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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페샤와르③ ‘구사론’ 작론처와 고르 카트리

왕이 부처님 발우 모시려 대규모 불탑·승가람 건립

 
▲ 카니시카 왕이 중인도 파탈리푸트라(화씨성)를 정벌하고 배상금으로 받은 부처님 발우를 모신 곳으로 추정된 고르 카트리 측문(사진 맨위), 힌두사원의 반얀나무(작은 사진 왼쪽), 발굴현장(작은 사진 오른쪽).

“대 스투파 서쪽에 있는 오래된 가람은 카니시카 왕이 세운 것으로, 높다란 2층집(重閣)들과 늘어선 묘당들, 층층의 누대(層臺)와 그 사이로 동굴처럼 깊숙이 들어선 집(洞戶)들로 이루어져 있다. [왕은 이곳에] 고승을 초대하여 그들의 뛰어난 덕을 현창하기도 하였다. 비록 허물어졌을지라도 여전히 빼어나다. 승도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다. 가람을 세운 이래 간간이 뛰어난 사람(異人)이 배출되었다. 논을 지은 이들과 깨달음을 증득한 이들로 인해 맑은 바람(淸風)이 불고 지극한 공덕(至德)도 이어져 왔다.

고르 카트리는 ‘전사들의 무덤’
네모꼴 성소가 지금은 시민공원
불교는 현장 방문때 이미 쇠퇴

불발 모신 가람이 힌두사원으로
바뀌었다가 이슬람 도래 후 파괴
발우는 물론 불교 흔적도 없어
불교 고향서 불교는 이제 이방인

세 번째 2층집에 파르슈바(Pārśva: 脇) 존자의 방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졌지만 그 분을 기리는 표식이 세워져 있었다. (중략) 협(脇) 존자의 방 동쪽에 오래된 방이 있는데, 세친보살께서 여기서 ‘아비달마구사론’을 제작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방을 봉하고 그 이유를 적어두었다.”

▲ 힌두사원의 반얀나무.

▲ 발굴현장.

이는 현장법사가 간다라의 대도성 푸루샤푸르(오늘날 페샤와르)에 있던 카니시카 가람을 순례하고서 적은 여행기의 한 대목이다. 당시 카니시카 가람의 스님들은 세친이 ‘구사론’을 저술하였던 방을 별도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혜초도 이곳 ‘카니시카(葛諾歌)’라고 이름하는 절(寺)에 세친(天親)보살과 무착보살이 머물렀다고 전하고 있다. 세친이 ‘구사론’을 지었다는 이 절은 페샤와르 어디쯤일까?

현장은 당시 간다라에는 비록 허물어지고 황폐해졌을지라도 1000여 곳의 승가람이 있었다고 하였고, 오공은 카니시카 왕의 후원에 의해 건립된 간다라의 절로 계니타왕 성탑사(罽膩吒王聖塔寺)와 계니타왕 연제쇄사(演提灑寺)와 계니타왕 벌용궁사미사(伐龍宮沙彌寺) 세 곳을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장은 이 절에 대해 다만 카니시카 대탑 서쪽에 있다고 하였고, 혜초 역시 ‘카니시카’라는 이름의 절에는 항상 빛을 발하는 대탑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카니시카 사리용기가 발견된 샤지키데리, 아니 아쿠나바드의 대탑지 서쪽일대가 바로 세친이 ‘구사론’을 지었다는 카니시카 승가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제는 ‘바수반두법사전’에서 ‘구사론’의 작론처를 아유타국(Ayodhyā)으로 전한다. 그러나 현장에 의하는 한 아유타국은 대승유식의 본거지로, 무착이 자씨(慈氏: 미륵)보살로부터 ‘유가사지론’ ‘장엄대승경론’ ‘중변분별론’ 등을 품수 받은 곳도, 세친이 무착의 문인제자가 암송하는 ‘십지경’을 듣고 처음 대승심을 일으킨 곳도 여기였고, ‘유식론’을 저술한 곳 또한 인근의 코삼비였다. 이에 대해 진제는 무착의 본거지를 푸루샤푸르(丈夫國)로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승을 불신하던 세친은 형인 무착에 의해 푸루샤푸르로 호출되어 대승의 묘의를 배운 후 ‘화엄경’ 등의 대승경론과 ‘유식론’ ‘섭대승론석’ 등의 대승 논서를 지었다.

무착과 세친은 형제 사이로 이곳 푸루샤푸르 출신이다. 종국에는 같은 길(유가유식종)을 가지만, 처음에는 사상의 노선을 달리하였다. 세친은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카슈미르에서 유부 비바사(毘婆沙)를 배웠다. 그 후 경량부의 관점에서 유부의 교의를 비판적으로 조술한 ‘구사론’을 지었을지라도 그가 유부논사이고 ‘구사론’이 유부논서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현장은 무착이 화지부에 출가하였다가 바로 대승으로 전향하였다고 전하지만, 그렇더라도 진제가 전한 것처럼 그가 대승논사로서 푸루샤푸르에서 활동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시 푸르샤푸르의 대규모 탑사(塔寺)인 카니시카 승가람은 설일체유부의 스승들께 기진된 승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협(脇) 존자나 여의(如意) 논사와 같은 유부의 조사가 지극한 공덕을 이어왔고, 현장이 방문할 당시에도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협 존자는 카니시카 왕의 귀의를 받고 불전의 결집을 주도한 당대의 현성으로 마명의 스승이었다. 카니시카 승가람은 바로 협 존자에게 바쳐진 승원이라 말할 수 있다.

