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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정치화상으로 불리게 된 까닭-하

“관료는 한때일 뿐이고 출가 수행자는 평생입니다”

▲ 성운 대사가 1994년 중국의 남경 우화정사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저는 일생 정치인의 기부를 받은 적이 없었고 표를 부탁하는 봉투를 받은 적도 없었기에 당연히 정치인이 저에게 주는 기부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홍 선생은 “이것은 선거를 치른 뒤 남은 돈이니 받으셔도 상관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홍 의원님! 이 돈을 만약 제가 한번이라도 받게 되면 저의 일생 이념과 명예에 관계된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빈승이 일생으로 관직에 나서고 싶지 않았고 민선 의원을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회의 공평과 공의를 위해서라면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널리 사랑하는 ‘출가인’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 당파의 관념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출가한 것을 평생 후회하지 않으며 국민당 당원이 되었던 것도 평생 후회하지 않습니다. 비록 국민당이 과거 정치범에 대해서 잔인하게 도살하고 반대 인사들에 대해서 억울한 누명을 씌우면서 사람의 생명을 짓밟은 것에 대해 저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백색공포’ 시대의 난세에서 작은 목숨을 보존토록 해준 저에 대한 국민당의 관용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승은 대만 매체의 일부 인사들이 걸핏하면 “출가인이 사회에 개입하려 하느냐? 왜 정치까지 참여하느냐? 제안까지 피력하려고 하느냐?”라고 비평하는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출가인도 군대에 갔다 오고 세금도 내고 있으며 출가한 것이지 출국한 것이 아닌데 왜 나라 일에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까? 적어도 저는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국민이고 공적 권리를 빼앗긴 수형자도 아닌데 제가 나라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까? 제가 사회와 시민의 복지에 대해서 의견을 말할 수 없습니까? 빈승이 ‘출가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아야 할 의무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공적 권리를 빼앗기지 않았는데 우리의 매체와 일부 민간 인사들은 이렇게 잔인하게 빈승의 시민적 권리를 빼앗으려 합니까? 그들은 무지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은 민주자유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요?
국가 지도자에게 기대지 않으면 불법을 펼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이후 인도국왕이 수시로 찾아와 가르침을 물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예를 들면 인도 남쪽의 마가다국 빔비사라왕과 북쪽의 코살라국 바사닉왕은 수시로 부처님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치에 대해서 ‘인왕호국경’을 말씀하시고 인왕 정치를 선도하셨는데 불교가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면 안된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빈승이 ‘석가모니불전’을 저술할 때 우사(雨舍) 대신이 아도세(阿闍世) 왕의 명령을 받고 월지국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부처님께 여쭙고자 갔던 부분을 썼습니다. 우사 대신은 부처님을 뵈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내가 너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만약 한 나라가 교육이 번성하고, 사회윤리가 돈독하고, 부친은 자애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위아래가 화목하면서 사람들이 도덕을 중시하고, 법규와 기율을 준수하는데 만약 다른 나라에서 침략해 온다면 이 나라를 이길 수 있겠느냐?”

