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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간다라의 옛 수도 차르사다에서 만난 세우와 법구

세우 존자가 대중 위해 아비달마 저술했던 간다라 옛 수도

▲ 고대 간다라 수도였던 차르사다의 발라 히사르(높은 언덕 위의 요새)에서 본 시가전경. 현장법사에 의하면 저곳 어딘가에 과거4불이 설법했던 것을 기려 세운 아쇼카 왕의 스투파가 있었고, 그곳 승가람에서 세우 존자가 ‘중사분아비달마론’(신역은 ‘아비달마품류족론’)을 저술하였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이 간다라의 수도를 푸루샤푸르(페샤와르)로 옮기기 전의 수도였던 푸쉬칼라바티(Pushkalavati)이다. 푸쉬칼라바티는 ‘푸른 연꽃(靑蓮華: puṣkara)의 도시’라는 의미로, 오늘날 차르사다의 옛 이름이다. 차르사다는 페샤와르에서 동북쪽으로 30㎞ 떨어진 도시로 카불 강과 스와트 강을 건너야 한다. 현장 역시 푸루샤푸르의 카니시카 가람에서 동북쪽으로 50여 리, 큰 강을 건너가면 푸쉬칼라바티성(布色羯邏伐底城)에 이른다고 하였다. 간다라의 옛 수도였던 만큼 당연 역사가 없을 리 없을 것이다.

푸른 연꽃의 도시 차르사다
페샤와르 이전 간다라 수도

세우와 더불어 위대한 논사인
법구와도 특별한 인연 있는 곳

옛 가람서 ‘잡아비달마론’ 저술
복잡다단한 설일체유부의 교학
체계적으로 조직해 ‘구사론’전범
되었다는데서 사상사적 의미 커

페샤와르 박물관에서도 이곳에서 발굴한 다수의 불상을 전시하고 있었지만, 가이드북에서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두 곳을 소개한다. 첫째는 발라 히사르(Bala Hisar). 발라 히사르는 ‘높은 언덕 위의 요새’라는 뜻으로 페샤와르에도, 카불에도 같은 이름의 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페샤와르의 발라 히사르 성은 지금도 여전히 국경수비대 사령부로 사용 중이며, 그래서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차르사다의 발리 히사르는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포위 함락된 성이란다. 둘째는 샤이칸 데리(Shaikan Dheri)의 세이크(Sheikhs) 언덕. 여기서 기원전 2세기 박트리아에 의해 건설된 그리스풍의 바둑판 모양의 도시가 발굴되었단다. 그러나 애써 찾아간 세이크 언덕은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선, 잡초만이 무성한 언덕일 뿐이어서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샤지키 데리처럼 안내판조차 없었다.

▲ 차르사다의 발라 히사르. 기원전 327년 힌두쿠시를 넘어온 알렉산더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발리 하사르는 저 멀리 정면으로 바라보였다. 1㎞ 정도의 거리란다. 그러나 스와트 강 건너 쪽이었다. 가이드북에서 말한 대로 마을 아이를 앞세워 찾아갔다. 그곳 역시 성채는 흔적도 없고 다만 20여 미터 높이의 언덕만 남았을 뿐이었다. 언덕 아래 넓은 평지에서는 아이들이 크리켓을 하고 연을 날리고 소를 먹이고 있었다. 북인도의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일상이다. 힌두쿠시를 넘어온 2만 보병의 진군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언덕 위로 올라가 보았다.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고, 청년들도 따라 붙었다. 갈 곳 없이 돌아다니던 오토바이도 모여 들었다. 비록 성채는 사라졌지만 상당한 면적이었다. 500m는 훨씬 넘어 보였다. 녹음과 함께 차르사다가 한 눈에 조망되었다.

만약 이 요새가 현장법사가 여기 왔을 때의 푸쉬칼라바티성이었다면 저편 동쪽에 아쇼카 왕이 과거 4불이설법하였던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스투파가 있었을 것이다. 현장에 의하면 그곳은 중인도에서 강림한 바수미트라(Vasumitra, 和須蜜: 世友) 논사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중사분아비달마론’(현존본은 ‘衆事分阿毘曇論’)을 제작한 곳이다. 이 논은 현장이 번역한 ‘아비달마품류족론(品類足論)’의 구역으로, ‘집이문족론’ ‘법온족론’ ‘시설족론’ ‘식신족론’ ‘계신족론’, 그리고 ‘발지론’과 함께 근본아비달마로 취급되는 논이다. 경을 지식의 기준으로 삼는 경량부에서는 이를 불설(佛說)로 여기지 않지만, 설일체유부에 있어 이는 불설이다. 아니 경의 진실요의(眞實了義)를 밝힌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불설이다.

