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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대중매체의 긍정적인 역할-상

“거짓만 보도하는 매체는 불교를 바닥으로 끌어 내립니다”

▲ 대만 불광산이 직접 운영하는 방송국 내부 운영실.대만 불광산 제공

“이런 매체는 좋은 것은 보도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도하고, 진실은 보도하지 않고 거짓을 보도하며, 선한 것은 보도하지 않고 악한 것을 보도하고, 바른 것은 보도하지 않고 잘못된 것은 보도합니다.”

대중매체가 대만을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유망한 매체의 기자들로 하여금 이 시대에서 그들의 ‘펜대’로 나라를 구하고 사회를 구하며 민심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여 사회의 선도자가 되게 합시다.

여러 해 전 저는 ‘천하’라는 잡지에 “대중매체가 대만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글은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잊히지 않았습니다. 언론인은 나라의 기둥이고 사회의 엘리트들인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대만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고 하는 것일까요? 일부 바르지 못한 대중매체로 인해 매체의 우량한 본질이 덮여졌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매체는 좋은 것은 보도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도하고, 진실은 보도하지 않고 거짓을 보도하며, 선한 것은 보도하지 않고 악한 것을 보도하고, 바른 것은 보도하지 않고 잘못된 것은 보도합니다.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국가의 앞날과 사회풍기는 돌보지 않으므로 ‘대만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답지 않게 바꾸어 버리고 있으니 아주 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천하’ 잡지에서 특집호를 출간하여 대중매체가 대만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고 개탄하였던 것입니다.

‘천하문화’의 창설자인 고희균(高希均) 교수가 ‘나의 대만 꿈은 정정보도의 출현이다’라는 문장을 ‘원견(遠見)’ 잡지에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에서 ‘정정보도를 하게 되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다른 신문을 통해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고 그 이후 다시 ‘정객이 군자로 변하면 대만은 정치 스모그에서 벗어나게 된다’라는 글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고발로 대립을 만들고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사람 가운데는 시민대표, 언론,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 펜을 움직여 먹고 사는 사람이 가장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연합보’ 원로인 장작금(張作錦) 선생도 ‘언론이 사악한 길을 걷지 않는 것은 보편적 가치를 신앙으로 삼아서 장기적이고 충성스런 호위병이 되고자 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평론가 남방삭(南方朔) 선생은 ‘언론이 더 이상 사회의 공적 그릇이 아니라 소모품이 되어버렸을 때, 언론은 사회를 범속하고 따분한 웅덩이로 끌고 갈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문화계 인사들의 말 속에서 우리는 대만 언론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남을 침범하지 말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대중매체에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매체의 자유에는 규범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범해서는 안 되고 남이 한 말을 거짓 포장하고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중상모략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대중매체에서 이것도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얼마 전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하였을 때 저도 마침 필리핀에 짓고 있는 광명대학교 설립준비회의에 참석차 필리핀에 있었습니다. 기자가 교황에게 얼마 전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가 이슬람 괴한들의 총격으로 사람들이 죽은 것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질문하였습니다. 교황은 “신문에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종교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언론의 자유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며 누군가 내 어머니를 욕하면 그 역시 내 주먹을 한대 맞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교황의 이러한 대답은 실로 천주교 최고 지도자답게 양쪽을 다 염두에 둔 적절한 말로서 아주 공평하고 공정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내가 좋으면 해서 안 될 게 뭐냐?”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당신이 좋아할 수는 있어도 남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함부로 쓰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로 인해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실로 부당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계가 평화롭고 조화로운 사회가 되려면 필히 누구나 남의 자유를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많은 계율을 제정하시어 출가한 사람에게는 출가인의 계율이 있고 재가 불자에게는 재가 불자의 계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를 받으면 살생해도 안 되고, 훔쳐도 안 되고, 혼외 사랑도 안되고, 거짓말을 해도 안 되니 너무 자유가 없다고 여겨서 수계 받는 것을 겁내 합니다.

빈승은 각 언론에 인문적인 소양을 높여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자 합니다.

사실상 불교의 ‘계(戒)’라는 이 글자를 해석하면 자유라는 뜻입니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침범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 생명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훔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니 다른 사람 재산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혼외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명예와 정절을 침범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가정과 몸, 명예와 정절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남을 비방하고 헐뜯지 않으니 다른 사람 명예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은 남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고 자기에게도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 교도소의 수형자들이 왜 갇혀 있는가를 조사해 보면 어떻습니까? 나라의 법률이 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였을까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유에 상처와 피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남을 침범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의 자유를 침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의 대만에서 매체가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고 법률상의 인권보장을 존중한다면 대중매체는 대만을 구해낼 수 있으며 대만도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대만을 구하라고 요구하려면 먼저 우리 사회는 독자들의 인문적 소양을 높이고 글 읽는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남의 사생활을 파헤치거나 거짓을 진실처럼 전달하는 소식을 대중매체가 보도하지 않도록 하고 진실하고 선량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독자가 있으면 자연히 좋은 매체가 있게 됩니다.

