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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야차(夜叉) 또는 약샤(Yakṣa), 그리고 약시(Yakṣī)

위협적이고 공포스런 동시에 초인간적 비범함의 존재로 묘사

▲ 피탈코라(Pitalkhorā) 출토의 야차상. 기원전 2세기경. 뭄바이 차트라파티 시바지 박물관 소장.

불교 속의 중요한 신을 누락할 뻔 했다. 불교 신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신이 바로 야차(夜叉)다. 야차는 초기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 내에 매우 빈번히 등장하는 하위의 신들이다. 마치 한국의 도깨비와 같이, 때로는 흉폭하고 위협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최고의 신들을 돕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선행을 돕는 존재들로 등장한다. 불교나 힌두교 문헌 속에는 상당히 많은 개별 야차들의 이름들이 나열되거나 특정 야차의 에피소드가 소개되기도 한다. 각 야차마다 신체적인 특징들도 다양하게 소개된다.

불교로 편입되는 신적 위계의
재편과정서 수호신 자리 매김

한국 도깨비처럼 흉폭한 한편
부처님의 가르침 받아 선행도

선악·삶과 죽음·폭력과 순종 등
양립된 관점들 사이를 오가며
긴장감 일으키는 존재로 활약

야차(夜叉)는 산스크리트어 약샤(Yakṣa) 또는 팔리어 야카(Yakkha)에서 기원한 말이지만 본래 이 신들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는 불분명하다. 처음 베다 문헌 속에서 야차 또는 약샤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기 위한 ‘마술적 힘’, 또는 그런 힘을 가진 존재 정도를 의미했다. 이 말이 구체적으로 신의 모습을 갖추고 신들의 위계 속으로 들어온 것은 불교가 등장한 이후거나 후기 베다 의례 문헌들이 등장한 이후이다. 이들의 기원이 불분명하고 마법을 가진 위협적 존재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나무와 물, 땅과 같은 자연의 수호자로 등장하기 때문에 때로는 불교나 힌두교 이전에 존재했던 토착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다.

불교나 힌두교의 문헌 속에서 대체로 야차는 쿠베라(Kubera), 또는 북방천왕(바이슈라바나)의 수하로서 비교적 낮은 하위의 신격을 갖는다. 히말라야의 중턱에 거주하면서 쿠베라의 다른 수하들인 간다르바, 압사라스, 나가 등과 함께 쿠베라의 거주처에 머무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가운데 특별히 야차는 쿠베라의 보물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뿐만 아니라 야차는 숲과 물을 보호하는 존재이며 땅을 지키는 존재다. 이들은 빈번히 연못과 호수를 지키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순수하게 자연의 정령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면모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고기와 술을 즐긴다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위험한 존재로 묘사된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면모는 확실히 한국의 도깨비와 비슷한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인상적인 것은, 이 야차들이 마치 그리스의 스핑크스처럼 경계의 존재, 또는 중간자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수수께끼를 던지고 그것으로 생명을 주고받거나 교화(敎化)의 근거로 삼는 위협과 긴장의 존재라는 점이다.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인 판다바 다섯 형제들 가운데 네 명은 연못의 물을 마시기 위해 갔다가 연못을 지키는 야차의 철학적 질문을 무시하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들의 맏형인 유디슈티라가 야차의 수수께끼에 대답하여 다시 형제들의 생명을 되찾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야차의 질문(yakṣapraśna)이다.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이다. ‘땅보다 무겁고 하늘보다 높은 것은 무엇인가? 바람보다 빠르고 인간의 숫자보다 많은 것은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이 야차의 철학적 질문(yakṣapraśna)들을 패러디해 불교에서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알라바카(Ālavaka)경(經)’이 그것이다. 알라비 왕국에 살고 있던 야차 알라바카는 어린 아이들을 제물로 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12년 동안 나라의 어린 아이들을 다 잡아먹게 되고 마지막 알라비 왕의 아들을 제물로 받을 때 세존이 알라바카의 거주처로 가서 야차 알라바카를 조복시키는 내용이다. 알라바카는 위의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야차와 마찬가지로 유사한 철학적 질문들로 붓다를 시험한다. 이 질문에 대답을 듣고서 알라바카는 곧바로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이러한 야차의 모습은 선과 악, 삶과 죽음, 폭력과 순종 등의 양립된 관점들 사이를 오가는 위험하고 긴장감을 일으키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신적 존재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 단어가 사용된 의미는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통상 문헌 속에서 쿠베라는 야차와 간다르바 그리고 나찰 등을 수하로 두고 있다. 대개는 인도문헌 속에서 이들이 각기 다른 존재로 취급되지만 경우에 따라 이들을 모두 통틀어 야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 산치(Sañci) 제1번 탑. 기원전 1세기경. 서쪽 출입구 기둥에 조각된 창을 들고 있는 야차(śūlapāṇi yakṣa)

