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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천왕과 비사문천

불전 속 사천왕은 부처님이 공양 받을 그릇 바치며 등장

▲ 붓다에게 발우를 공양하는 사천왕들. 라호르 박물관 소장. 간다라 지역. 기원후 1~2세기경.

한국 불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신중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사천왕(四天王)일 것이다. 일주문을 거쳐 법당에 이르기까지 사천왕문을 거쳐야하고, 법당 앞의 불탑에서도 거기에 조각된 사천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법당의 후불탱화나 부도탑에서, 또는 사리함이나 사경 권머리의 변상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신들은 모두 무장(武裝)을 한 모습으로 무기를 들고 험상한 얼굴로 서있다.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그리고 남방 증장천왕이 이들이다.

간다라의 불전 부도에 등장하는
사천왕들은 터번을 쓴 귀족 모습

바르후트 스투파 북측 기둥 새긴
쿠베라는 북방천왕인 비사문천
북쪽은 풍요와 영성 보석 넘치는
낙원이어서 재물신으로 표현돼
비사문천 지닌 물건에 불탑 많아
한국 비사문천서도 자주 나타나

이 사천왕은 불교의 호세신(護世神)으로 세계의 경계를 지키는 신이며, 각각의 신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동서남북의 네 방위(方位)를 지킨다. 호세신(護世神: Lokapāla)은 성소나 불당의 출입문을 지키는 등의 좀 더 구체적이고 협소한 기능을 맡고 있는 수문신(守門神: Dvārapāla)과 구분된다. 또한 땅(토지의 구역)을 수호하는 수지신(守地神: Kṣetrapāla)과도 구분되며, 아마도 훨씬 많이 알려진 후대의 8방위의 신들, 팔방신(八方神 Dikpāla)과도 그 역할과 의미가 다르다.

팔방신의 존재는 밀교 전통 속에서 특히, 만다라 작법이나 화단의궤(火壇儀軌) 작법에서 훨씬 잘 나타나며 힌두교의 전통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 즉 신들의 유래나 방위의 배치가 일단의 차이를 두고 힌두교와 일치하는데, 이는 베다 시대의 제단 건축이나 힌두교 건축의 평면 배치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팔방신이 밀교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고는 있지만 불교에서 그 지위는 사천왕보다 훨씬 열등하게 나타난다.

▲ 쿠베라. 바이슈라바나의 원형. 마투라박물관. 대략 기원후 3세기경. 풍만하고 배부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천왕 신앙은 비교적 일찍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아함경(長阿含經)’이나 ‘증일아함경’에 이미 사천왕(四天王 Cāturmahārājika)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경전들의 성립시기에 의문이 든다면, 우리는 도상을 통해 사천왕의 등장을 적어도 기원후 1∼2세기로 추정해볼 수 있다. 간다라 지역의 인도 불전 조각 가운데 간혹 등장하는 사천왕의 발우(鉢盂)공양 장면 등에서 귀족의 복장을 한 사천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전기에 따르면,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두 명의 상인으로부터 음식물 공양을 받았으나 그것을 받아먹을 그릇이 없어 곤궁함을 느꼈던 차에 사천왕이 내려와 발우를 바쳤다. 그러나 네 개의 발우를 다 사용할 수 없어 네 개의 발우를 하나로 합치는 기적을 행하여 공양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간다라 불전부도 속에 빈번히 채택되는 소재인데 이 때 등장하는 사천왕들은 터번을 쓴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사천왕의 신앙은 비록 초기의 형태가 현재의 모습처럼 무장한 장군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대략 기원전후에 이미 등장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등장을 좀 더 이른 시기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후트(Bhārhut) 스투파의 북측과 남측 기둥에 새겨진 수호신장은 각각 ‘쿠베라 약샤’(Kupiro yakho), ‘비루다카 약샤’(Viruḍako yakho) 라고 기록한 비문을 통해 이들을 사천왕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쿠베라는 비사문천(북방천왕)을, 비루다카는 남방 증장천왕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머지 두 신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두 신상과 명문을 통해 본다면 거의 사천왕을 의미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이 신들은 약샤(Yakṣa) 즉 야차(夜叉)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야차로 불릴 수 있는 무수한 하위 신들의 그룹 가운데 대표적인 신들인 셈이다.

쿠베라를 비사문천과 동일시하는 이유는 이미 샤타파타 브라흐마나(Śatapatha brāhmaṇa)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문헌 성립 이전부터(그러니까 불교 등장 전후부터) 이 둘을 동일시하기 때문인데 이 후로 불교 내에서는 주로 쿠베라보다 바이슈라바나(Vaiśravana) 즉 비사문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힌두 문헌들 속의 쿠베라 역할과 불교 경전의 비사문천은 그 기능과 의미가 다소 다르기 때문에 두 종교적 전통 속에 있는 쿠베라와 비사문천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쿠베라의 외형적 특징들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이 두 명칭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마도 불교는 그 등장의 매우 초기부터 이 비사문천을 수용해서 불교적으로 발전시켜온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금동사리외함의 비사문천.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통일신라 신문왕 당시. 682년.