▲ 차르사다 마난데리 출토 불상. 2~3세기.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인도불교사에 바수미트라 즉 세우는 여러 명이 있다. 이를테면 ① 이곳 푸쉬칼라바티에서 ‘중사분아비담론’(‘품류족론’)과 ‘계신족론’을 지은 세우 ② ‘대비바사론’의 4대 논사 중의 일인 ③ 협존자의 발의에 따른 카슈미르 결집의 주재자 ④ ‘존바수밀보살소집론(尊婆須蜜菩薩所集論)’이나 시타반니(尸陀槃尼)의 ‘비바사론(鞞婆沙論)’에 인용된 ‘바수밀경(婆須蜜經)’의 저자 ⑤ ‘이부종륜론’의 저자 ⑥ 멸진정에서도 미세한 마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문론(問論)’의 저자(譬喩者 계통)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혹 그는 유부교학에 가장 뛰어난 논사였기 때문에 이후 저술된 각종 논서들이 그의 이름으로 가탁 전승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현장은 ‘중사분아비달마론’의 작자 바수미트라가 중인도에서 강림(降臨)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그가 북인도(간다라나 카슈미르) 출신이 아니지만, 이곳의 중생을 위해 차르사다에 와 ‘아비달마’를 저술하였다는 말이다. 중사분의 원어 프라카라나(prakaraṇa)는 설명, 논평, 논의의 제목 등의 뜻이지만, ‘중사분’이라는 말로만 본다면 제법(諸法) 즉 세계를 구성하는 온갖 실체나 사태(衆事)에 대해 분류 분별한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현장은 ‘품류(品類)’라고 번역하였다. 총 8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1 ‘오법품(五法品)’(신역은 ‘辯五事品’)은 총론의 성격을 갖는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신의 창조나 단일한 실재(자성)의 변화로 보지 않고 다양한 원인과 조건(因緣)의 화합으로 이해한다. 세계의 인연이 되는 생멸 변화하는 법을 유위법이라 하고, 열반과 같은 생멸하지 않는 법을 무위법이라 하였는데, ‘오법품’에서는 유위·무위의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문헌이다. 바야흐로 불교학의 전체적인 면모를 처음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오법’이란 ① 지·수·화·풍 4대종과 화합물이 소조색의 물질(色法) ②마음(心法) ③마음에 수반되는 온갖 형태의 심리현상(心所法) ④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별도의 힘(心不相應行法) ⑤그리고 열반 등의 무위법(無爲法)이다.

▲ 법승(3~4세기 초) 존자가 ‘아비담심론’을 저술하였다는 토카라의 박갈국(박트리아, 아프가니스탄 북부 Balkh지역)과 인접한 테르메즈(鐵門) 출토 불상. 1~3세기. 법승 존자도 필시 이 불상에 예배하였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국립 역사박물관 소장.

이는 일체만유를 구성하는 근본실체 즉 본사(本事)로, 5온의 유위법에 무위법을 더한 것인데,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체법’으로 호칭하였다. 즉 대승불교에서 일체는 다 공이라거나 마음이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일체’가 바로 이것이다. 아비달마가 불교학의 기초학이라고 함은 바로 세계의 토대로서 일체법에 대해 분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일체법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이 공(空)이라거나 마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말 또한 공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차르사다는 또 한명의 위대한 불교논사와 인연이 있다. 다르마트라타(Dharmatrāta) 법구(法救)이다. 현장에 의하면 법구는 불멸 500년 푸쉬칼라바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진 오래된 가람에서 ‘잡아비달마론’(현존본은 ‘雜阿毘曇心論’)을 저술하였다. ‘잡심론’으로 불려지는 이 논은 법승(法勝, Dharmaśreṣṭi)의 ‘아비담심론’을 해설한 것으로, ‘구사론’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아비달마 논서이다. ‘아비담심론’은 ‘반야심경’이 ‘대반야경’의 핵심 요지를 간추린 것이듯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핵심을 간추린 것,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복잡다단한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구사론’의 전범이 되었다는데 사상사적인 의미가 있다.

