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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새로운 불교운동을 위한 첫걸음-상

“신불교의 핵심은 사찰 공유제와 교리·교제의 혁신”

▲ 성운 대사는 농구를 좋아한다. 불광산 청년 포교를 위해 함께 농구하는 성운 대사의 모습이 이채롭다. 대만 불광산 제공

“농구는 개인기를 발휘하는 것보다 ‘팀플레이’라는 단체 창작이 필요하며 팀원을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 줄줄 알아야 하며 서로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농구를 하면 불교 젊은 승가들의 많은 문제점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빈승은 일찌기 청소년 시기에 불교단결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농구경기에 팀플레이 정신이 필요하듯이 개인기를 드러내는 것보다 공동 창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빈승의 불교혁신 운동은 일생의 원력이었습니다. 출가자로서 자신을 완성하는 것은, 빈승의 모든 일상은 ‘불교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기실 청소년 시기의 저는 아주 우둔하고 무지했습니다. 어려서 외할머니를 따라서 암자에 가봤기에 관세음보살을 알았지만 석가모니불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12세에 출가해 ‘서하산’에서 공부하였는데 절 가운데 있는 법당도 대웅전이 아니라 ‘비로보전’이라고 하였고 그 안에 비로자나불을 모셨습니다.

물론 이 부처님이 우리 출가인과 무슨 관계인지 알아보려 하니 선배들이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이고 별도로 또 보신불이 한분 계시고 석가모니불은 단지 응현하신 분이라고 다들 설명해 주었습니다. 석가모니는 25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난 응신불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빈승은 아주 어렸기에 왜 한분 부처님이 계신데 또 법신이 계시고 또 보신이 계시고 또 응신이 계시다는 말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점차 성장하면서는 사회로부터 승려들이 하는 일이 없는 ‘부랑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며 불교 신도들에게 출가인을 부처님께 빌붙어 사는 존재로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교는 생산에 종사하고 혁신을 해야 하고 출가 비구는 의사, 교사, 포교사로 비구니들도 교사, 간호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책을 쓰고 이론을 수립하는 등 불법을 펼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대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승려는 교육을 실천해야지 독경만 해서는 안됩니다.

남경 ‘서하산’에 있었던 7~8년의 세월에서 저는 불교가 단지 독경염불에 의지해서는 안되고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오육(五育 : 지덕체(智德體)와 단체활동, 예술감각. 역자 주)을 겸비한다는 말처럼 특히 체육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체력이 없는 일부 젊은 승려들이 마치 입정에 든 노승처럼 눈을 감고 앉아 정신을 키운다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 불교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요?

저에게는 별다른 능력이 없었고 그 당시 나이도 어렸기에 불학원 자치회 회장을 맡았지만 단지 체육활동을 강조할 생각만 했습니다. 지금은 사회 인사들도 빈승이 농구를 좋아하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는데 사실 빈승이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청년들이 배우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농구라는 운동이 비교적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청소년 때부터 불교단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구는 개인기를 발휘하는 것보다 ‘팀플레이’라는 단체 창작이 필요하며 팀원을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 줄줄 알아야 하며 서로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농구를 하면 불교 젊은 승가들의 많은 문제점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구에서는 일초 혹은 영점 몇 초를 따지게 되니 동작이 느린 사람은 행동이 빨라야 되므로 공부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농구를 통해 인간의 잠재력을 드러내게 되니 적극적이고 신속하며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또 젊은 승가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농구장에서 심판의 호각소리가 울리면 반칙한 사람은 바로 손을 들어야 하고 상대방에게 사과의 제스처를 해야 하는데 이는 불교의 참회로, 죄를 멸하는 의의와 부합됩니다.

농구와 불교가 교의적으로 무엇이 서로 위배되는 것이 있을까요?

슛을 던지는 것으로 말한다면 농구는 힘과 용맹함으로만 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집중을 필요로하는 운동입니다. 소위 마음을 따라서 경계가 바뀐다는 말처럼 마음의 집중정도에 따라 골대에 공을 넣어 득점할 수 있습니다. 집중정도가 약하다면 골을 넣지 못하겠지요.

체육운동은 제가 불교를 혁신하려는 첫 번째 생각이었습니다.