여기서 이 쿠베라-비사문천 즉, 북방 다문천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바이슈라바나를 음사하여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 불렀고 이 신이 담당하는 방위가 북쪽이므로 통상 북방천왕이라 부른다. 사천왕 가운데 이 천왕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 신이 후대에서도 독립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원도 불교 이전까지 거슬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를 거치면서 호국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쿠베라-비사문천은 히말라야에 거주하는 천신으로 북방을 수호하는 야차들의 왕이다. 이 신은 특별히 ‘재보(財寶)’의 신으로 불리는데, 재물의 수호자이면서 재물의 기여자이기도 하다. 이 북방(北方)과 재물의 관계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있어 북쪽은 풍요와 재물이 넘치는 방위이며 패러다이스의 공간이 펼쳐지는 곳이다. 고대 인도인들의 낙원은 신의 거주처인 산과 아주 인접한 곳에 존재하며, 때로는 그 산 자체이기도 하다. 신화에 따르면, 신들의 거주처 카일라사는 히말라야의 일부를 이루는 산으로, 패러다이스의 공간 우타라쿠루(Uttrakuru)를 지나면 나타나는 곳이다.(또는 그 반대로, 히말라야를 넘어야 우타라쿠루가 등장하는 것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여기서 우타라(uttara)는 바로 북쪽(위쪽)을 말한다. 즉 풍요와 영생, 보석이 넘치는 낙원은 북쪽에 존재한다. 따라서 북방을 수호하는 비사문천이 재물의 신으로 등장하는 것이 우연한 설정은 아니다.

재물의 신이자 방위의 신으로서 갖는 이러한 초기의 특징은 인도 도상 속에 나타나는 그의 특징들로 대변된다. 풍만하고 불룩한 배를 갖고 때로는 손에 가죽으로 된 보석주머니를 들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보석주머니는 잘록하고 긴 모습을 하는데, 이 주머니를 대신해 때로는 몽구스를 손에 움켜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부터 몽구스는 인도의 대표적인 애완동물의 하나였다. 인도에서 불결한 동물로 인식되는 개와 달리, 몽구스는 충직하고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뱀, 쥐와 같은)과 곤충들을 막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때로는 몽구스가 비사문천의 보석을 토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재물의 신인 비사문천(또는 쿠베라)의 특징을 반영함과 동시에 몽구스의 충직함을 반영한다.

혹자에 따라서는 이 몽구스가 비사문천과 함께 등장하는 이유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몽구스의 생태를 고려해보아도 거의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인도의 영향임을 더 분명히 말해줄 뿐이다. 몽구스와 비사문천이 결합되는 맥락은 인도적인 토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신겸(信謙) 스님의 아미타극락회도(阿彌陀極樂會圖) 속의 비사문천. 1828년. 신겸 스님은 19세기 초 경상도 지방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이었다. 용산국립박물관 소장.

그러나 이 몽구스보다 더 빈번히 비사문천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바로 불탑이다. 한국내의 비사문천도 거의 대부분 불탑을 들고 있다. 한국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비사문천이 작은 불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불탑이 비사문천의 지물로 나타난 것은 아마도 중앙아시아의 변형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전해졌다고 보아야한다. 비사문 북방천왕이 불탑을 들고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대부분 경전의 번역은 빨라야 7세기 이후의 것들인데 위작의 가능성도 높은 것들이다. 비사문천의 지물로서 불탑(또는 寶塔)이 등장하는 것은 불탑숭배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탑은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국가의 번영과 풍요를 가져올 수 있는 상징적 보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재물과 불탑은 교환가치를 갖는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호국경전의 하나로 ‘금광명경(金光明經)’이 유행한 사실에서도 사천왕이나 비사문천의 유행을 뒷받침한다. 현존하는 중앙아시아의 사본 가운데 ‘금광명경’의 필사본 파편들이 많은 이유가 이를 말해준다. 이 경전 내의 사천왕 신앙은 동아시아의 호국불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잘 알려졌다시피, 코탄(Khotan)의 성루(城樓)나 성벽 또는 성문에 비사문천을 다수 조성한 흔적이 보고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건국신화 속에 비사문천을 등장시키는 사례를 볼 때 호국(護國)신앙과 더불어 사찰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가람신(伽藍神)이나 국가의 수호신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사문천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당송(唐宋)대에 중국으로 전해져 귀족 가문의 조상신으로 등장하거나 국가의 반란군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수호신으로서의 면모는 한층 고양된 것으로 보인다. 

심재관 상지대 교양과 외래교수 phaidrus@empas.com


[1355호 / 2016년 8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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