현장의 제자로 ‘구사론’을 해설한 보광에 의하면 법승은 불멸 500년 토카라의 박갈국(縛喝國, 고대 박트리아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Balkh지역)에서 ‘아비담심론’을 저술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다 이 나라의 대도성을 ‘작은 왕사성’이라 불렀다. 100여 곳의 가람에 3000여 승도들이 소승교의를 학습하고 있었는데, 중현의 ‘순정리론’에도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도시의 이름이 언급된다. 현장은 대설산(힌두쿠시) 이북에서 논(論)을 지은 논사들은 대도성 서남쪽에 위치한 나바(納縛, Nava) 승가람에서 아름다운 풍속(美業)을 이어갔다고 하였으니, 법승 역시 여기서 ‘아비담심론’을 저술하였을 것이다. 현장 또한 이 절에서 탁카국(샤카라 : 시알코트)에서 온 반야가라(般若羯羅)라는 소승 삼장으로부터 한 달간 ‘대비바사론’을 배웠다. 이렇듯 설일체유부 비바사(毘婆沙)는 지역적으로 카슈미르, 간다라의 푸루샤푸르와 푸쉬칼라바티, 판잡의 샤카라, 아프간의 박트리아로 꿰어지고 있는 것이다.

법구는 앞서 말한 세우의 ‘품류족론’의 ‘변오사품’을 해설한 ‘오사비바사론(五事毘婆沙論)’도 저술하는데, 서문에서 세우 존자가 ‘오사론’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푸른 연꽃의 도시’라는 의미의 옛 지명 푸쉬칼라바티를 상호로 건 차르사다의 한 식당.

“제자들이 광대한 [교법을] 듣고 수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 [일체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간략히 깨닫게 하고자 논을 짓게 되었다. 즉 세우 존자께서는 항상 이같이 생각하셨다. 어떻게 하면 여러 제자들로 하여금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간략한 논문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명료한 이해는 금강산처럼 온갖 악견(惡見)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지만, 명료하지 못한 이해는 갈대꽃처럼 온갖 악견의 바람에 흩날려 허공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렇듯 제자들로 하여금 견고한 이해를 갖게 하기 위해 이 논을 지으셨다.”

세우 존자의 조론(造論) 이유가 다만 이것뿐이었을까? 녹음에 둘러싸인 이곳 차르사다의 발리 히사르는 이미 기원전 6세기(516 BC.)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변경의 한 주였고,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를 무너트리고 이곳을 거쳐 펀잡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아쇼카 왕(268 BC. 즉위)의 마우리야 제국의 변경이기도 하였지만, 기원전 2세기 무렵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계속하여 스키타이인(샤카)과 파르티아인(파흐라바)이 내려왔고, 월지족의 제국인 쿠샨의 카니시카(128∼153년 재위) 시대 간다라의 수도를 이곳 푸쉬칼라바티에서 푸르샤푸르(페샤와르)로 옮겼다.

인도불교미술사에서는 카니시카 이전을 고대기(기원전 5세기∼기원후 1세기), 이후부터 굽타시대까지를 쿠샨기(1∼5세기)로 구분하여, 고대기를 무불상기(無佛像期)로 규정하고 쿠샨기의 현저한 특징으로 불상의 탄생을 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심지역이 헬레니즘적인 신상(神像)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였다고 말한다. 불상의 마투라 기원설도 제기되었지만, 불교미술의 문외한이라도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간다라 불상에서 그리스풍의 용모나 장식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간다라는 오랜 세월동안 페르시아와 그리스, 헬레니즘의 원류라는 코카사스 지방에서 내려온 이민족이 머문 그들의 땅이었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것을 ‘간다라문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상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우리는 대개 인도-그리스 왕 밀린다(그리스 이름은 메난드로스)가 묻고 불교의 장로 나가세나가 답한 ‘밀린다팡하’(한역은 ‘那先比丘經’)가 동서 사상교류의 대표적 문헌이라 말하지만, 거기서 서방의 사유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밀린다 왕의 질문은 아비달마논서에서 제기되는 일반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세우가 ‘중사분론’(즉 ‘품류족론’)을 짓고 법구가 ‘잡심론’을 지은 푸쉬칼라바티는 국제도시였다. 당시(불멸 300년, BC2세기 무렵에서 불멸 500년, AD1세기) 간다라에는 서방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고, 불상에 그들의 삶의 양식이 더해졌다면, ‘품류족론’에도 그들의 사유가 반영되었을까? 반영되었다면 무엇일까? 세우 존자가 굳이 중인도에서 이곳까지 와  ‘품류족론’을 저술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다만 제법의 자상과 공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페샤와르로 돌아오는 길, 스와트 강의 황토물이 범람할 정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둑에 나와 불안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는 그다지 많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 “강에 탁류가 흘러가면 상류에 비가 왔음을 안다.” 결과로써 원인을 추리하는 상캬학파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한 예증이다. 원인을 추리할만한 결과를 분명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못내 답답하다. 아비달마 논서는 한 두 사람이, 몇몇 사람이서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품류족론’이 저술될 당시 이곳 차르사다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페샤와르에 이르니, 작은 개천도 범람하고 있었다. 북인도 전역에 홍수가 났단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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