심지어 붓다까지도 야차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다소 당혹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야차의 개념은 어느 정도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도깨비’의 이미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고대 인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야차라는 단어의 용례와 그 때 수반되는 어감(語感)이다. 불경 속에서 그려지는 야차의 이미지와 달리,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지고 있었던 또 다른 야차의 의미는 그다지 폭력적이거나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매력적이고 놀라운 신적 존재의 하나로 간주된다. 매우 뛰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거나 특별한 능력을 갖춘 존재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용모와 뛰어난 능력에 감탄을 보내게 될 때, 그 낯선 상대를 향해 보내는 관용적 질문이자 인사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 당신은 신이거나, 야차, 아니면 간다르바이겠지요?” 이러한 관용적 인사는 ‘마라바라타’나 ‘라마야나’ 같은 고대 인도 서사시에서 자주 등장한다. 비단 초인간적 존재뿐 아니라 아름다운 인간을 향해서도 가능한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야차는 그다지 공포스럽고 폭력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동일한 표현 방식을 우리는 불경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잘 알려진 도나(Dhoṇa)경에 그러한 표현이 등장한다. 이 경은 대략 2000년 전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실제 필사본으로 남아있어 그 표현의 생생함을 더한다. 길을 걷던 바라문 도나는 길 위에서 부처님의 경이로운 신체적 표상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에서 뿜어 나오는 정신적 고결함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는 놀라 묻는다. “당신은 신입니까, 야차입니까, 아니면 간다르바입니까” 이는 놀라운 존재를 처음 대하게 되었을 때 낯선 상대방에게 건넬 수 있는 감탄과 경의가 담긴 의례적 인사였다. 이 외에도 부처님을 직접 야차라고 부르는 경우는 종종 나타난다. 이러한 경우도 역시 비인간적인 초인적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존재지만 동시에 초인간적 비범함의 존재로 야차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야차들은 불교로 편입되는 신적 위계의 재편과정을 거치면서 불교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에서 야차는 조복(調伏)시켜야하는 위협적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나무와 물가, 또는 동굴 등은 승려들이 유행하면서 거주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토착신앙의 숭배물이 자리 잡은 장소이기 때문에 주로 이들 장소를 배경으로 교화가 이루어지거나 이런 장소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나가(Naga)나 야차(Yakṣa) 등의 조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 바르후트(Bharhut) 스투파의 베디카(vedikā)를 장식하고 있는 출라코타 데바타(Culakotā Devatā). 대략 기원전 1∼2세기. 콜카타 인도 박물관 소장. 여기서 이 신상을 데바타라고 적고 있지만, 약시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사냥의 여신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아직 불상이 등장하기 이전의 야차는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주로 초기 석굴과 석탑의 출입문에 조각되었다. 대략 기원전 1∼2세기에 조각된 야차들은 비교적 장대하고 우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야차 신앙은 인도 북서부가 아니라 마투라를 중심으로 한 북동부에서 더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이들이 처음 보여주었던 신체적 특성과 의복의 표현 등은 마투라 등지에서 불상 조각이 처음 등장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야차들의 모습은 문헌에서 그려지는 것과 달리 비교적 비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약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약차(Yakṣa, 夜叉)의 여성형으로 약시(Yakṣī)가 존재하지만 약샤와 약시는 서로 성적인 결합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약시는 풍요와 다산을 암시하는 도상을 보여주지만, 문헌 속에 나타나는 약시는 다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마치 야차(약샤)로부터 다소 포악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을 빌려온 것처럼, 문헌 속의 약시는 남성을 유혹하여 죽이고 잡아먹는 죽음과 파멸의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발라하사 자타카(Valāhassa Jātaka)’에는 랑카성의 시리사밧투(Sirisavatthu)라는 도시가 등장하는데, 이 도시는 약시들이 창궐하는 곳으로 난파한 배의 선원들이 표류해 들어오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모해 선원을 유혹한다. 약시는 남편을 잃은 여인들로 가장하여 남자들을 유혹한 다음 마법의 끈으로 결박한 후, 고문을 하여 결혼을 강요하거나 또는 잡아먹는다. 이 장면은 마치 오디세우스의 모험 속에 등장하는 키르케의 유혹을 연상시킨다. 키르케도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을 유혹해 돼지로 변모시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도상 속에 나타나는 약시는 문헌과 달리 풍요와 다산, 그리고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바르후트(Bharhut)나 산치(Sañci) 탑 등에 자주 나타나는 약시의 모습은 나무 여신(vṛkṣa devatā)의 모습을 띠고 있다. 왼팔과 왼쪽 다리로 나무를 껴안은 상태에서 머리 위쪽의 나뭇가지를 오른손으로 잡아당겨 여인의 신체곡선을 적당히 표현하고 있다. 이 약시가 살라(śāla)나무를 잡고 있을 때 이 독특한 자세의 여인상을 통상 ‘살라반지카(śālabhañjikā)’라고 이름 한다. 이 자세는 압사라스와 약시들이 조각 속에서 흔히 보이는 자세인데 매우 관능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때로 이 자세를 ‘아쇼카-도하다(aśoka-dohada)’라고 부르는데, 이는 동일한 자세를 아쇼카 나무 아래에서 취하는 경우다. 간혹 불전부도에서 마야부인이 아쇼카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선 채로 석가모니를 낳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도하다’는 심장이 두 개인 사람을 뜻하는데 곧 임신부를 뜻한다. 또는 임신을 바라거나 다산을 바라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재관 상지대 교양과 외래교수 phaidrus@empas.com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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