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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부처님은 중생을 믿었다

기자명 이미령

수행자가 머물고 싶은 땅 수행자가 떠나고 싶은 땅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안녕하세요.

하루 사이에 여름에서 늦가을로 쑥 빨려 들어간 것 같은데 이 편지를 받으실 때면 다시 늦더위가 찾아오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고르지 못한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수행하는 이들이 오고싶은 곳
중생들이 가르침 구한다는 것
그런 뜻에 부응해 뜻 내는 것
얼마나 흥미롭고 좋은 일인가

지난 번 편지에서 제가 현각 스님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 기억나시나요, 스님?

현각 스님은 현재 한국을 떠나고 있는 지성인들의 심정에 100% 공감한다면서, 자신 역시 이번에 한국을 떠나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지요. 뿐만 아니라 출가해서 수행하기를 원하는 서양 사람에게는 조계종이 아니라 계룡산의 선원 아니면 일본의 선원으로 보내고 있다고요. 페이스북에 올린 이 글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지요. 

그런데 조계종의 포교원장이신 지홍스님께서 현각 스님의 불교계 지적과 관련하여 인정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현각 스님도 자신의 글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뉘앙스의 행동을 취하셨기 때문인지 요즘은 잠잠해졌습니다. 어찌 보면 이번 일은 한 차례 해프닝으로 끝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불교계와 조계종단에 내비친 현각 스님의 비판들은 종단이 해결해야 할 숙제겠지요.

저는 이 일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수행자가 머물고 싶은 땅과 수행자가 떠나고 싶은 땅.

물론 이때의 ‘수행자’란 진정으로 법답게 용맹정진하는 분이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 마지막 가르침이 담긴 ‘대반열반경’은 아자타삿투왕의 대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대신은 이웃나라인 밧지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의 정당함을 부처님에게서 구하고자 법문을 청했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전쟁을 하라거나 말라는 답을 주지 않고, 살짝 방향을 벗어나서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이란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 일곱 가지 법 가운데에 이런 내용이 있어 흥미롭습니다.

“밧지국 사람들은 언제나 성자들을 정당하게 보호하고 지켜주면서, 아직 그 나라를 찾지 못한 성자들이 방문해주기를 바라고, 이미 와 있는 성자들도 평화롭게 머물기를 바란다. 따라서 밧지국 사람들에게는 번영만이 있을 뿐 패망하지 않을 것이다.”

여법하게 수행하는 이들을 법답게 보살피고 지켜준다는 말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불교계에서는 외호(外護)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승가의 밖에서 지켜준다는 뜻도 될 테고, 불교계 밖으로부터 승가를 지켜준다는 뜻도 될 터입니다. 아무튼 어떤 뜻으로 풀이되든지 스님들이 법답게 수행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는 뜻이겠지요.

수행자가 머물고 싶은 땅을 만든다는 내용은, 똑같은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전륜성왕사자후경’에도 등장합니다. 세상이 몹시 거칠어져서 인간의 수명이 줄어듭니다. 손에 쥐는 것은 죄다 흉기가 되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모조리 독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이, 그리고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땅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말세의 시기를 지내다 문득 사람들 사이에 반성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서로가 조심하는 삶을 살아가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다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세상은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해갑니다. 바로 이때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자 그 분에게서 수많은 이들이 가르침을 듣고 제자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간 사람들은 말세가 되면 미륵불이 나타나서 사악한 것을 싹 청소해주리라 여겨왔지요. 하지만 위의 경전을 보자면,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우리를 살기 좋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좋은 곳을 만들어서 부처님을 오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의 ‘대반열반경’ 내용과 참 비슷하지 않습니까? 중생심에서 얼핏 생각해보면, 마음공부 많이 하신 스님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주는 것이 맞지, 어떻게 우리가 스님을 지켜준다는 말인가 하는 반감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육방예경’을 보더라도 위쪽 방향에 해당하는 수행자는 재가자를 악으로부터 지켜주고 선한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의무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반열반경’과 ‘전륜성왕사자후경’의 내용을 보자면, 부처님을 오시도록 만드는 이가 바로 중생입니다. 법답게 수행하는 이들이 오고 싶고, 왔으면 머물고 싶게 만드는 이가 중생들, 재가불자들입니다. 부처님과 성자들이 세상의 악을 청소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고, 악을 정화한 중생들이 조금 더 높은 차원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뜻을 낸다는 것. 그런 중생의 뜻에 부응해서 부처님과 성자들이 화답한다는 것. 이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불교가, 선불교가, 한국불교가 좋아서 이 땅을 찾은 수행자들이 발길을 돌리지 않도록 우리가 정갈하게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재가불자들이 스님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해야겠습니다. 가장 먼저, 스님에게는 진리 그 이외 아무 것도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자들에게 있어 출가수행자는 그저 오롯한 부처님의 제자요, 나보다 한 발 먼저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선배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자들은 스님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사주풀이나 액막이를 위한 존재도 아니요, 아무 때나 찾아가서 내 마음 외롭다며 감정을 맘껏 풀어헤쳐놓아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나친 시주와 지나친 배려가 오히려 스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거듭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이 수행하고 포교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은지를 표 나지 않게 살피는 일. 바로 이런 것이 외호가 아닐까 합니다.

‘기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복으로만 흐르는 종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기복으로만 흐르고 있다는 세간의 비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돈벌이에 집착하는 스님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재가불자들의 잘못도 있습니다. 재가불자들이 눈을 뜨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합니다. 그래야 법다운 수행자들이  찾아오고, 미륵부처님도 출현하시겠지요.

21세기의 이 땅을 헬조선이라며 서로 떠나려고 들지만, 그런 곳을 부처가 나시는 땅으로 만드는 이들은 중생입니다. 불교는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늘 이렇게 결론을 맺곤 합니다.

중생은 부처님을 믿는다. 아니다, 그 이전에 부처님이 중생을 믿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중생의 힘을, 중생의 마음을 믿으신 분입니다.

우리들 재가불자들의 두 손에, 마음에,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는 희망이 흐르고 있으며, 우리는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니르바나에서 불고 있는 바람도 이와 같겠지요.

평안하시길.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58호 / 2016년 9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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