대만에서 “오늘 텔레비전은 볼게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왜 그런가요? “국회의원들이 싸움을 안 했잖아!”라고 한다면 기자들은 싸우는 뉴스를 보도해서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 것입니다. 또 독자들이 “오늘 신문은 정말 재미없어, 살인 사건이나 스캔들 같은 사회뉴스가 없네!”라고 말하면 신문사는 신문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살인이나 도둑, 스캔들 뉴스가 없더라도 가능한 무슨 사고거리를 만들어 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만의 대중매체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민중들도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독자들은 펜이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고 진선미의 뉴스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1900년 이후 적지 않은 우수한 매체의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중국 ‘대공보(大公報)’의 장계란(張季鸞)과 왕운생(王芸生), ‘용보(庸報)’의 동현광(董顯光), ‘대만보(大晚報)’의 증허백(曾虛白)이 있었고 대만 ‘공론보(公論報)’의 이만거(李萬居), ‘입보(立報)’의 성사아(成舍我), ‘중앙일보(中央日報)’의 마성야(馬星野), ‘자립만보(自立晚報)’의 오삼련(吳三連)이 있었으며 또한 ‘연합보(聯合報)’의 왕척오(王惕吾)도 바른 신문발행을 주장했습니다. ‘중국시보(中國時報)’의 여기충(余紀忠)은 공익과 환경보호, 수질보호에 관심을 갖고 애를 썼습니다. 이들 모두가 이 사회의 진정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인물들이자 문자로서 정의를 실현하는 ‘집필진’으로서, 이들의 공적은 사회에 널리 퍼져나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듭니다. 심지어 ‘뉴욕타임즈’ ‘LA타임즈’ 등등 일부 신문들이 객관적인 보도와 편견없는 평론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퓰리처상’을 수여한다면 이러한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다 세계적인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빈승의 대중매체에 대한 존중은 40년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퓰리처상’과 같은 언론상을 제정하여 언론인을 격려하려고 생각했었지만 이는 우리가 기자들을 매수하려는 거라고 탓하는 사람이 있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몇년 전 빈승이 늙기도 했고 자신이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있다고 느꼈기에 ‘공익신탁교육기금’을 설립했고 ‘진선미 신문전파상’을 만들었습니다. 대중매체로 하여금 진선미의 수준에 올라설 수 있도록 저는 고희균 교수와 장작금 선생 등을 심사위원으로 초빙하여 우수한 기자를 수상하고 상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현재 6회가 지났어도 저는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었고 한 사람도 추천한 적이 없었으며 고희균 교수 등 심사위원들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심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상을 수상하고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에는 공의와 공도가 있으며 유망한 매체의 기자들이 이 시대에서 그들의 펜대로서 나라를 구하고 사회를 구하고 인심을 바로잡으면서 사회의 선도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대중매체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사회교육을 실행해야만 합니다. 현재 대만의 언론매체는 과거의 사회뉴스에서부터 내부고발 뉴스까지 마음대로 보도하면서 시시비비가 뒤바뀌고 유언비어로 대중을 미혹에 빠지게 하고 있는데 이것이 대만의 운명일까요? 아니면 기자들이 너무 지나치게 시청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추구하는 심리에서일까요?

20년 전 저는 단체를 따라 일본으로 사찰 탐방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일행들이 모두 나가고 저는 호텔에 남아 있다가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한 분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교수이고 다른 한 분의 이름은 잊었지만 두 노교수가 생사문제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방영된 프로그램에 제3자가 화면에 나오지도 않고 중간에 광고도 없이 오직 두 사람이 생사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깊이 있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날 오전의 시간에 저는 인생의 오고 가는 것에 더욱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 되었고 심신으로 느꼈던 편안함과 고요하고 홀연함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로써 저는 우리 대만의 매체가 뉴스보도를 함에 있어서 그렇게 긴장되고 조급하고 격렬하고 선동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유유자적하고 편안한 지식과 견해를 사회에 널리 알릴 수 있다면 대만의 대중매체가 대만을 구해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오늘날 매체를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대중매체 역시 국가에서 보조해주고 있고 정부 법령을 펼치고 사회풍토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문사에서 자립으로 운영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학교교육처럼 이 사회에 사회적인 교육을 실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회교육은 어떻게 실행하여야 할까요? 나쁜 뉴스를 보도하더라도 좋은 뉴스를 더욱 많이 보도하고, 나쁜 사람을 보도하더라도 좋은 사람을 더욱 많이 보도하고, 악행을 보도하더라도 선행을 더욱 더 보도하는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9호 / 2016년 9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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