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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마타와 위빠사나

기자명 김정빈

화두선도 완전한 해답은 되지 못해

대승불교의 도성제가 취약하다고 할 때, 이 말은 ‘깨달음의 수행법’으로서의 도성제가 취약하다는 의미이지 그 전 단계로서의 도성제가 취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깨달음을 10이라는 수로 표기한다면 대승불교에서 취약한 부분은 9에서 10으로 나아가는 수행법인 것이다. 대승불교는 십바라밀을 수행법으로 제시하였고, 그것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 등 육바라밀로 정리되었다. 이들 여섯 가지 수행법이 훌륭한 덕목(수행법)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육바라밀 수행법에는 처음과 중간 차원의 수행법이 아닌 마지막 수행법이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대승불교서 말하는 반야는
깨달음 성취한 분상서 찾아
수행 관한 마지막 법 대해
초기냐 대승이냐 구별 없어

보시를 계속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위한 기초 역할을 할 뿐이다”이다. 그리고 이는 그다음 덕목인 지계와 인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정진은? 그에 대해 우리는 묻는다. “정진은 ‘무엇’을 정진하는 것입니까?”라고. 정진(노력)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지 ‘수행법’ 자체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언가’를 반야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그렇지만 대승불교가 말하는 반야는 깨달음을 성취한 분상에서의 반야이다. 비유하면 그것은 10을 넘어선 11차원의 반야, 즉 멸성제로서의 반야이며, 따라서 아직 9 이하에 있는 수행자에게 수행법, 즉 도성제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선정뿐이다. 대승불교를 가장 잘 요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대승기신론’이 수행론 부분에서 육바라밀을 5바라밀로 다루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승기신론’의 저작자는 ‘보살’이라고까지 추존되는 마명(馬鳴, Ashvaghosa)인데, 이 대사상가가 보기에도 반야는 따로 독립하여 다룰 수 있는 ‘수행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대승불교의 ‘마지막 수행법’이 선정임을 알 수 있는데 ‘대승기신론’은 선정법을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로 분별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사마타는 팔리어 사마타(samatha)의 음역(音譯)이고, 비발사나는 위빠사나(vipassanā)의 음역이며, 마지막 수행법을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맨처음 분별한 것은 대승불교가 아니라 초기불교이다.

이로써 우리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수행법에 관한 한 초기불교·부파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보시·지계·인욕·정진 또한  초기불교 수행법에도 있으므로 수행법에 관한 한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소승불교)와 자신이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수행법이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번째로 대승불교는 그 출발점이 초기불교(소승불교)와 달리 웅대하고 장엄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초기불교는 아라한을 목표로 삼지만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경지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목표가 장엄하면 장엄할수록 그 결과 또한 장엄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 점은 충분히 강조될 만하며, 이 점은 대승불교 수행법의 강점이다.

또 다른 점 한 가지는 초기불교에 비해 대승불교는 사마타·위빠사나를 강조하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이렇듯 선정법이 중시되지 않고 제시되지 않는 풍토 때문에 불교 유입 초기 중국과 우리나라 불교에서 추앙받았던 고승들 대부분은 학승일 뿐 도승(道僧)이 아닌 결과가 나왔으며, 이 점은 대승불교의 약점이다.

그런 풍토에 대한 반발로서 화두선이 등장했음을 지난 주에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화두선은 그에 대한 완전한 해답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완전한 해답은 ‘대승기신론’의 방향 제시에 따라 초기불교가 제시한 사마타·위빠사나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이었다고 해야 하는데, 선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초기불교의 사마타·위빠사나에는 도착하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선사들은 부처님만큼 위대한 수행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마타·위빠사나를 구경(究竟)까지 밝힐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분은 인류 역사상 부처님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62호 / 2016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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