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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폭염과 빗물

기자명 최원형

빗물 활용해 옥상 푸르게 하면 도시 열섬현상도 줄어

쏟아지는 비 받아놓기만 해도
온난화 대책에 큰 효과 있어
비 없는 것은 열대야와도 관련
편리함 누린 대가 고통으로 와

염천에 떠오르는 풍경 하나가 있다. 마당가 풀들이 축축 늘어지고 매미 울음소리마저 더위가 삼켜버린 날이면 뙤약볕 아래 달궈진 마당이며 담벼락 그리고 골목길 어귀까지 물을 뿌리곤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다. 아버지가 호스로 물을 뿌리시는 틈바구니에 나도 슬쩍 끼어 시원한 물세례를 받곤 했다. 대문간에 있던 진돗개 진수도 꼬리를 흔들며 낑낑댔고 결국 물세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진수가 물기를 온몸으로 털기 전에 얼른 저만치 피해 달아나야했으나 나는 매번 그 시기를 놓치고는 내키지 않는 물세례를 덤으로 받아야 했다. 젖은 옷이 마르는 동안 더위는 잊혀졌다. 어느 날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더위가 심했었는지는 기억에 잘 없다. 다만 나는 아버지가 하시던 걸 흉내 내기로 했다. 수도꼭지를 틀자 돌돌 말려있던 호수를 타고 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수를 들고 담벼락을 향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하얀 도화지처럼 바싹 마른 담에다 대고 이런저런 그림과 글씨를 그리며 한참을 놀았던 것 같다. 어느새 담은 물을 완전히 뒤집어쓰고 진회색으로 변했다. 그날 퇴근하신 아버지는 나를 칭찬해주셨다. 시키지 않아도 물청소를 해놓았다면서. 장난이 뜻하지 않게 칭찬으로 바뀌자 나는 이르게 아버지가 귀가하시는 토요일이면 퇴근 시간에 맞춰 마당이며 담벼락에 물을 뿌리곤 했다. 뜨거운 열기가 가시는 시원함 때문이었는지 마른 담벼락에 각양각색의 물 그림을 그리는 놀이 때문이었는지 어쩌면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열심히 물을 뿌리곤 했다. 때로 아버지 귀가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면 그 사이 담벼락은 다 말라갔지만 마당에 깔아놓은 보도블럭 사이사이로 흙이 물과 만나면서 내던 물 냄새인지 흙냄새인지를 아버지는 대번에 알아보셨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시며 누가 이런 기특한 일을 했느냐며 아무개냐 라고 나를 찾으셨고 나는 기다리던 바로 그 시간을 행복하게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을 뿌려 시원하게 만드는 방법은 아버지만의 독창적인 게 아니라 시원한 여름을 나는 오랜 지혜며 과학이다. 여름에 물을 뿌리면 물이 증발하면서 주위의 열을 흡수하는 기화열로 인해 실제로 섭씨 2도 정도 온도가 내려간다. 일본에도 ‘우치미즈’라 불리는 지혜로운 전통이 있다. 더운 여름날이면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같은 시간에 바가지나 물동이를 이용해 길에다 물을 뿌린다. 마을사람들이 합심해서 마을의 최고 온도를 낮추는 방법이다. 최근 지구온난화 대책으로 우치미즈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물을 뿌려 열기를 식히는 일 자체는 환영할만한 일이나 어떤 물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환영의 정도는 다를 듯하다. 기껏 비싼 에너지를 들여 정수한 수돗물을 도로에 뿌리는 일은 여러 가지로 낭비다.

8월 초순에 슬로바키아 NGO ‘사람과 물’의 미카엘 크라빅 회장이 방한했다. 서울시가 주최한 빗물축제에 초대받아서 온 그는 폭염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오늘날 폭염의 원인이 바로 빗물 낭비’ 때문이라는 좀 생소한 조언을 했다. 어딘가 물이 있다면 그 물이 더운 날 기화하면서 뜨거운 열기를 가져가 폭염은 피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도시를 둘러보면 물이 있을 곳이 별로 없다. 도시에 숲이나 나무가 드물고 대부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으니 비가 내려도 스며들 곳이 없다. 하수구를 타고 빗물은 곧장 강을 거쳐 바다로 흘러가버린다. 그 어딘가 있을 물이 꼭 강일 필요는 없다. 빗물을 잘 받아두기만 해도 된다.

빗물을 받아두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이득이 많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빗물은 홍수를 유발하지만 그 물을 받아두고 필요할 때 적절히 쓰게 되니 홍수예방이 가능하다. 도심 빌딩마다 있는 옥상에 녹화를 하게 되면 자연히 빗물을 가둘 수 있어서 녹색댐 역할을 하게 된다. 옥상이 푸르면 도시의 열섬현상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번 여름에 비다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던 것과 이번 폭염, 열대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려보니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홈통이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은 바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그 홈통에다 발을 씻었던 기억도 난다. 만약 빗물 활용에 일찍 눈을 떴더라면 홈통의 빗물을 잘 받아둬 그 물을 더울 때 수돗물 대신 뿌려도 좋았을 듯싶다. 빗물의 가치를 미처 몰랐거나 빗물을 받아둬야하고 관리해야하는 번거로움 대신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물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편리함을 누린 대가는 고통의 모습을 하고 편리함을 누린 이에게 꼭 찾아온다. 그 인과의 이치를 빨리 알아채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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