▲ 세친보살이 ‘구사론’을 저술한 곳으로 추정되는 샤지키데리(오늘날 아쿠나바드) 일대의 공동묘지.

‘대비바사론’ 상에서 간다라논사는 서방의 아비달마논사였지만, 세친 당시에도 간다라 일대는 여전히 설일체유부의 영향권이었을 것이다. 비록 피르판잘이라는 거대한 산맥에 가로막혔을지라도 간다라는 카슈미르의 인접국이었고, 현장 방문 당시는 카슈미르의 속국이었다. 무착이 출가한 화지부 또한 유부의 지말 부파로 ‘오분율’을 전승하였는데, 1968년 간다라 인근인 판잡 주 솔트산맥의 쿠라(Kura)에서 이 부파명칭이 새겨진 석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세친이 ‘구사론’을 지은 곳은 아유타국이라기보다 푸루샤푸르라고 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진제가 무착의 본거지를 푸루샤푸르로 전한 것은, 추측하자면 그의 고향이기도 한 이 도시의 학술적 권위를 빌린 것이 아닐까? 현장과 진제가 이곳 푸루샤푸르를 각기 소승(유부)과 대승(무착과 회심한 세친)의 본거지로 전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일찍이 인도 고고조사국 초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커닝햄(1814∼1893)은 올드 페샤와르 시장 통의 세티 거리(Sethi street) 끝에 있는 고르 카트리(Gor khatri)를 카니시카 대탑으로 추측하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추측은 샤지키데리에서 카니시카 명문의 사리용기가 발굴됨으로써 파기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아흐마드 하산 다니(Ahmad Hasan Dani) 박사를 비롯한 다수의 역사학자는 이곳을 불발(佛鉢, 부처님의 발우)이 안치되었던 탑사(塔寺)로 비정하였다. ‘마명보살전’이나 ‘부법장인연전’에 따르면 카니시카 왕은 중인도의 파탈리푸트라를 정벌하고 배상금의 일부를 변재보살인 마명과 불발로 요구하였는데, 그 때 얻은 발우를 고르 카트리에 모셔 두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카이버팍툰콰 관광협회에서 발행한 페샤와르 안내서에도 이곳을 ‘불발 탑으로 알려진 불교승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비정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른 것이다.

“[푸루샤푸르] 왕성 안 동북쪽에 오래된 기단이 하나 있다. 옛날 부처님의 발우가 안치되었던 보대(寶臺)이다. 여래께서 열반한 후 발우는 어쩌다 이 나라로 흘러 들어와 수백 년간 정중히 공양되었다. 그러나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돈 끝에 지금은 페르시아에 있다.”

이 불발에 대한 이야기는 법현의 여행기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옛날 월지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이 나라(弗樓沙國: 푸루샤푸르)를 정벌하고 부처님의 발우를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는 공양을 크게 베풀어 삼보께 공양하고 나서 큰 코끼리를 치장하여 부처님의 발우를 실었다. 그러나 코끼리는 땅에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발우를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에 싣고 8마리의 코끼리로 하여금 끌게 하였지만, 역시 꿈쩍하지 않았다. 왕이 부처님의 발우와 인연이 없음을 알고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불탑과 승가람을 세워 지키는 이를 두고 크게 공양하였다.

▲ ‘사분율’의 ‘수계건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정각을 얻으신 후 7일 간 해탈의 즐거움을 즐겼을 때 조와 우바리라는 이름의 상인 형제가 보리죽(蜜麨)을 공양하였는데, 부처님은 사천왕이 바친 네 개의 돌 바루를 하나로 포개 공양을 받았다. 사진 1은 상인형제가 공양을 바치는 모습의 부조.(부분) 네 개의 바루를 포갠 흔적이 뚜렷하다. 동경국립박물관. 2세기. 아프가니스탄 카피시 출토.

이 절에는 대략 7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 승려들은 발우를 꺼내 신자들과 함께 온갖 공양을 올렸다. 그런 후 점심을 먹었다. 해질 무렵 향을 사를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부처님의 발우는 두 말(斗) 정도를 담을 수 있으며, 검은 빛깔의 잡색이다. [사천왕이 보시한 네 개의 발우를 포개어 하나로 만들 때 생긴] 네 경계가 분명하였고, 2푼 정도의 두께로 매우 광택이 났다. 가난한 이는 꽃을 조금만 던져도 가득 찼지만, 큰 부자는 많은 꽃으로 공양하고 다시 백 천만 곡(斛: 1곡은 10말)으로 공양하려고 해도 끝내 채울 수 없었다.

