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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빈승이 ‘대사’로 불리는 연유-하

“대사라고 불리지 않아도 성운은 성운일 뿐입니다”

▲ 2005년 7월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 등 한국의 스님들을 맞은 대만 불광산 스님들이 경내 공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남이 나를 대사라고 부르지 않고 작은 스님이라고 불러도 나쁠 것은 없고 젊음을 나타내니 아마저도 저는 더욱 기뻐할 것 같습니다. 젊은 스님들이 보통 ‘작은 스님’으로 불리고 있지 않나요? 불교에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네 가지 작은 것(四小不可輕)’이란 말이 있듯이 작다고 해서 그리 기분 나빠할 것도 없습니다.”

빈승은 적당한 호칭은 존경의 의미이자 예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에서는 이 호칭으로 자주 분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항 스님은 남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친근하다며 좋아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지만 불교계에서는 ‘선생님’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며 이를 비판하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항 스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청년들을 문밖으로 배척하면서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교사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유치원 교사도 장 선생님, 진 선생님, 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왜 자항 스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안되는 것이었을까요?

또한 인순(印順) 스님은 원시불교의 논전에 대해서 실제로 연구를 하셨기에 스님을 ‘논사’라고 해야 했지만 학생이나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도사(導師)’라고 하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교에 고1반 지도교사, 고2반 지도교사, 고3반 지도교사처럼 학교에 지도교사 제도가 있듯이 이 ‘도사’라는 호칭에 별다른 이의가 없는 것이지만 인순 스님이 ‘도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던 당시 불교계에서는 많은 비평과 이론이 있었고 심지어 반대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부르면 안 될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학생들이 인순 스님을 이끌어 주는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데 ‘도사’라고 부르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남이 존경 받는 것이 질투가 났던 것일까요?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칭호로 불리던 간에 자기 스스로 분칠하고 장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기꺼이 긍정하는 마음으로 칭호를 그렇게 불러야만 합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을 우리가 교수나 선생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호칭은 그 당시의 정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한 여성에게 우리가 부인, 아줌마, 아가씨 등 어떻게 부르던 간에 모두 일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빈승은 불광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에 대한 호칭은 나에게 많은 말썽을 가져올 테니 나를 ‘대사’라고 부르지 말고 나를 부르는 직함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생각해보더니 “우리들이 ‘대사’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보통 모든 소임자를 다 ‘스님’이라고 부르는데 구별할 방법이 없지 않나요? 자비로서 저희들이 ‘대사’라고 부르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해 저는 지금과 같이 계속 ‘대사’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큰 스승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기실 남이 나를 대사라고 부르지 않고 작은 스님이라고 불러도 나쁠 것은 없고 젊음을 나타내니 아마저도 저는 더욱 기뻐할 것 같습니다. 젊은 스님들이 보통 ‘작은 스님’으로 불리고 있지 않나요? 불교에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네 가지 작은 것(四小不可輕)’이란 말이 있듯이 작다고 해서 그리 기분 나빠할 것도 없습니다. 작은 한 방울의 물이 대지를 적실 수 있고 작은 불씨가 평원을 다 태울 수 있으며 작은 여자아이가 앞으로 황후가 되고 국모가 될 수 있으며 작은 남자아이가 앞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고 국가를 지도하는 인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작다고 무엇이 나쁩니까? 크고 작은 것은 어우러지고 크고 작음에는 차별이 없을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도 부처님을 우리의 대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등 열 가지 명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상의 열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을 ‘세존’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래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석가세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저를 대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저를 법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이의가 없습니다. 심지어 ‘성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왜 남들처럼 ‘법사’라고 하지 않고 ‘대사’라고 부르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러한 많은 호칭들이 있는데 ‘대사’라고 해서 크고 ‘법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작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실 법사라는 호칭은 ‘법을 스승으로 삼고, 법으로 사람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니 ‘대사’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나중에 사회에서 저를 ‘정치화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실로 의외였습니다. 그 당시에 빈승은 평생에 걸쳐 정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종일관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직책을 걸려고 하지 않았으며 정부에 보조를 요구한 적도 없어서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에 약간의 불만과 불편이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저를 찾아오고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된다고, 혹은 제가 사회와 민중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저를 ‘정치화상’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저를 너무나도 풍자적으로 부르는 것으로, 저는 제가 ‘정치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가에서는 본래 ‘대문을 활짝 열어서’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고 관심을 주고 왕래하면서 불법을 전해주고 있는데 남녀와 신분, 직업, 크고 작음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알고 싶다고 오겠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분들이 불광산에 오는 것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마음 부처 중생 등 이름에 차별을 두어 따지지 않으니 얻고 잃을 것이 없습니다. 실상이 그러합니다. 나중에 영화감독 류유빈(劉維斌) 선생이 저에게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정치화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스님에 대한 존경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의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어도 남들이 ‘정치화상’이라고 불러주지 않습니다. ‘정치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스님에게 힘이 있다는 것이고 대중을 위해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로부터 저는 ‘정치화상’이라는 이 네 글자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왜 빈승을 단지 ‘정치화상’이라고만 부르는 걸까요? 사실 저도 설법하고 강연하면서 서적들을 출판했는데 왜 저를 ‘작가화상’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요? 제가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좋아하고 발표까지 했지만 아무도 저를 ‘문학화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저도 신도들처럼 자선구호에 열심이었는데 왜 아무도 저를 ‘자비화상’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요? 교육에 열정을 갖고 많은 대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세우고 심지어는 세계 각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저에게 명예박사, 명예교수를 몇십 개나 수여했는데 왜 저를 ‘교육화상’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요?

그러나 개의치 않습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이런 호칭이 있고 저런 호칭은 없는 것에 대해 크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성불(成佛)’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름으로, 마음과 부처, 중생 등 이 셋이 본래 차별이 없는데도 우리가 거짓된 이름 속에서 득실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따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빈승이 세계 각처를 다니면 누구는 “성운노화상이 오셨다”고 하고 누구는 “성운스님이 왕림하셨다”고 하고 혹은 “성운장로가 오셨다”고 말하는 등 그 표현도 매우 다양합니다.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저는 인연을 따르며 이의를 제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빈승 성운은 성운이고 여러분이 부르는 것은 단지 형상에 따른 대명사일 뿐입니다. 저를 성운이라고 불러도 필경 저는 성운이고, 저를 성운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제가 성운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저를 대사라고 불러도 제가 대사라고 할 수 없고 저를 대사라고 부르지 않아도 제가 대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사이던가 대사가 아니던가 모두 남들이 부르는 호칭일뿐 제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르든 부르지 않던 사람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를 통해 저는 ‘대사’라는 호칭의 연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지금 가장 좋아하는 호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빈승’이라고 하겠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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