18세에 초산불학원에 간 저는 새로운 생각과 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54운동(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중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독일이 가진 산둥반도의 권한 반환 △일본의 21개조 요구 폐지 등을 주장했으나 전승국들의 이해관계에 밀려 중국의 요구는 묵살되었고 패전국인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 산둥성의 권익을 일본에게 양도하라는 일본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의 학생들이 5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벌인 반대집회를 열었다. 역자 주)을 알게 되었고 삼무일종(三武一宗 : 중세 중국에서 발생한 네 차례의 대규모 불교 탄압으로,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 무종, 후주 세종이 주도한 법난. 역자 주)의 법난을 알게 되었다. 태허대사가 주장한 ‘교산혁명’(革命 : 법맥에 따라 사찰유산을 이어받는 옛 규칙을 바꿔 시방승가의 공유제로 하여 수행자를 공양하고 청년승가를 육성하고 불교 사업으로 사용하는 것. 역자 주), ‘교리혁명’(理革命 : 세상 사람을 우롱하는 귀신 미신적인 행위를 혁신하는 것. 역자 주), ‘교제혁명’(制革命 : 승가의 생활, 조직제도를 개혁하여 시대의 필요에 적응하는 승단을 만드는 것. 역자 주) 등 삼혁(三革) 운동을 알고 불교를 위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꼈습니다. 인광대사의 ‘상좌를 함부로 거두고’, ‘계법을 함부로 수계하고’, ‘방부를 함부로 받아주는’ 삼람(三濫)도 알게 되었으며 빈승 역시 이에 동의하였지만 이것이 불교혁신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를 혁신하려면 불교를 위해서 대학교를 몇 군데 만들고 불교를 위해서 병원을 몇 군데 짓고 불교를 위해서 신문사도 몇 군데 세우고 불교를 위해서 방송국(당시는 아직 텔레비전이 없었음)도 몇 군데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심지어는 불교를 위해서 많은 농장과 많은 공장을 세워서 승가가 스스로 생활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회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발심해야 하는데 그것은 보살도를 발심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행동입니다. 저는 큰길 작은 골목 곳곳에 많은 표어를 붙여 불교신앙에 대한 민중들의 생각을 일깨워주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제 자신에게 신문과 잡지를 출판할 힘이 없었지만 적어도 불교내용의 포스터를 주요 버스정류장이나 여객부두에 붙여서라도 민중들이 불법의 참뜻을 알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태허대사는 ‘중국불교회 종무인원 훈련반’을 준비하면서 “불교는 우리들 젊은 승가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제가 그 당시에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태허대사는 중국불교회 회장으로 선발되기 몇 개월 전 상해에서 입적하셨는데 당시 대사의 연세는 겨우 60세셨습니다. 저는 마치 부모님께서 돌아가신듯 세상천지에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는 저의 생명에서 가장 침체된 시간이었습니다.

빈승을 비롯한 청년승가는 남경 화장사를 불교혁신 기지로 삼았습니다.

나중에 음운(蔭雲) 스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월간지 ‘노도(怒濤)’를 보신 스님은 많은 청년들의 뜻과 원력을 확인하시고 남경 화장사를 우리들이 관리하면서 불교혁신기지로 삼도록 넘겨주셨습니다. 우리 청년승가 가운데 처음에는 지용(智勇) 스님이 주도하였는데 초산에서 온 능배(能培), 경삼(敬三), 유춘(惟春)과 심지어 보타산에서 소식을 듣고 온 자운(煮雲) 스님도 우리들 행렬에 합류하여 불교혁신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우리가 ‘승가 신생활 규약’을 제창하자 절에서 독경을 업으로 하는 일부 스님들이 우리를 싫어했으나 차마 말로는 뭐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남경 후가교(侯家橋)에 위치한 화장사는 현재 남경시 중심가인 신가구(新街口)와 거리가 1~2㎞도 되지 않게 가깝습니다. 당시 절 안에 작은 직물공장이 있었고 익화문방구와 더운물 공급처 등 시설물이 있었습니다. 애초에는 왼쪽으로 이어진 몇 개의 큰길이 모두 사찰소유의 땅이었는데 나중에 주지가 먹고 마시고 놀면서 차츰 하나씩 팔아버린 탓에 화장사는 불가를 쇠퇴시켰다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화장사의 부동산 일부분, 특히 청량산에 위치한 7만㎡의 땅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쌀 10섬의 가격을 들여 남경에서 가장 유명한 황룡변호사를 모시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남경시 정부는 강제로 우리의 토지를 수용해 남경시 제육중고등학교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교육사업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 스스로도 할 수 있으니 정부에서는 정부의 학교를 세우면 될 것이고 불교는 불교의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를 위한 개혁운동을 하고자 ‘화장학교(華藏學校)’를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민당과 공산당 간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체의 아름다운 꿈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할 수 없이 우리 청년들도 각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운 스님은 우선 보타산으로 돌아갔고 조경삼도 군인을 따라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유춘, 송풍 역시 국민당 공산당 두당 가운데 어느 쪽에 체포되었는지 모르겠으며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습니다. 지용 스님은 승려구호대를 조직하여 사상자를 돌보고자 화장사를 저에게 맡겼습니다.

친구도 동기들도 모두 흩어지니 혼자서 일을 펼치기 어려워서 앞날이 막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와중에 갑자기 지용 스님이 승려구호대를 포기하였습니다. 저 개인은 마음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였기에 그가 비록 저의 동기이고 아주 친했지만 일을 벌여놓고 마음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 저는 승려구호대의 일을 마무리 하겠다고 나서면서 초산 선배인 현화 스님에게 주지를 맡겼습니다.

그때가 1948년 겨울로, 공산당에서는 ‘회해전투’라고 하고 대만에서는 ‘서방회전(徐蚌會戰)’이라고 부르는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양쪽에서 각 50만명의 군인을 투입하여 죽고 죽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음력 12월 추운 겨울, 남경 하관철도길 옆이 수많은 시신들로 산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시신을 그냥 밖에 두고 있을 수 없으니 수습해서 매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사람의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러 왔을 때 우리가 다 매장해버렸다면 그 사람들이 가족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면서 구호작업을 하려면 조직을 만들어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훈련을 어디에서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대만에서 받을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대만은 어디에 있나요? 누군가 그렇게 말을 하니 구호작업을 하려면 확실히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겠다고 빈승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9년 설이 지나고 빈승은 대만으로 왔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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