여기서 월지 왕은 후기 쿠샨의 키다라(Kidāra) 왕으로, 그가 세운 승가람에 700 명의 승려가 거주하였다면 매우 큰 규모의 승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법현이 갔을 때(402년)는 존재하였던 불발이 현장이 갔을 때(630년)는 어찌하여 빈 보대만이 남아 있었던가? 법현은 사자국(스리랑카) 편에서 이 발우와 관련하여 천축의 도인이 외운 경설을 전하고 있다. 애당초 바이샬리에 있었던 부처님의 발우는 지금은 간다라에 있지만, 몇백 년이 지나면 서쪽의 월지국에 이르게 될 것이고, 이후 우전국(호탄), 쿠차국, 사자국, 중국(漢地), 중천축, 도솔천, 그리고 마침내 [원래 생겨난 곳인 수미산의] 알나산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페샤와르 사람들도 월지 왕이 불발을 모시기 위해 지은 불탑과 승가람을 고르 카트리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곳 고르 카트리가 카니시카 왕이 중천축 파탈리푸트라에서 발우를 갖고 와 모셔 둔 곳이라고 한다면, 발우와 함께 온 마명보살도 여기에 머물렀을까? 그는 여기서 부처님의 일대기(‘불소행찬’)를 세간의 곡조(kavya)로 노래하였던가?

고르 카트리는 ‘전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동서로 200m쯤 떨어져 육중한 대문을 기점으로 하여 벽으로 둘러쳐진 네모꼴의 성소(聖所)로, 현재는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새벽에는 산책을 위해, 낮에는 더위를 피해 남녀노소가 모여 들었다. 관광 안내서에 따르면 고르 카트리는 오랜 역사에 걸쳐 변신을 거듭해 왔다.

▲ 카니시카 왕이 중천축에서 가져온 불발은 여러 곳을 거쳐 지금은 아프가스탄의 카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높이 1.75m, 무게 400㎏. 이 발우는 상단에 덧새겨진 코란 구절로 인해 2001년을 전후한 탈레반의 대대적인 불교 유적 파괴에서도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대규모의 승가람이 있었다지만, 불교는 이미 현장이 간다라를 방문하였을 때 쇠퇴하고 있었다. 당시 간다라 백성들은 대다수 이도(異道)를 공경하고 있어 정법을 믿는 자는 그 수가 적었다. 승가람의 수는 1000여 군데나 되었지만 허물어지고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하였다. 수많은 스투파 역시 거의 파괴되었을 뿐더러 신에게 제사지내는 천사(天祠)도 100여 군데나 될 정도로 이교도가 뒤섞여 있었다고 현장은 전하고 있다.

불발을 모신 승가람도 이렇게 하여 힌두교 사원으로 바뀌었고, 이후 이슬람이 도래하면서 불교사원은 물론이고 힌두사원도 파괴되었다. 무굴제국 시대 고르 카트리는 카이버 패스 너머 중앙아시아나 중원의 파탈리푸트라(오늘날 파트나)로부터 이른바 그랜드 트렁크 로드(grand trunk road)를 따라 페샤와르에 온 대상들의 숙소(‘카라반 사라이’)로 바뀌었고 모스크도 들어섰지만, 이후 19세기 시크교가 북인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스크 대신 고락나트(Gorakhnath) 사당을 짓고 여행자숙소를 그들의 관청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고르 카트리에서 불발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경내 박물관에도 쿠샨 시대 점토로 만든 조악한 형태의 항아리 몇 점이 진열되어 있지만, 거의 대개 무굴 시대의 생활 용구였다. ‘1912년’에 지어졌음을 강조한 페샤와르 소방서 건물이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였다. 사라이는 옛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었지만 가게로 바뀌는 중인지 텅 비어 있었다. 고락나트 힌두(시바)사원은 비록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향불을 피우고 있었다. 마구 뻗어 내린 반얀 나무의 뿌리가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였다. 문을 두드려 들어가 보았다. 무슬림 청년 두 명이 관리하고 있었다. 맨 흙바닥임에도 신발을 벗고 들어오란다. 무슬림이 어찌 그같이 말하냐? 하니, 여기는 성소(聖所)란다. 그의 말이 갸륵하다. 페샤와르에서 이로 인한 갈등은 없느냐? 하니, 종교 간의 공존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갸륵하였다.

불발(佛鉢)을 기리는 묘당이라도 세워졌으면 이곳의 화려했던 역사의 편린을 상기할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쉬웠다. 공원에 놀러 나온 페샤와르 시민도 박물관에서도 불발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곳출신의 유명한 불교논사인 세친과 무착은 물론 마명이나 그의 스승 협 존자에 대해서도 아는 이가 없었다. 불교학의 고향에 왔지만, 불교는 완전한 이방(異邦)이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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