에 옆을 따뜻하게 덥히던 이가 불현듯 그 자리를 비운 채 밤이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새벽의 서늘한 기운에 잠에서 깨어나기 십상인데, 깨어나 보니 옆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자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빈자리.

서늘하게 식어버린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부재의 존재감에 뼈가 시려오는 것이 애별리고입니다. 어쩌면 할머니는 그렇게 혼자 남겨진 당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쯧쯧 혀를 찼을지도 모릅니다.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정 보다는 덩그러니 남겨진 당신의 처지에 어쩔 줄 몰라서 내신 소리였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마음의 근육을 길러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와는 언젠가 헤어진다는 것을 늘 단련하고 또 단련해서 마음에 단단히 근육을 키우는 것이지요. 몇 해 전에 읽었던 책에서 ‘문간 수행’이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하던 가족에게 권하는 명상법입니다. 밖에서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현관 앞에 서서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어쩌면 내가 이 문을 열고 들어서서 사랑하는 이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럴 리가 없어’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어’라는 것.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 속상하기만 합니다. 

스님, 너무나 순수하고도 진지하게 살아오신 은사스님이시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욱 크실 것입니다. 잘 가셨을 거예요. 성원 스님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시며 아미타 부처님 나라에 도착하셔서, 여기에서와 다름없이 108배를 하시려고 두 손을 지금 가슴에 모으고 계실 거예요.

오늘, 이른 아침에는 저도 서쪽에 계신 혜인 스님을 향해 합장을 올립니다.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52호 / 2016년 7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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