아난은 “부처님! 이러한 나라는 침범하더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사 대신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몸을 일으켜서 “부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부처님께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회피하지 않으신 것도 정사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불교호법의 책임을 왕공대신들에게 맡기셨지만 정치계로 하여금 불교를 보호하게 하고 불교가 인민을 옹호하고 사회국가를 옹호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5호16국 시대에 민중을 함부로 살육하던 석호, 석륵을 불도징(佛圖澄) 대사가 신통력으로 감화하여 많은 살생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대사는 수많은 목숨을 구해내고 나중에는 그들의 스승으로서 국가대사에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동진(東晉) 도안(道安) 대사는 “국가의 군주에 기대지 않고는 불법을 펼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서 불교와 정치는 호혜적인 관계로 불교는 국가를 옹호하고 양측이 이득을 받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안 대사의 제자 여산(廬山) 혜원(慧遠) 대사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사문은 임금에게 예경하지 않는다. 역자 주)’에서 “가사가 조정의 관복이 아니며 발우가 어찌 조정의 그릇일 수 있는가?”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단지 종교는 정치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관료는 한때이고 출가는 평생입니다. 수행을 했다고 하는 성현들이 세간 세상사에 대해서 듣거나 물으려고 하지 않는데 흔히 “생사윤회를 뛰어넘어 세속의 오염과 구속을 받지 않는다(不在三界內 超出五行中)”라고 합니다. 그러나 매 시대마다 각기 다른 문화가 있어 왔으며 불교가 쇠락의 위급한 시기에 더 이상 사회에서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당대 신불교의 지도자답게 태허 대사께서는 ‘교의개혁(教義改革), 교산개혁(教產改革), 교제개혁(教制改革)’을 주창하시면서 “정사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지도원칙을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전체 불교도들이 이를 표준으로 삼고 받들어서 정계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국제적인 공생과 인류의 행복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지식이 있는 인사들은 불제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을 내려놓은 것을 존중해야 하지만 국민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포기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빈승이 일생에서 비록 혜원 대사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에서 처럼 하지 않았지만 저는 국가 수장, 정부 요인들과의 왕래에서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불광산을 처음 창건할 때 현지 지방정부 수장에게 밉보여 불광산 사찰등록을 받지 못하다가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난 후에야 불광산의 사찰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정부 관직을 맡았고 설사 선거로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4년이든 8년이든 임기라는 것이 있으니 평생 관직에 있지는 못할 것이라고 저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평생 ‘출가인’이니 내 일생의 세월로서 당신의 정치생명과 견준다면 승산은 저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광산을 창건하고 우리는 문화, 교육, 사회복지 등 많은 사업을 펼쳤지만 정부에 일원조차 보조를 요청한 적 없는데 그것은 왜 일까요? 저에게는 저의 성격이 있고 저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통달할 때는 천하를 이롭게 하고 통달하지 못할 때에는 적어도 스스로를 잘 보살피는 것이 대장부다(大丈夫達則兼善天下 不達則獨善其身)”라고 하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연이 있으면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고 인연이 없으면 부처님께서 입멸하듯 오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고 가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다(有緣佛出世 無緣佛入滅 來為眾生來 去為眾生去)”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저도 불제자인데 부처님을 따라 배운다고 안 되는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일생으로 변함없이 저는 ‘중국인’이라고 말합니다. 대만이 전제정치 시대에서부터 오늘날 자유민주제도를 실시하게 되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제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사상과 관념이 바뀌지 않는다면 발을 깎아 신발에 억지로 맞춘 자유민주처럼 어딘가 부적절한 면이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빈승이 처음 대만에 와서 대만의 민주선거에 처음 참여한 것이 50~60년 전으로,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 달라”는 구호도 외치면서 서로 양보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점차 상황이 악화되면서 수시로 선거에 뇌물을 주고 표를 사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상대를 헐뜯는 말도 서슴없이 했습니다.

어느 한 번은 가오슝시 시장선거를 치른 진무장(陳武璋)이 선거 후에 선거참모장이었던 홍지리(洪地利) 의원을 통해 경선 후에 남은 경비를 수산사에 기증하겠다고 보내왔지만 저는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생 정치인의 기부를 받은 적이 없었고 표를 부탁하는 봉투를 받은 적도 없었기에 당연히 정치인이 저에게 주는 기부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홍 선생은 “이것은 선거를 치른 뒤 남은 돈이니 받으셔도 상관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홍 의원님! 이 돈을 만약 제가 한번이라도 받게 되면 저의 일생 이념과 명예에 관계된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결국 돈을 갖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빈승의 원칙’입니다.

미국에서 ‘정치헌금’ 사건이 있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미국에서 정치헌금은 합법적인 것으로, 미국 정부는 매번 선거에서 국민들이 제한된 범위에서 기부를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미국에서 생존하면서 불법을 펼쳐서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하는데 미국인들과 똑같이 평등한 권리를 행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들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비록 일반 백성이지만 미주 사회에서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선거 때마다 ‘출가인’이 투표를 하러 가면 매체들의 비아냥대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이러한 종교적 차별행위는 민주주의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자유민주가 타락했기 때문인가요? 이는 오늘날 대만의 정치인들과 국민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대만의 국민당은 ‘중화민국’을 인정하지만 민진당은 ‘중화민국’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매번 총통선거에 후보자를 내서 경선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의 총통선거에 경선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 사람인가는 바뀔 수 없는 것인데 매번 제가 중국인이라고 할 때마다 제가 틀렸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중국인이 아니면 저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저는 일본인입니까? 저는 미국인입니까? 설마 저를 무국적자의 세계난민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요?

정치를 하는 도리는 포용과 평화, 존중, 평등해야 하며 온 국민을 잘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중화문화에서 ‘왕도(王道)’가 ‘패도(覇道)’ 보다 중요합니다.

어쨌든 한마디로 말한다면 저는 한 ‘출가인’으로 국민당 당원을 했었고 제가 중국인이라는 것은 빈승의 일생에서 바뀔 수 없습니다. 이는 저의 이념이자 신념이기도 합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62호 / 2016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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